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방언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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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총회 성경연구소의 성경 난해 문제 해석

Interpreting Scripture: Bible Questions and Answers


[대총회 산하에 봉직하고 있는 선발된 학자 49명이 내놓은 성경 난제 94개에 대한 균형 잡힌 해석들]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방언은 무엇인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 14:2).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이 말하는 방언의 성격은 무엇인가? 바울은 여기서 오늘날 우리가 오순절 은사주의 교회들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해할 수 없는 천사의 방언이나 무아경에서 하는 방언을 언급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순히 외국어를 가리키는가?

고린도 교회:
이 편지를 쓰기 약 3년 전에 바울이 세운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에 당면해 있었다. 이를테면, 교회 내 파당 사이의 분쟁(고전 3:3), 심각한 부도덕(고전 5:1), 신자 사이의 법정 소송(고전 6:1), 결혼 문제(고전 7:1),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는 것(고전 8:1), 공중 예배에서 여성들의 부적절한 행동(고전 11:2∼16), 주의 만찬을 오용함(고전 11:21), 영적 은사들의 적절한 기능, 특히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과 관련된 오해(고전 14:1∼5) 등이다.

영적 은사의 적절한 사용:
이 편지에서 방언은 12∼14장에만 언급된다. 이 장들에서 영적 은사가 다뤄지는데, 그중 하나가 “각종 방언 말함”(고전 12:10, 28) 또는 간단히 “방언”(고전 12:30)이라 불리는 은사이다. 이것에 덧붙여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도 있다(고전 12:10, 30). 바울은 영적 은사들보다 훨씬 더 나은 어떤 것 곧 사랑을 내세우면서 12장을 마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사람의 방언이나 심지어는 천사의 말을 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고전 13:1).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은 방언 말함과 예언을 비교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계속한다. 하지만 진짜 쟁점은 누가 예배에서 유익을 얻을 것인가? 그리고 예배에서 무질서의 문제이다. 방언에 대한 논의는 이런 배경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이 영적 은사의 활용을 통해서 누가 유익을 얻을 것인가? 은사를 받은 사람만 얻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도 얻는가?(고전 14:2∼6, 9). 바울은 은사의 목적이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한다(고전 14:4, 5, 12, 17, 26). 더욱이, 교인들이 정신이 건전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외부인들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고전 14:23). 27∼40절은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 나타난 무질서의 문제를 논한다. 영적 은사가 그것의 수혜자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으므로 두 세 사람이 차례로 말해야 하고 통역도 세워야 한다고 바울은 권면한다. 만일 이런 규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방언 말함은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서 아무런 가치를 얻을 수 없다. 예언도 마찬가지다(고전 14:29∼32). 그러므로 문맥을 보면 문제의 쟁점이 영적 은사의 남용에 관한 것임이 분명해 진다.

중요한 단어들의 의미:
고린도전서 14장이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몇몇 주요 단어들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구약의 헬라어 역본인 <70인역>과 신약에서 중요한 헬라어 단어들의 용례를 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방언”(글롯사): 헬라어 글롯사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우세하다. (1) “혀”라 불리는 인체 기관(참조 시 22:15; 약 3:5). (2) 각기 다른 언어를 말하는 백성(슥 8:23; 계 5:9) 혹은 그 언어(창 10:5; 행 2:4). (3) 오순절의 “불의 혀”(행 2:3).
“말하다”: “말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랄레오는 고린도전서에만 34회 나온다. 14장에선 “방언”이라는 말과 함께 열 번 나오고, “방언”이라는 말이 없이 14회 나온다. “말하다”가 “방언”이라는 말이 없이 나올 땐 그 말하는 행위는 소통이 가능한 내용을 담은 실제 언어와 관련된다. “말하다”는 바로 그 단어가 “방언 말함”이라는 구절에서도 사용되므로(고전 14:2, 4∼6 등) 모든 본문에서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언어는 의미를 잃게 된다. 어떤 단어가 분명하게 다시 정의되지 않았다면 같은 문맥에선 같은 의미를 지녀야 한다. 따라서 저자가 예언과 방언 말함을 번갈아가면서 언급하는 14장 문맥에서 랄레오라는 단어는 항상 같은 의미를 지녀야 한다.1
“방언 말함”: 같은 문맥에 나오는 “말함”과 “방언”[혀]이라는 단어 및 “방언 말함”이라는 구절이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가? (1) 지혜 문학에서: “내 혀가 입에서 동하는구나[말하다]”(욥 33:2). 의인의 혀는 공의를 말한다(시 37:30; <70인역>의 시 36:30). “거짓된 혀로 내게 말하며”(시 109:2; <70인역>의 시 109:2). (2) 예언서에서: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사 28:11).2 “그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렘 9:5). (3) 복음서에서: “새 방언을 말하며”(막 16:17). (4) 사도행전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다(행 2:4). 그들이 말한 것은 외국어였다. 각기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다(행 2:11)고 말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0:47에서 베드로가 고넬료와 그의 집을 가리켜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외국어를 말한 것을 일컫는다. 이것은 성령을 받은 자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고 말하는 사도행전 19:6에도 동일
構적용된다. (5) 고린도전서에서: 고린도전서 12:30에서 “방언 말함”이라는 구절은 영적 은사를 묘사하는 말로 나온다. 고린도전서 13:1에서 그것은 인간의 언어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된다. 논란이 되는 본문들은 주로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온다. “방언 말함”이라는 구절의 “방언”이 14:2, 4, 13, 27에서는 단수로 되어 있고, 14:5(두 번), 6, 18, 23, 39에는 복수로 되어 있다. “방언 말함”이 성경에서 전반적으로 외국어를 가리키므로, 본문 자체에 분명한 지시가 없다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이 구절을 성경 다른 부분의 용례와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비밀”: “비밀”이라는 말은 신약에서 28회 나타나는데, 21회는 하늘나라의 비밀 및 그와 연관된 개념들을 가리킨다. 다른 경우는 “불법의 비밀”(살후 2:7), “일곱 별의 비밀”(계 1:20), 요한계시록 17장의 “음녀”의 “비밀” 등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1(<개역한글판>에는 “증거”로 되어 있음), 2:7; 15:51에서 헬라어 뮈스테리온(“비밀”)의 단수 형태를 사용한다. 2장에서 “비밀”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곧 그리스도 안에서 및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활동을 말한다. 15장에서 “비밀”은 모두 다 잠잘 것이 아니라 재림 때 변화될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4:1, 13:2; 14:2에는 이 단어의 복수 형태가 사용돼 있다. 바울의 글에서 “비밀”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계시된 진리들 곧 그리스도 및 구원의 계획과 관련된 진리들을 말한다.
“영”: 고린도전서에서 헬라어 퓨뉴마(“영”)는 일반적으로 성령을 가리키지만 사람의 영 혹은 전 인격(참조 고전 2:11; 5:5; 16:18), 세상의 영(고전 2:12), 기타 다양한 영들(고전 12:10, 참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참교사와 거짓 교사 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임)도 묘사하는 데 쓰였다. 12장에 이 단어가 가장 집중적으로 나온다. 이 장에서 “영”은 한 번 복수로 나오고 열한 번 단수로 나온다. 단수로 된 “영”은 항상 성령을 가리킨다. 그는 영적 은사의 창시자이다. 그러므로 영적 은사에 관한 논의를 계속하는 고린도전서 14:2의 “영”도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 더욱이, 바울이 사람의 영에 대해 말할 때는 그것을 명시한다. 그가 대명사나 동격어구 같은 수식어(예를 들어서 “사람의”, 고전 2:11)를 사용할 때나 그의 편지의 문맥을 보면 “영”의 성격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고린도전서 14:2에는 수식어가 없기 때문에 바울이 성령을 가리켰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비밀”은 계시된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 이치에 맞다.


고린도 교회에서 은사의 남용:

한편으로 바울은 영적 은사를 활용하라고 교회를 독려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방언 은사의 남용을 교정하고자 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 은사를 의도된 목적(외국어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에 맞게 사용하는 대신 교회 안에서 자신을 내세워 지위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사용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고전 14:2).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든 말을 다 이해하시지만, 교인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방언이 외국어임을 지지하는 증거:

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이해할 수 없는 무아경의 언어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의 증거는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실제 언어를 가리킨다는 견해를 지지한다.
1. 문맥은 이 방언이 실제 언어임을 보여 준다. 고린도전서 13:1은 “사람의 방언”이라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한다. 이 말은 확실히 인간의 언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바울은 가정적인 경우를 말하고 있다. 내가 외국어를 말하고 천사처럼 말할 수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이다.
2. 신약 전반에 걸쳐서 “언어”를 의미하는 같은 헬라어 글롯사가 방언의 은사를 가리키는 데도 사용된다. 사도행전에서 방언이 외국어를 가리키기 때문에, 고린도전서에서 방언도 외국어로 이해해야 한다. 난해한 구절은 분명한 구절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고린도전서 14장은 “방언”이 분명하게 외국어를 가리키는 사도행전 2장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3. 하나님은 인간의 지성을 통해 역사한다.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이해할 수 없는 지껄임, 마 6:7)하지 말라고 권고하신 주님께서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무아경의 언어를 말하라고 독려하실 리 없을 것이다.
4. 고린도전서 14:21은 이 문맥에서 방언의 은사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정의 같은 것을 제공한다. 이 성경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생소한 입술[외국어]”, 곧 문자적으로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실 것이라고 말하는 이사야 28:11을 인용한다. 이사야 28장의 문맥을 살펴보면, 다른 방언 곧 외국어를 말하는 사람은 앗수르 인들임이 드러난다. <70인역>은 “다른 방언”을 글롯사 헤테라라고 번역한다. 바울은 이 두 단어를 결합하여, 헤테로글롯소이에 대해서 말한다. “이런 유비는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난 일도 [이사야의 상황과] 같은 경우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외국어들’이 방언 말하는 자들을 통해 유입되었으나 듣는 자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결과를 내지 못한다.”[3] 고린도전서 14:21이 분명하게 외국어에 관해서 말하므로 2절 역시 실제 인간의 언어를 가리켜야 한다. 더욱이, 오순절에 실제 언어를 말한 것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강력한 표적이 되어 그들을 회개로 이끈 것처럼(행 2:28), 고린도전서 14:22에서도 방언이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으로 주어졌다.
5. 성령의 은사들은 공공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으며(고전 12:7), 따라서 순전히 자기만족을 위해서만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배제한다.
6. 방언의 은사가 사도행전 2장에 묘사된 오순절에 처음으로 나타났는데, 거기서 그것은 외국어로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마가복음 16:17에 언급된 예언의 성취였다. 사도행전 2장에 묘사된 사건들이 고린도전서에 제시된 사건들보다 더 이른 시기에 일어났지만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가 사도행전보다 먼저 기록되었다. 고린도전서 14장 및 사도행전 2장과 방언의 은사를 말하는 사도행전의 다른 본문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연관성이 있다.
(1) 고린도전서 14:22, 23과 사도행전 2:13에는 방언에 대한 유사한 반응이 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미치거나 술 취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2) 방언 말함은 교회의 사명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고전 14:22; 행 2:14∼41). 방언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적이 되어 그들을 회개로 이끈다. 방언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으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거부한다. 이해할 수 없는 무아경의 언어는 표적이 되지 못하고, 따라서 성경에 보도된 결과들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3) 사도행전 2:4에 나온 헬라어 구절 랄레인 헤테라이스 글롯사이스(“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는 고린도전서 14:21에 나온 외국어를 말하는 자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표현(엔 헤테로글롯소이스 랄레소)을 떠올리게 한다.
(4) 사도행전 2장에서 누가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외국어를 지칭하는 “방언 말함”의 영적 은사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것과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 사도행전 19:6에서 누가는 어떤 제자들이 이런 은사를 받은 상황과 바울을 결부시킨다. 바울이 이 신자들에게 안수했을 때 그들이 성령을 받아 방언을 말하고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 누가가 같은 구절을 바울이 사용한 것과 다르게 이해하거나 사용했다고 보긴 어렵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요약:

위의 논의는 방언의 은사를 아무런 공부도 없이 외국어를 말하는 은사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함을 보여 준다. 고린도전서 14:2의 상황은 이렇다. 소통될 수 없는 상황에서 외국어를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만 말하는 것이 되는데, 하나님은 모든 언어를 다 이해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린도에서 방언의 은사는 참으로 성령의 은사였으나 남용되었다. 따라서 바울은 영적 은사들이 신자나 불신자 모두에게 축복이 되고 방해거리가 되지 않도록 그것들을 올바로 사용하라고 권면하였다.

Ekkehardt Mueller

<미주>
[1] Raymond F. Collins (First Corinthians, Sacra Pagina Series, Volume 7 [Collegeville, MN: The Liturgical Press, 1999], 492)는 랄레오와 레고를 구분하여, 레고는 이해할 수 있는 대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주장한 것 같다. 하지만 이 둘은 같은 문맥에서 함께 나타나며, 따라서 어떤 점에서 볼 때 고린도전서 9:8; 12:3; 14:21 등에서는 상호 교대로 사용된 것이다. 바울은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며(랄루멘, 고전 2:7), 또한 신자들에게 “비밀을 말한”다(레고, 고전 15:51).
[2] <70인역>의 이사야 29:24; 32:4도 어눌한 자의 혀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도록 배울 것이라고 말한다.
[3] Gerhard F. Hasel, Speaking in Tongues: Biblical Speaking in Tongues and Contemporary Glossolalia (Berrien Springs, MI: Adventist Theological Society Publications, 1991), 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