[1월 14일 화요일 예수바라기] 다니엘 3장 (2) 풀무불: 조작이 주는 폭력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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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얼굴빛을 바꾸고…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지라 하니라”(단 3:19, 20).

폭력은 조작의 행동 대장

진리는 사랑과 인내를 통해 일하지만, 거짓과 왜곡과 조작은 폭력을 통해 자기 세계를 구축해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느 공동체가 진실한지를 아는 길은 그곳에 유무형의 폭력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해 보면 됩니다.

“한국 사회는 배운 엘리트들이 카르텔을 형성하여 아래 계층을 착취하는 부패 구조”라는 기사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카르텔을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있을 때 그 수장들은 그들이 장악한 언론과 재벌을 통해 적당한 공포심이라는 폭력을 조장합니다. 그러면 이미 조작의 공간과 시간 속에 있던 사람들은 사고가 정지되어 자기 세상이 무너진다고 생각하고 소란을 피웁니다. 그렇게 카르텔은 폐쇄된 조작과 공포심 조장을 통해 더욱 공고해 집니다.

이제 느부갓네살은 다니엘 2장의 꿈 사건을 통해 레임덕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을 염려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권력을 오랫동안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일 금 신상을 조작해 만들어 세웁니다. 대형 이벤트를 열어 흥미로운 예술 및 문화 행사를 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풀무불을 보여주며 공포와 불안을 자극합니다. 그렇게 해서 왕은 자기 세계를 오랫동안 공고히 유지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저의 한 친구는 독재 권력의 폭력에 대항해서 폭력적인 투쟁을 하다가 3년의 수감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출옥 후에 그를 만났을 때 저는 그의 열정에 압도되었습니다. 조작되고 구조화된 폭력에 온몸으로 항거하며 감옥에 갇히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를 보며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그때 저는 폭력에 저항해 같이 폭력을 행사할 수도 없었고 올바른 것에 대해 침묵하는 것도 부끄러웠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세 친구는 폭력에 폭력으로 저항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개진한 다음에 풀무불에 순순히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풀무불 안에서 그들 중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폭력에 폭력으로 저항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도 폭력을 거부하며 주님의 길을 따라갔습니다. 그 뒤를 따라서 시대마다 수많은 제자들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땅에 변화가 일어났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습니다.

기도) 거대한 풀무불에 직면할 용기를 허락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