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성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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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만찬은 예수를 주와 구주로 믿는 믿음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그분의 몸과 피의 상징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만나시고 능력을 주시기 위하여 이러한 성만찬에 참여하신다. 이 예식에 참여함으로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기쁨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성만찬 예식의 준비에는 자기 성찰, 회개, 고백이 포함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정결을 나타내고, 그리스도와 같은 겸손으로 기꺼이 서로 섬기려는 마음을 표현하고, 사랑 가운데서 우리의 마음이 연합되도록 성만찬 예식을 제정하셨다. 성만찬 예식에는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이 참여할 수 있다.-기본 신조, 16.

유월절을 경축하기 위해 다락방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발은 먼지투성이가 되었다. 누군가 발씻는 관습을 위해 물그릇과 대야와 수건을 이미 준비해 놓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 천한 일을 행하려 하지 않았다.
당신의 죽음이 임박했을 아시고 예수님은 비통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눅 22:15, 16)
제자들이 피차에 대하여 품고 있었던 증오심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찼다. 그분은 그들이 누가 당신의 왕국에서 가장 큰자로 여김을 받을 것인지에 대하여 여전히 다투고 있는 것을 아셨다(눅 22:24; 마 18:1, 20:21).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겸비하게 하고 종의 역할을 대행하고 다른 이들의 발을 씻기는 것을 막은 것은 감투를 위한 그들의 책략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왕국에서 참된 위대함은 겸비와 사랑의 봉사로 나타난다는 것을 그들이 과연 배울 수 있을까?
“저녁 먹는 중”(요 13:2, 4)*에 예수님은 조용히 일어나셔서 종의 수건을 취하시고 대야에 물을 부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였다. 종의 역할을 하시는 주님! 제자들은 무언의 견책을 받고 수치심에 사로잡혔다. 예수님은 발을 다 씻기시고 그의 자리로 돌아가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며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 13:14-17)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유월절 대신 당신의 큰 희생을 기념하게 될 예식인 성만찬을 제정하셨다. 그는 무교병을 취하사 그것을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마 26:26),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고 말씀하셨다. 그 다음에 그분은 축복의 잔을 취하시고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 28).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마 26:26-28; 고전 11:25, 26, 10:16 참조)고 말씀하셨다.
성찬 예배는 세족 예식과 성만찬 예식으로 이루어진다. 그와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당신과의 깊은 교제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고자 이 두 예식을 제정하셨다.

세족 예식
유월절을 경축하는 데 있어서 유대인 가정은 모든 누룩, 즉 죄를 무교 주일의 첫날 전에 가정에서 제거해 버리는 관습을 지켰다(출 12:15, 19, 20). 그와같이 신자들은 올바른 정신으로 그리스도와 가장 심오한 수준의 교제를 갖기 전에 교만, 경쟁심, 질투심, 적개심, 그리고 이기심 등을 포함하여 모든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만 한다.
이러한 목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세족 예식을 제정하셨다. 그분은 모범을 보이셨을 뿐 아니라 그들도 그분이 하신 것과 똑같이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그들에게 축복을 약속하셨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 13:17). 성만찬 예식 전에 거행하는 이 예식은 모든 사람이 “합당치 않게” 그 성찬에 참여하게 되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야 한다는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고전 11:27-29).

이 예식의 의미. 이 예식은 그리스도의 사명과 그 예식에 참여하는 자의 경험에 모두 큰 의미가 있음을 시사한다.
1. 그리스도의 자아 겸비에 대한 기념. 세족 예식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봉사 생애에서의 겸비를 기념한다.* 그분은 하늘의 영광 가운데서 아버지와 동등한 분이셨으나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빌 2:7)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처럼 무아적으로, 그토록 사랑으로 베풀어 주셨건만 당신께서 구원하러 오신 자들의 대다수에 의해 배척을 받으신 것은 굴욕적인 일이었다.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전체에 걸쳐서 사단은 언제나 그분의 명예를 손상시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범죄자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무죄하신 그분께 얼마나 큰 치욕을 가져왔겠는가!
그리스도는 무아적인 봉사의 생애를 사셨다. 그분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마 20:28) 오셨다. 발을 씻기는 행위를 통하여 그분은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천한 일도 개의치 않고 행하실 용의가 있으심을 보여주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분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의 마음에 당신의 봉사의 생애와 온유함을 인상깊게 새겨 주셨다.
이 준비의 의식을 한 성예식으로 만드심으로써 그리스도는 다른 이들을 섬기도록 감동을 줄 부드러움과 사랑의 상태로 신자들을 이끄시고자 의도하셨다. 이 예식은 그 예식의 의미를 깊이 명상하는 자들에게 다른 이들을 겸비하고 사려 깊게 취급하기를 촉구한다. 발을 씻김으로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름으로 우리는 그분의 정신을 따르기로 천명한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이 예식에 참여하는 것이 자신을 낮추는 일이지만 결코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는다. 그리스도 앞에 허리를 숙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 발을 씻겨드리는 것을 특권으로 여기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예수님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고 말씀하셨다.
2. 더 높은 정결케 함의 표상. 발 씻음은 그들의 발을 깨끗케 한 것 이상을 성취했다. 그것은 더 높은 정결 곧 마음을 정결케 함을 상징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전신을 다 씻겨 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분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요 13:10)고 말씀하셨다.
목욕한 자는 깨끗하다. 그러나 맨발로 샌달을 신은 발은 곧 더러워져서 다시 씻을 필요가 생긴다. 제자들도 그러하였다. 그들의 죄들은 침례로 씻어졌지만 그들의 유혹을 받아 마음에 교만, 질투, 그리고 악을 품었었다. 그들은 그들의 주님과 밀접한 교제를 하거나 그분께서 그들과 맺으실 새 언약을 받아들일 태세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발 씻김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성만찬에 참여할 준비가 갖추어지기를 갈망하셨다. 배반자 유다를 제외하고 그들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기심과 교만으로부터 정결케 되었고 그들은 서로 사랑으로 연합되었다. 예수님의 무아의 행위를 통하여 그들은 겸비하게 되었고 온순하게 되었다.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침례를 받았을 때 우리는 그의 피로 정결케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또 잘못을 저지른다. 우리의 발이 더러워진다. 우리는 다시 그리스도께 와서 그의 정결케 하시는 은혜로 그 더러움을 씻어버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침례 받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요 13:10)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식으로서 발 씻음은 우리에게, 우리가 규칙적으로 정결케 함을 받을 필요가 있음과 우리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피에 의존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발 씻음 그 자체는 죄로부터 정결케 하지 못한다.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정결케 하실 수 있으시다.
3. 용서의 친교. 참석자들 사이에 생기는 용서의 태도는 이 예식이 상징하고 있는 정결케 함이 효력을 발휘했음을 나타낸다. 우리가 용서해 줄 때에만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할 수 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 15).
예수님은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기꺼이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고 다른 사람에 의해 기꺼이 씻김을 받을 필요가 있다. 후자의 경우에 우리는 우리가 영적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예식이 끝났을 때,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죄가 씻김을 당했으므로 우리가 정결하다는 것을 보증해 준다. 누구에 의해서인가? 그리스도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봉사의 상징들을 우리에게 시행해 주는 사람은 동료 신자들이다. 그러므로 이 예식은 용서의 교제가 된다.*
4. 그리스도와 신자들과의 관계. 이 세족 예식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요 13:1)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낸다. 베드로가 그의 발을 씻기는 것을 거절했을 때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 13:8)고 대답하셨다. 씻김이 없으면 교제도 없다. 그리스도와의 계속적인 교제를 갈망하는 사람들은 이 예식에 참여할 것이다.
그날 저녁 예수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고 말씀하셨다. 그 예식의 기별은 명백하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이것은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것을 명령한다. 그것은 우월감이나 편파심에 사로잡히지 않게 해준다. 우리의 생활 방식은 동료 신자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반영할 것이다.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씻기면서 우리는 그들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을 인해 기뻐한다.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 이 예식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든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은 강력한 증언이 될 것이다.
한 불교 승려가 한 선교사에게 그리스도교를 대표할 만한 한 장면을 보여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었다. 미술가들이 세계의 주요 종교들을 묘사한 벽화들과 조각으로 사원의 경내에 있는 한 홀을 장식할 예정이었다. 잠시 생각한 후에 그 선교사는 요한복음 13장에 있는 이 이야기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내가 읽을 때 그 승려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행위를 묘사한 성경절을 읽을 때 이상한 경외심을 자아내는 조용함과 능력을 느꼈다”고 나중에 그 선교사는 술회했다. 그 문화권에서는 발과 관련된 어떤 문제들을 공적으로 논하는 것 자체가 실례(失禮)로 간주되고 있었다.
“내가 낭독을 끝냈을 때 한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당신의 종교의 창시자가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겼다는 말씀인가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눈썹과 머리를 삭발한, 대체로 침착한 둥근 얼굴의 이 승려는 놀람과 경탄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할 말을 잊었으며 나 또한 그러하였다. 나는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느라 매우 힘들게 침을 여러 번 삼켰다. 그리고 우리 둘은 그 장면의 드라마에 넋을 잃었다. 내가 그를 바라보았을 때 그의 얼굴에 표현되었던 믿기 어렵다는 표정은 경건한 두려움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창시지 예수님은 어부들의 더러운 발을 만지시고 씻기셨던 것이다! 몇 순간 후에 그는 평정을 되찾고 일어서며 ‘이제사 그리스도교의 진수를 깨달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성만찬의 거행
개신교 가운데 성찬예식(Communion Service)을 일컫는 가장 흔한 명칭은 “주의 만찬”(고전 11:20)이다. 또 다른 명칭은 “주의 상”(고전 10:21), “떡을 떼는 것”(행 20:7, 2:42 참조)*, 그리고 그 예식의 감사와 축복의 국면들을 언급하는 “주의 잔치”(Eucharist)이다(마 26:26, 27; 고전 10:16, 11:24)
성만찬은 슬픔의 시간이 아니라 기쁨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먼저 행하는 세족 예식은 자아 성찰과 죄의 고백과 불화의 화해와 용서의 기회를 제공한다. 구주의 피로 말미암아 정결케 되었다는 보증을 얻은 후 신자들은 그들의 주님과 특별한 교제에 참여할 준비가 갖추어진다. 그들은 십자가의 그늘이 아니라 구원의 빛 가운데 서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승리를 경축할 태세를 갖추고 기쁨으로 그분의 상(床)에 나아간다.

성만찬의 의미. 성만찬은 옛 언약 시대의 유월절 축제를 대체했다. 유월절은 유월절 양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명을 버리셨을 때 성취되었다. 돌아가시기 전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대체물, 즉 새 언약 아래있는 영적 이스라엘의 큰 축제를 제정하셨다. 그같이하여 성만찬의 상징물의 대부분의 뿌리는 유월절 의식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 죄로부터의 구출에 대한 기념. 유월절 절기가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이 구출받음을 기념했듯이 성만찬은 영적 애굽, 즉 죄의 예속에서의 구출을 기념한다.
문설주와 인방에 뿌려진 유월절 양의 피는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했다. 그 고기가 제공한 자양분은 애굽에서 도피할 기력을 그들에게 주었다(출 12:3-8).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희생은 죄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온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을 통하여 구원함을 받는다(요 6:54). 성만찬은, 십자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구원과 용서의 길을 준비했고 영생을 보장했음을 선포한다.
예수님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고 말씀하셨다. 이 예식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대속적 차원을 강조한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고전 11:24; 사 53:4-12 참조)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십자가에서 무죄하신 그분께서 범죄자를 대신하셨고, 의로우신 그분께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 이 관대한 행위는 죄인의 죽음을 요구하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켰으며 회개하는 죄인에게 용서와 평화와 영생의 보증을 마련해 주었다. 십자가는 우리의 정죄를 해제시켰으며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와 죄를 정복할 능력을 마련해 주었다.
1) 떡과 포도나무의 열매. 예수님은 자신에 관한 여러 진리들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많은 은유들을 사용하셨다. 그분은 “나는 양의 문이라”(요 10:7), “내가 곧 길이요”(요 14:6), “나는 참 포도나무요”(요 15:1) 그리고 “내가 곧 생명의 떡”(요 6:35)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표현들 중 어느 것도 문자적으로 취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진짜 모든 문이나 길이나 포도나무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그것들은 보다 깊은 진리들을 예시하고 있다.
기적적으로 5천명을 먹이셨을 때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의 보다 깊은 의미를 드러내셨다. 참떡으로서 그분은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2-35)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가장 깊은 필요와 갈망의 배고픔과 기갈을 해소시켜 주시고자 당신의 살과 피를 제공하셨다(요 6:50-54).
예수께서 잡수신 유월절 떡은 무교병이었으며 포도나무의 열매는 발효되지 않은 것이었다.* 발효를 일으켜 빵을 부풀리는 누룩(이스트, 효모)은 죄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고전 5:7, 8). 그러므로 그것은 “흠없고 점없는”(벧전 1:19) 하나님의 어린양을 대표하기에 부적합하였다.* 무교병 혹은 “발효되지 아니한 떡만이 죄 없는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할 수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포도나무의 변질되지 않은 열매, 즉 발효되지 않은 포도즙만이 구주의 정결케 하는 피의 더렵혀지지 않은 완전을 적절히 상징한다.*
2) 먹고 마심.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3, 54)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화시키는 것을 표현하는 상징적 언어이며, 그것을 통하여 신자들은 하늘과의 교제를 유지하고 영적 생명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분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고 말씀하신다.
신자들은 생명의 말씀인 성경을 “먹음”으로 생명의 떡 그리스도를 먹고 사는 것이다. 그 말씀(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는 능력이 나온다. 성찬 예식에서 우리는 또한 성령을 통하여 그의 말씀을 섭취함으로 그리스도에 참여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성만찬을 거행할 때마다 말씀의 강론을 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의 유익을 우리의 것으로 삼기 때문에 성만찬은 단순한 기념적인 식사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다. 성찬 예식(Communion Service)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에게 생명과 기쁨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지탱시켜 주시는 능력을 통하여 우리의 생명이 생기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간단히 말해 그 상징은 “육체적 생명이 음식과 음료에 의존하듯이 영적 생명이 그리스도께 의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만찬 예식 중에 우리는 그 잔을 “축복”(고전 10:16)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잔을 위하여 “사례”(마 26:27) 하셨듯이 우리도 예수의 피에 대하여 감사를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2. 그리스도와의 단체적 교제. 우리가 투쟁과 불화로 가득 찬 세상에서 이러한 예식에 단체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교회의 통일성과 안전성에 기여하며 그리스도와 그리고 상호간에 존재하는 참교제를 증명해 준다. 바울은 이러한 교제를 강조하면서,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 10:16, 17)고 말하였다.
“이것은, 성찬떡은 여러 조각으로 부서져서, 신자들에 의해 먹혀진다는 것과, 모든 조각들이 같은 빵에서 나온 것이듯 이 성찬에 참예하는 자들은 부숴진 떡에 의해 표상된 바 몸이 부수어진 그분 안에서 연합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예식에 함께 참예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연합되었음과 그리스도를 그 머리로 하는 한 대가족에 소속되었다는 것을 공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모든 교인들은 이 신성한 성만찬에 참예해야 한다. 그 이유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과 만나시고 당신의 임재하심으로 저들에게 활력을 주시기 때문이다. 비록 부적당한 마음과 손이 그 예식을 집전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섬기려고 그곳에 계신다.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오는 모든 사람은 큰 축복을 받을 것이다. 이 거룩한 특권의 기회를 등한히 여기는 자들은 큰 손실을 당할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고 말해짐이 마땅할 것이다.”*
우리는 주의 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심오한 공동체 의식을 경험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우리를 분리시키는 장벽들이 무너진 상태에서, 공통의 바탕 위에서 만난다. 우리는 이곳에서 사회 가운데는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이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는 우리를 연합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성만찬의 잔을 나누어주시면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새 언약을 위탁하셨다. 그분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 28; 눅 22:20 참조)고 말씀하셨다. 옛 언약이 동물 희생 제물들의 피로 비준되었듯이(출 24:8),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피로 비준되었다. 이 예식에서 신자들은 그들의 주님께 대한 그들의 충성의 서약을 새롭게 하며,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자신을 인류에서 붙들어매신 놀라운 계약의 한 부분임을 새롭게 인식한다. 이 언약의 한 부분으로서 그들은 경축할만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그와같이 성만찬은 영원한 은혜의 언약을 인침에 대한 기념물이요 감사 예식이다. 받는 축복들은 참석자들의 믿음에 비례한다.
3. 재림에 대한 고대.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성만찬 예식은 갈바리와 재림의 사이의 시기에 걸쳐 있다. 그것은 십자가와 그 왕국을 연결시킨다. 그것은 신약 세계관의 정수인 “이미”와 “아직”을 결합시킨다. 그것은 구주의 희생과 그의 재강림, 즉 준비된 구원과 성취된 구원을 함께 결합시킨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볼 수 있는 모양으로 오실때까지 그분께서 성령을 통해 임재하신다는 것을 선포한다.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마 26:29)리라 하신 그리스도의 맹세는 예언적이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미래에 우리 구주와 함께 나눌 천국 만찬으로 향하게 한다. 그 예식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계 19:9)의 대축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때를 위한 한 준비로서 이렇게 명령하셨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눅 12:35-37).
당신의 추종자들을 연회장에 모으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에서 하셨듯이 천국 만찬을 집전하실 것이다. 오랫동안 그분은 이 때가 오기를 기다려 오셨다. 이제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그는 보좌에서 일어나시고 수종드시기 위해 걸어나오신다. 모든 사람의 눈이 놀라움으로 가득 찬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수종을 받는 영예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우리가 수종들겠습니다”라고 사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조용하면서도 단호하게 그들을 앉히신다.
그리스도께서 종의 위치를 취하시고 자신을 겸비하게 하셨을 때보다 지상에서 더 위대하신 적은 없었다. 그가 성도들을 섬기실 때만큼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위대하실 때는 결코 없을 것이다.* 바로 그분의 영원한 왕국에서 그리스도와 개인적 교제를 통한 미래 영광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바로 성만찬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최고의 기대이다.

참석 자격. 두 큰 예식, 즉 침례와 성만찬은 그리스도인 신앙에 매우 중요하다. 전자는 교회에 입교하는 문이며 후자는 교인들에게 유익을 준다.* 예수님은 신앙을 공언하는 당신의 추종자들에게만 성만찬을 거행하셨다. 그러므로 성만찬 예식은 신자들을 위한 것이다. 어린이들은 침례를 받지 않았다면 이 예식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성경은 주님께 대한 합당한 존경심을 가지고 이 예식에 참여하라고 명한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고전 11:27)기 때문이다. 이 “합당치 않”은 태도에는 “무질서한 행동”(21절 참조)이나, 혹은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에 대한 적극적인, 생동감 있는 믿음의 부족 등이 해당된다.* 이러한 행동은 주님께 대한 불경을 보여주며 구주를 거절하는 것으로, 그리하여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는 죄에 참여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부정당한 참여는 하나님의 불쾌를 초래한다. 합당치 않은 방식으로 먹고 마시는 것은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고전 11:29)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들은 보통의 음식과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상징하는 성별된 표상물을 구별하지 못한다. “신자들은 이 예식을 역사의 한 사건을 기념하는 정도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죄가 하나님께 얼마나 큰 희생을 요구했는지, 인간이 구주께 무엇을 빚지고 있는지에 대한 상기물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아들의 속죄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공적으로 증거해야 할 신자의 의무를 마음에 항상 생생하게 간직시켜 주는 한 수단이다.”* 이런 가르침에 비추어, 바울은 신자들에게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 전에 “자기를 살피”라고 권고한다(고전 11:28). 참석하기 전에 신자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그리스도인 경험을 회고하면서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단절된 관계들을 회복시켜야 한다.
재림교회 선구자들의 경험은 이와같이 자신들을 살피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재림운동의 초기에 신자들의 수가 적었을 때 예식들을 거행하는 일은 가장 큰 유익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금요일이 되기 전에 모든 교인들은 자기 형제들과 하나님과의 사이를 분리하게 한 모든 거리끼는 것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힘써 노력하였다. 심령을 엄밀히 살폈으며 하나님께 숨은 죄를 깨닫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사업상 저지른 부정직한 거래들을 자복하였고 성급하게 말한 무분별한 말들과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죄들을 자복하였다. 주님께서는 가까이 임하셨으며 우리는 크게 힘과 용기를 얻었다.”*
이런 살피는 일은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다른 사람이 대신 해줄 수 없다. 그 이유는 아무도 타인의 마음을 읽거나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본이신 그리스도는 성만찬 때의 배타주의를 배척하셨다. 공개적인 죄를 지은 사람들은 참석하는 데서 제외당하지만(고전 5:11) 예수님께서는 외적으로는 공언하는 추종자였지만 내적으로는 도적이요 반역자였던 유다와 만찬을 함께 하셨다. 성만찬 예식에 참예할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특징짓는 것은 마음의 상태, 즉 어느 특정 교회에 소속됨이 아닌,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한 헌신과 그분의 희생에 대한 믿음이다. 따라서 모든 교회의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성만찬에 참예할 수 있다. 새 언약의 대잔치를 자주 경축하도록 모든 사람이 초청을 받고 있으며 그들의 참석을 통해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인 것을 증거하도록 초청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