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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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계승하여 우리는 세상에서 불러내신 바 되었고, 예배와 친교, 말씀의 교훈과 성만찬의 거행, 온 인류에의 봉사와 전세계적인 복음의 선포에 동참한다. 교회는 그의 권위를 성육신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기록된 말씀인 성경으로부터 받는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며 교인들은 그분의 자녀로 입양되었다. 교인들은 새 언약의 기초 위에서 산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신 신앙 공동체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성결하게 하고 깨끗케 하기 위하여 돌아가신 신부이다. 그리스도께서 승리자로 다시 오실 때 그분은 당신의 피로 사셨고,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으며, 모든 시대를 통하여 충성을 다한 영광스러운 교회를 맞아들이실 것이다. -기본신조, 12.

참다못해 격노한 한 노인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친다. 재차 지팡이를 휘둘러친 다음 그는 “너희 반역자들아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으로부터 물을 내야만 하느냐?”고 외친다.
반석에서 한 물줄기가 용출해 나왔으며 그것으로 이스라엘의 기갈이 해소되었다. 그러나 모세는 물의 선물이 그 반석에게서 기인된 것으로 돌리는 대신에 그 공로를 자신에게 돌림으로써 죄를 범했다. 그리고 그는 그 죄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민 20:7-12 참조).
그 반석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합적으로 모두 그 위에 세우신 기초 곧 그리스도였다. 이 비유적 표현은 성경전체에 걸쳐 나타난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행한 마지막 설교에서 이 사건을 상기하면서 하나님의 안정성과 신뢰성을 묘사하기 위하여 바위의 은유를 사용했다.
“너희는 위엄을 우리 하나님께 돌릴지어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 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며 정직하시도다”(신 32:3, 4).
여러 세기가 지난 후 다윗은 동일한 주제 즉 반석으로서의 그의 구주를 노래했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시 62:7).
이사야도 오실 메시야에 대하여 같은 비유적 표현을 사용했다.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사 28:16).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한 평범한 돌로서가 아니라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벧전 2:4)로서 이 예언을 성취시켰다고 증거했다. 바울은 그 분을 유일의 견고한 기초로 확인하였다.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그는 모세가 쳤던 반석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그 표상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셨다. 그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선언하셨다. 그는 그리스도 교회를 산 반석인 자신 위에 설립하셨다. 반석이 침을 당한 것처럼 당신 자신의 몸이 세상의 죄를 위하여 희생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 어떤 것도 그분께서 마련하신 견고한 기초 위에 세워진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이 반석으로부터 나온 치유의 물이 목마른 국가들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겔 47:1-12; 요 7:37, 38; 계 22:1-5 참조).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선언을 하실 때 그 교회는 얼마나 연약하고 미약했던가 ! 그 교회는 지치고, 의심하고, 자기를 높이기 위해 애쓰는 소수의 제자들, 몇 아낙네들, 그리고 그 반석이 침을 당했을 때 사라져버렸던 지조없는 무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연약한 인간의 지혜와 명철 위에가 아니라, 만세 반석위에 설립되었다. 그 어떤 것도 당신의 교회를 파멸시키거나 당신의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남녀들을 구주께로 인도하는 교회의 사명을 방해할 수 없었음을 시간이 입증할 것이었다(행 4:12, 13, 20-23 참조).

“교회”의 성서적 의미
성경에 나오는 교회*라는 말은 “불러냄을 받은 자들”을 뜻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ekklesia)를 번역한 것이다. 이 표현은 백성을 소환하여 모이게 하는 관습에 의하여 모인 어떠한 모임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예수님 당시 널리 보급되어 있었던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헬라어 판인 70인역은 “모임”, “총회”(assembly), 혹은 “회중”(congregation)을 뜻했던 히브리어 카할(qahal)을 번역하는데 에클레시아를 사용했다(신 9:10, 18:16; 삼상 17:47; 왕상 8:14; 대상 13:2).”*
이러한 용법은 신약에서 더 확장되었다. 신약이 교회라는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주목해 보라. (1) 예배드리기 위하여 특정 장소에 모인 신자들(고전 11:18, 14:19, 28), (2) 어떤 지역에 살고 있는 신자들(고전 16:1; 갈 1:2; 살전 2:14), (3) 한 개인의 가정에서 집회를 가지는 일단의 신자들(고전 16:19; 골 4:15; 몬 2), (4) 어떤 특정한 지리적인 지역 내에 있는 일단의 회중들(행 9:31),* (5) 세계 전역에 있는 모든 신자들(마 16:18; 고전 10:32, 12:28; 엡 4:11-16 참조), (6) 하늘과 땅의 모든 충성스런 피조물들(엡 1:20-22; 빌 2:9-11참조).

교회의 본질
성경은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행 20:28; 고전 1:2)라 칭함으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도로 묘사한다. 예수님은 교회에 신적 권위를 부여하셨다(마 18:17, 18). 우리는 그리스도 교회의 본질을, 구약의 뿌리들을 고찰해 봄으로, 그리고 신약이 그것에 관하여 사용하는 여러 은유들을 고찰해 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 교회의 뿌리들. 구약은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들의 조직된 회중으로 묘사한다. 초기 시대부터 아담, 셋, 노아, 셈, 그리고 아브라함 혈통의 가족들은 그분의 진리의 수호자들이었다. 아버지가 제사장의 역할을 담당했던 이 가정들은 교회의 축소판이라고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풍성한 약속들을 주셨는데 이 약속들을 통하여 이 하나님의 가정이 점진적으로 한 국가로 자라났다. 이스라엘의 사명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사명-만국에 축복이 되며(창 12:1-3)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의 연장(延長)에 불과하였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그 국가는 “광야 교회”(행 7:38)(혹은 “회중”, RSV, NIV)로 불리웠다. 그 구성원들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출 19:6), 하나님의 “성민”(신 28:9; 레 26:12 참조) 즉 당신의 교회로 간주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세상의 주요 문명들의 중심지인 팔레스틴에 두셨다. 세 큰 대륙인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팔레스틴에서 만났다. 이곳에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신들과 합류하도록 다른 국가들을 초청하는 “종”이 되어야 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은 국가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그들을 불러내셨다(사 56:7). 그분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세상에 가장 큰 교회-세상 만국의 대표자들이 경배하러 와서 참 하나님을 배우고 구원의 기별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는 한 교회를 설립하시기를 원하셨다.
당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돌보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 고립주의, 민족주의, 교만, 그리고 자아중심주의에 빠져버렸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사명을 성취하는 데 실패하였다.
예수 안에서 이스라엘은 분수령에 도달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국가를 해방시킬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지만 그들 자신들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킬 메시야는 고대하지 않았다. 십자가에서 이스라엘의 영적 파산은 명백해졌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그들은 내부의 쇠퇴를 밖으로 드러내었다. 그들이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요 19:15)라고 부르짖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통치하시도록 허용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십자가에서 정반대의 두 사명이 절정에 도달했다. 첫째는, 너무 자기 중심적이 되어 결국 교회를 존재케 하신 바로 그분에 대해 눈멀게 된, 그리하며 실패로 돌아간 교회의 사명이요, 둘째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너무도 커서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그들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명이다.
십자가는 이스라엘의 사명의 종언을 의미한 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 교회와 그 사명-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출범시켰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사명을 상실했을 때 그들은 여느 나라와 다를바 없는 하나의 국가로 전락되었으며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었다. 그들 대신에 하나님은 세상에 대한 당신의 사명을 진척시킬 한 새나라, 한 교회를 설립하셨다(마 21:41, 43).
고대 이스라엘의 신앙 공동체와 밀접하게 관련된 신약 교회*는 회심한 유대인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로 구성되었다. 참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예수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이다(갈 3:26-29). 바울은 두 나무, 즉 각각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뜻하는 참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의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여 이 다양한 백성들의 새로운 유기적 관계를 예시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며(롬 9:6-8) 좋은 나무에서 꺾임을 당한 가지로 표상된 반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유대인들은 계속 붙어 있는 것으로 표상되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이방인들은 나쁜 나무에서 좋은 나무로 접붙인 바 된 가지들로 묘사했다(롬 11:17-25). 그는 이 새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선택된 도구로부터 계승한 거룩한 유산을 존중하라고 교훈하였다. “뿌리가 거룩한 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롬 11:16-18).
신약 교회는 그에 대응되는 구약의 교회와는 현저히 다르다. 사도 교회는 이스라엘 국가와는 별개로 독립적 조직이 되었다. 국가적 경계는 철폐되었으며 그리하여 교회에 전세계적 특성을 부여하였다. 한 민족적 교회가 되는 대신 그것은 그 창설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명령, 즉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마 28:19)으라는 명령 속에 새로 진술된 하나님의 원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선교사 교회가 되었다.

교회에 대한 은유적 묘사들. 신약의 교회에 대한 은유적 묘사는 교회의 본질을 조명해 준다.
1. 몸으로서의 교회. 몸의 은유는 교회의 통일성과 전체에 대한 각 교인들의 기능적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십자가는 모든 신자들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엡 2:16)시킨다. 성령을 통하여 그들은 “침례를 받아 한 몸”(고전 12:13) 즉 교회가 되었다. 한 몸으로서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다(엡 1:23). 그것은 그가 그의 충만함을 나누어주시는 유기체이다. 신자들은 그분의 몸의 지체들이다(엡 5:30). 따라서 그분은 당신의 능력과 은혜를 통하여 진실한 각 신자들에게 영적 생명을 주신다.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의 머리”(골 1:18), “교회의 머리”(엡 5:23)이시다.
당신의 사랑 가운데 하나님은 그의 몸된 교회의 각 지체가 극히 중요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각 지체에 적어도 하나의 영적 은사를 주셨다. 각 기관이 하는 일이 신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처럼 교회의 사명의 성공적 완수도 각 교인들에게 주어진 영적 은사들이 각각 그 기능을 발휘하는 데 달려 있다. 심장 없는 몸이 무슨 쓸모가 있으며 눈이나 다리가 없는 몸은 얼마나 더 비능률적이 되겠는가? 교회의 신자들이 그들의 은사들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죽거나 눈멀거나 적어도 절름발이 신세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할당하신 이 특별한 은사들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본서 16장 참조).
2. 성전으로서의 교회. 교회는 성령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기초이시며 “모퉁이돌”(고전 3:9-16; 엡 2:20)이시다. 이 성전은 죽은 건축물이 아니다. 이것은 역동적으로 성장한다. 그리스도께서 “산 돌”이심과 같이 신자들도 “신령한 집”을 구성하는 “산 돌”들이라고 베드로는 말했다(벧전 2:4-6)
그 건물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새로운 산 돌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엡 2:22)는 성전에 끊임없이 더해지고 있다. 바울은 신자들에게 이 성전이 심판 날에 불시련을 견딜 수 있도록 최선의 건축 자재들을 사용하여 그것을 건축하라고 촉구한다(고전 3:12-15).
성전 은유는 개 교회 회중의 성결과 세계적 교회의 성격을 모두 강조한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다고 바울은 말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전 3:17). 불신자들과의 친밀한 연맹은 그 거룩한 특성에 배치되므로 피해야 한다고 바울은 지적하고 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 6:14, 16). (그의 권면은 사업과 결혼 관계 모두에 해당된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최고의 관심을 쏟으시는 대상이기 때문에 크게 존중되어야 한다.
3. 신부로서의 교회. 교회는 신부로, 주님은 신랑으로 표상되었다. 주님은 엄숙하게 서약하신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호 2:19). 다시 그분은 “나는 너희의 남편임이니라”(렘 3:14)고 보증하신다.
바울은 동일한 비유적 표현을 사용한다.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그의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너무 깊고 항구적이어서 그 분은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엡 5:25)셨다. 그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엡 5:26)기 위해 이러한 희생을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의 거룩하게 하는 영향력(요 17:17)과 침례가 주는 정결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교회의 신사들을 정결케 하시고, 그들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당신의 완전한 의의 두루마기로 그들을 입히신다. 그같이 하여 그분은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엡 5:27)는 당신의 신부가 되도록 교회를 준비시키실 수 있으시다. 교회의 충만한 영광과 광휘는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보이지 않을 것이다.
4.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서의 교회. 성경은 예루살렘 도성을 시온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신다(시 9:11). 구원은 시온으로부터 나온다(시 14:7, 53:6). 그 도성은 “온 세계”(시 48:2)의 즐거움이 될 것이었다.
신약은 교회를, 지상 예루살렘에 대응하는 영적 예루살렘 즉 “위에 있는 예루살렘”(갈 4:26)으로 본다. 이 예루살렘의 시민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 3:20). 그들은 “성령을 따라”났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해방시킨 자유를 만끽하는 “약속의 자녀들”이다(갈 4:28, 29, 5:1). 이 도시의 시민들은 더 이상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애써 시도하는 예속 상태에 있지 않다(갈 4:22, 26, 31, 5:4). 그들은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소망”을 열렬히 기다린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에게 시민권을 주는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임을 깨닫는다(갈 5:5, 6).
이 영광스러운 무리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히 12:22, 23)이다.
5. 한 가족으로서의 교회. 하늘과 땅에 있는 교회는 한가족으로 간주되었다(엡 3:15). 어떻게 백성들이 이 가족에 참여하게 되는지를 기술하기 위해 두 가지 은유가 사용되었다. 양자됨(롬 8:14-16; 엡 1:4-6)과 중생(요 3:8)이 그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새로 침례받은 사람들은 더 이상 종들이 아니요 하늘 아버지의 자녀들이다(갈 3:26, 27). 그들은 새 언약의 기초 위에서 살아간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권속”(엡 2:19), “믿음의 가정들”(갈 6:10)에 속한다.
그의 가족의 식구들은 하나님을- “아버지”(갈 4:6)로 부르고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대한다(약 2:15; 고전 8:11; 롬 16:1). 많은 사람을 교회 가족으로 인도했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을 그들의 영적 아버지로 본다. 그는 “나는 복음을 통하여 그대들의 아버지가 되었다”(고전 4:15, NIV)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교회 안으로 이끌어들인 사람들을 “내 사랑하는 자녀”(고전 4:14; 엡 5:1 참조)라고 부른다.
가족으로서의 교회의 한 특별한 특징은 교제이다. 그리스도인 교제(헬라어로 코이노니아, koinonia)는 단순히 사교적 회합이 아니라 “복음에서… 교제함”(빌 1:5)이다. 그것은 신자들뿐 아니라(요일 1:3, 7)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과의 진정한 교제도 포함한다(요일 1:3; 고전 1:9; 고후 13:14).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은 가족의 일원이 되는 어떤 사람과도 “교제의 악수”(갈 2:9)를 나눈다.
가족의 은유는 “백성들이 사랑받고 존경받고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곳, 그들이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재능들이 증진되고 백성들이 성장하고 각인의 기대가 충족되는 곳”*인 돌보는 교회상을 계시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책임, 영적 부모에 대한 존경심, 영적 형제 자매들을 돌보고 지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은 각 신자 상호간의 결속을 강화시키는 충성심을 일으키는 사랑을 서로를 향하여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 가족의 일원이라는 신분은 본성과 기질이 서로 크게 다른 개인들이 서로 즐거움을 나누고 서로를 붙들어 줄 수 있게 해준다. 교회 가족의 식구들은 그들의 개성을 잃지 않고 연합하여 사는 법을 배운다.
6. 진리의 기둥과 기초로서의 교회.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기초”(딤전 3:15, NIV)이다. 그것은 진리를 원수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진리의 보고이며 성채이다. 그러나 진리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이다. 신자들이 새 빛-새 교리, 혹은 성서에 대한 신(新) 해석-을 가졌다고 주장할 때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표준으로 새 가르침을 시험해야 한다(사 8:20). 새 빛이 이 표준에 맞으면, 교회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맞지 않으면 배척해야 한다. 모든 신자들은 이 성서에 기초된 판단에 굴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사가 많으면 평안을 누리”(잠 11:14)기 때문이다.
진리를 전파함을 통하여 즉, 진리를 증거함을 통하여 교회는 “세상의 빛”과 “숨기우지 못할” “산 위에 있는 동리”와 “세상의 소금”(마 5:13-15)이 된다.
7. 싸우는 군대 그리고 승리를 거둔 군대로서의 교회. 지상의 교회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군대와 같다. 교회는 영적 어둠에 맞서 싸우도록 부름을 받았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악한 날에…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해야 한다(엡 6:13).
여러 세기를 통하여 교회는 안팎의 적들과 맞서 싸워야만 하였다(행 20:29, 30; 딤전 4:1). 교회는 괄목할 만한 진보를 이룩하고 승리를 쟁취하였지만 아직 완전히 승리한 교회는 아니다. 불행히도 교회는 여전히 큰 결함들을 지니고 있다. 예수님은 다른 은유를 사용하셔서 교회내의 불완전함들을 설명하셨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마 13:24, 25). 종들이 가라지를 뽑기를 원했을 때 그 농부는 너희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마 13:29, 30)고 말했다.
곡식과 가라지가 둘 다 밭에서 무성하게 자랐다. 하나님께서 회심한 자들을 교회로 이끄시는 동안 사단은 회개치 않은 자들을 들어보낸다. 이 두 그룹은 전체 집단에 영향을 미친다. 한 부류는 정결케 만들기 위해서, 다른 부류는 타락시키기 위하여 활동한다. 교회 내에서 그들 사이의 투쟁은 추수 때까지, 즉 재림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교회의 외부적 전투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환란과 투쟁이 앞에 놓여 있다. 사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교회에 대하여 분노를 발하며(계 12:12, 17),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란”을 교회에 쏟아부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신실한 백성들을 위하여 개입하실 것이며 그들 즉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단 12:1)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고 우리에게 보증하신다.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승리를 거둔 교회가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 때에 그분께서는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엡 5:27)는, 당신의 피로 사신바 된 각 시대의 충성된 자들인 영광스러운 교회를 맞아들이실 수 있게 될 것이다.

가시적(유형적) 교회와 비가시적(무형적) 교회. “가시적”이란 용어와 “비가시적”이라는 용어는 지상에 있는 교회의 두 국면을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되어 왔다. 우리가 앞서 논의했던 은유들은 특별히 가시적 교회에 적용된다.
1. 가시적 교회. 가시적 교회는 봉사를 위하여 조직된 하나님의 교회이다. 그것은 세상에 복음을 전달하라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분부를 성취시키고(마 28:18-20) 그분의 영광스러운 재강림을 맞이할 수 있도록 당신의 백성을 준비시킨다(살전 5:23; 엡 5:27).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증인으로서 세상을 비추고 그분께서 하신 것처럼 봉사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눈먼 자의 시력을 회복시키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한다(눅 4:18, 19).
2. 비가시적 교회. 세계적 교회라고도 불리우는 비가시적 교회는 전 세계에 산재한 하나님의 모든 백성으로 구성된다. 거기에는 가시적 교회 내에 있는 신자들, 그리고 교회 조직에는 속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주신 모든 빛을 따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포함된다(요 1:9). 이 후자의 그룹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배울 기회가 전혀 없었지만 성령의 호소에 반응하고 “본성으로(하나님의)율법의 일을 행”(롬 2:14)하는 사람들을 포함한다.
비가시적 교회의 존재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본질적으로 영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고 말씀하셨다. 참된 예배의 영적인 본질 때문에 인간은 누가 하나님의 교회의 한 부분인지 아닌지 정확하게 알아낼 수 없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비가시적 교회에서 당신의 가시적 교회와 연합하도록 이끄신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 10:16).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과 교제를 충만히 경험할 수 있는 곳은 가시적 교회 내에서 뿐이다. 그 이유는 그분께서 그 신자들을 집합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유익케 하는 영적 은사들을 가시적 교회에 주셨기 때문이다(엡 4:4-6). 바울이 회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당신의 가시적 교회와 접촉하게 하시고 그 다음에 당신의 교회의 사명을 주도해 나가도록 그를 임명하셨다(행 9:10-22). 그와 똑같이 오늘날도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충성과 예수 믿음을 가진 것으로 특색을 이룬 당신의 가시적 교회로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해 들이고자 하신다. 그리하여 그들이 지상에서 당신의 사명을 마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신다(계 14:12, 18:4; 마 24:14; 본서 12장 참조).
비가시적 교회의 개념은 또한 하늘과 땅의 연합된 교회(엡 1:22, 23)와 박해의 시대동안 숨어 있었던 교회(계 12:6, 14)를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교회의 조직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는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신자들을 보양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새 신자들은 믿음 안에서 세움을 입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들을 사명성취에 사용하도록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만사가 “적당하게” 그리고 “질서대로” 행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고전 14:33, 40) 교회는 단순하면서도 효율적인 조직을 갖추어야만 한다.

조직의 본질. 교인의 자격과 교회의 조직을 생각해 보자.
1. 교인의 자격. 소정의 자격요건을 충족시켰을 때, 개심자는 새언약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교인이 되는 것은 타인과 국가와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관계를 받아들이는 일을 포함한다.
1) 교인의 자격 요건.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침례를 받아야 한다(행 2:36-41, 4:10-12 참조). 그들은 중생을 경험하고 그분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준수하도록 가르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아들여야 한다(마 28:20을 보라).
2) 평등과 봉사. “너희는 다 형제니라”와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 23:8, 11)는 그리스도의 선언에 일치되게 신자들은 평등의 기초 위에서 서로를 대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른다는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돌보면서 그들을 크신 주님께로 이끄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도 인식해야한다.
3) 모든 신도들의 제사장 직분. 하늘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봉사로 레위족 제사장 직분의 효력은 끝났다. 이제 교회가 “거룩한 제사장”(벧전 2:5)이 되었다. 베드로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고 말했다.
이 새 반차(order) 즉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 직분은 몸된 교회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도지지 않고 자기가 선택하는 대로 행동하고 믿고 가르칠 권한을 각 개인에게 위임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교회의 각 신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에게 봉사할 책임이 있으며 어떤 인간의 중재 없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교통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교회 신자들의 독립성뿐만 아니라 상호 의존성도 강조한다. 이 제사장 직분은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어떤 질적인 구별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두 사이에 기능상의 차이가 있음은 인정한다.
4) 하나님과 국가에 대한 충성. 성경은 정부의 설립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관여하고 계심을 인정하며 정부 당국을 존중하고 순종하도록 당부하고 있다. 행정권을 관장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한다(롬 13:4, 7).
국가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있어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원칙의 지도를 받고
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 그러나 국가가 하나님의 명령과 상충될 때 그들은 최고의 충성을 하나님께 드린다.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고 말했다.
2. 교회 조직의 주요 기능. 교회는 온 세상을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으로 채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조직되었다. 가시적 교회만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많은 기능들을 제공해 줄 수 있다.
1) 예배와 권면. 인류 역사를 통하여 계속교회는 안식일에 창조주를 경배하도록 신자들을 모으는 하나님의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도들은 이 예배 관습을 따랐으며, 성경은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 하자”(히 10:25, 3:13 참조)고 권고한다. 공중 예배는 경배자들에게 새로운 생기와 격려와 기쁨을 가져다준다.
2) 그리스도인 교제. 교회를 통하여 신자들의 가장 깊은 교제에 대한 욕구가 온전히 충족된다. “복음(안)에서… 교제”(빌 1:5)는 모든 다른 관계를 초월하는 데 이는 그것이 같은 신앙을 가진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요일 1:3, 6, 7).
3) 성경 말씀을 가르침. 그리스도는 “천국열쇠”(마 16:19)를 교회에 주셨다. 이 열쇠는 그리스도의 말씀 즉 모든 성경 말씀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 열쇠에는 어떻게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에 관한 “지식의 열쇠”(눅 11:52)도 들어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에게 영이요 생명이다(요 6:63). 그 말씀은 영생을 가져다준다(요 6:68).*
교회가 성경의 진리들을 선포할 때 이 구원의 열쇠들은 묶고, 풀고, 하늘을 여닫을 권세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백성들이 가납을 받거나 배척되는, 구원을 받거나 잃어버림을 당하는 기준을 선포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교회의 복음 선포는 “생명의 향기” 혹은 “사망의 냄새”를 발산시킨다(고후 2:16, NIV).
예수님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마 4:4) 사는 것의 중요성을 아셨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교회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마 28:20)도록 모든 족속을 가르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성취할 수 있다.
4) 거룩한 예식들을 거행함. 교회는 교회에 입교하는 의식인 침례(본서 14장 참조)와 세족 예식과 성만찬 예식을 거행하는 하나님의 기구이다(본서 15장 참조).
5) 전 세계적인 복음의 선포. 교회는 이스라엘이 실패한 그 사업을 성취하기 위한 선교 봉사를 위하여 조직되었다. 주님의 봉사에서 나타났듯이, 교회가 세상에 제공하는 최대의 봉사는 성령의 침례로 말미암아 능력 을 받고 “모든 민족에게”(마 24:14) 복음을 증거하는 일의 완수에 헌신하는 데 있다.
이 사명에는 교회 자체(고전 1:7, 8; 벧후 3:14; 계 3:14-22, 14:5)와 교회 밖의 인류 모두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해 준비하라는 기별의 선포가 포함된다(계 14:6-12, 18:4).

교회의 통치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교회의 지도권은 사도들의 수중에 있었다. 다른 신자들과 협의 하에 그들이 행한 조직에 관한 첫 조치는 유다의 자리를 차지할 다른 사도를 선출하는 것이었다(행 1:15-26).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하는 일과 아울러 교회의 현세적 사무들을 함께 돌보는 일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교회의 실무적 사무들을 교회가 임명한 일곱 명의 집사에게 넘겼다. 교회가 “말씀의 봉사”(난외주)와 “재정 출납”(난외주) 혹은 공궤를 구별했지만(행 6:1-4), 교회의 사명을 이행하는 데 있어서 평신도와 성직자를 분리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사실상 일곱명 중 두 명 즉 스데반과 빌립은 매우 효율적인 설교자와 복음 전도자로 알려졌다(행 8장과 9장).
교회가 아시아와 유럽으로 팽창되어 조직에 있어서 부가적인 조치들을 취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수많은 교회들의 설립과 더불어 안정된지도 체계를 확립하기 위하여 “각 교회”에 장로들이 임명되었다(행 14:23).
교회에 한 큰 위기가 닥쳐왔을 때 거기에 관련된 당사자들은 전체 교회를 대표하는 사도들과 장로들로 구성된 총회에서 각자의 의견을 개진하도록 허용되었다. 이 총회의 결정은 모든 당사자들에게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여졌다(행 15:1-29). 이 사건은, 전체 교회에 영향을 미치는 논쟁의 문제일 경우 그 지역 교회의 의견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수준의 권고와 권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예시한다. 이 경우에, 총회의 결정은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의 대표들이 도출해 낸 합의에서 나왔다(행 15:22, 25).
신약은 필요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업의 지도자를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의 지도와 교회와의 협의 하에, 그들은 교회의 지도 체제를 구성했다. 오늘날도 그것을 따른다면, 배도에서 교회를 지켜주고 위대한 사명 완수를 가능케 할 것이다.

교회 통치의 성서적 원칙들
1.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심은 그분의 중보 사업에 주로 기초되어 있다. 십자가에서 사단에게 승리를 거두신 이래 그리스도에게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주어진 바 되었다(마 28:18).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엡 1:22; 빌 2:10, 11 참조)다. 그러므로 그 분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계 17:14)이시다.
그리스도는 교회가 그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엡 1:23; 골 1:18). 신자들은 “그 몸의 지체”(엡 5:30)이다. 그들은 그분과 밀접한 연결을 유지해야 하는바 이는 그분으로부터 교회가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골 2:19)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는 교회의 모든 권위의 근원이시다. 그리스도는 1) 그리스도 교회를 설립하시는데 있어서(마 16:18), 2) 교회가 시행해야 할 예식들을 제정하는 데 있어서(마 26:26-30, 28:19, 20; 고전 11:23-29; 요 13:1-17), 3) 당신의 이름으로 행사할 신성한 권위를 교회에 부여하시는 데 있어서(마 16:19, 18:15-18; 요 20:21-23), 4) 당신의 권위 아래서 당신의 교회를 지도하실 성령을 보내시는 데 있어서(요 15:26, 16:13-15), 5) 교회 내에 특별한 은사들을 지정하여 개인들이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목자)와 교사의 역할을 담당하여 모든 사람들이 신앙 안에서 연합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충만”을 반영할 때까지 봉사를 위하여 신도들을 준비시키고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도록 하는 데 있어서 당신의 권위를 행사하신다(엡 4:7-13).
3. 성경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지닌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교회를 지도하시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유일의 표준으로 삼고 그 표준에 의하여 활동한다. 교회의 모든 신자들은 그 말씀을 순종해야 하는 바 그것은 절대적 의미에서 법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전통, 관행, 문화적 관습은 성경의 권위에 종속된다(딤후 3:15-17).
4. 그리스도의 권위와 교회의 직책들. 그리스도는 당신의 교회와, 교회에서 특별히 임명된 종들을 통하여 당신의 권위를 행사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당신의 권능을 결코 이양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와 당신의 말씀을 떠나서는 아무도 독립적인 권위를 행사하지 못한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회중들은 교회의 직원들을 선출한다. 그러나, 이러한 직원들이 백성의 대표로서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들의 권위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그들의 선출은 그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부르심을 단순히 확증해 주는 것에 불과하다. 선출된 직원들의 주요 임무는 예배, 교리, 규율, 그리고 복음 선포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이 지켜지고 있는지 감독하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까닭에, 그들은 그들의 결정과 행위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조언을 구해야 한다.

신약 교회의 직원들. 신약은 교회의 두 직책 즉, 장로와 집사의 직분에 대해 언급한다. 이 직분의 중요성은 그 직임을 담당할 자들에게 요구되는 높은 도덕적·영적 자질에 의해 강조되었다. 교회는 안수식을 통해 지도자로의 부르심의 신성성을 인정하였다(행 6:6, 13:2, 3, 딤전 4:14, 5:22).
1. 장로
1) 장로는 무엇하는 사람인가? “장로들”(헬라어로 프레스부테로스, presbuteros) 혹은 “감독들”(에피스코포스, episkopos)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임원들이다. 장로라는 용어는 “연장자”를 뜻하는데, 위엄과 존경을 암시하고 있다. 그의 위치는 회당을 감독했던 사들이 차지했던 위치와 유사하다. “감독”이라는 용어는 그 말대로 “감독하는 자”를 의미한다. 바울은 이 용어를 서로 혼용했으며 장로를 감독자 혹은 감독과 동일시하였다(행 20:17, 28; 딛 1:5, 7).
이 직책을 맡았던 사람들은 새로 조직된 교회들을 감독하였다. 장로가 그 직책의 지위 혹은 신분을 언급한 반면 감독은 그 직분의 임무 또는 책임, 즉 “감독하는 자”*를 의미했다. 사도들이 자신들을 또한 장로로 호칭했던 까닭에(벧전 5:1; 요이 1, 요삼 1), 지방 교회 장로들과 순회 장로들 혹은 전체를 관할하는 장로들이 있었음이 명백하다. 그러나 두 종류의 장로는 모두 회중의 목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2)자격. 장로의 직임을 맡을 자격을 갖추려면 그 사람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여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하는 자라야 할지며(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받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딤전 3:2-7; 딛 1:5-9 참조).
그러므로 그 직분에 임명되기 전에 후보자들은 자신의 가정에서 그의 지도자적 능력을 반드시 입증했어야 한다. “직분에 추천된 그 사람의 가족도 고려에 넣어야 한다. 그들이 복종하는가? 그 사랑이 자신의 가정을 훌륭하게 다스릴 수 있는가? 그의 자녀들은 어떤 품성을 가지고 있는가? 그들이 아버지의 말씀에 경의를 표하는가? 그가 자신의 가족을 다스리면서 집안에서 재치와 지혜를 전혀 나타내지 못하거나 경건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그와 꼭 같은 거룩치 못한 경영을 하게 될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후보자가 기혼자라면 그는 “하나님의 집안”(딤전 3:15, NIV)의 지도자로서의 더 큰 책임을 위임받기 전에 가정에서 지도력을 입증해야 한다.
직분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바울은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딤전 5:22)라고 명하였다.
3) 장로의 책임과 권위. 장로는 으뜸가는, 수위(首位)를 차지하는 영적 지도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치”(목양하)도록(행 20:28) 선택된다. 피의 책임에는 연약한 신자들을 붙들어주고(행 20:35), 분열을 야기시킬 어떤 가르침에 대해서도 경계 태세를 갖추는 것 등이 포함된다(행 20:29-31). 장로들은 그리스도인 생활 방식을 실천하는 일에 모본을 보여야 하며(히 13:7; 벧전 5:3) 관대함의 좋은 모범을 보여야 한다(행 20:35).
4) 장로들에 대하여 취하여야 할 태도. 효율적인 교회 지도력은 교인들의 충성심에 크게 좌우된다. 바울은 신자들에게 그들의 지도자를 존경하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살전 5:13)라고 권하였다. 그는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 5:17)고 말했다.
성경은 교회의 지도자를 존경할 필요성을 명백히 한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히 13:17; 벧전 5:5 참조).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책임들을 지도자들이 수행하는 것을 신자들이 어렵게 만들 때, 둘 다 슬픔을 겪을 것이며 하나님의 사업의 번영하는 기쁨을 상실할 것이다.
신자들은 지도자들의 그리스도를 닮은 생활 방식을 관찰하도록 권고를 받고 있다. “그들의 생활 방식의 결과들을 깊이 생각하고 그들의 신앙을 모방하라”(히 13:7, NIV). 그들은 험담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바울은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밟지 말”(딤전 5:19)라고 경고했다.
2. 남집사와 여집사. 집사(deacon)라는 이름은 “종” 혹은 “돕는 자”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 디아코노스(diakonos)로부터 왔다. 집사의 직분은 사도들이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행 6:4)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제정되었다. 집사들은 교회의 현세적인 일들을 돌보아야 할 것이었지만, 그들은 또한 복음 전도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었다(행 6:8, 8:5-13, 26-40).
같은 용어의 여성형이 로마서 16장 1절에 나타난다.* 번역자들은 이 단어를 “종”(KJV, NIV)이나 “여집사”(RSV) 중 어느 하나로 번역하였다. “그 단어와 이 본문에서의 그 용례는 여집사 직분이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했을 당시 이미 교회 안에 확립되었을 가능성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장로와 마찬가지로 집사들도 도덕적, 영적 자격을 기초로 하여 교회가 선출한다(딤전 3:8-13).

교회의 규율. 그리스도는 교회에 그 신자들을 징계할 수 있는 권위를 주셨으며 그렇게 하는데 필요되는 적절한 원칙들을 마련해 주셨다. 그분은 교회가 “거룩한 제사장 직분”과 “거룩한 나라”가 되는 그 높은 부르심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시 언제든지 이 원칙들을 사용할 것을 기대하신다(마 18:15-18; 벧전 2:5, 9 참조). 그러나 교회는 또한 잘못하는 신도들이 그들의 노선을 고쳐야 할 필요성을 깊이 깨닫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시는 이유는 그 교회가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계 2:2)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이단과 부도덕을 용납한 것에 대해 버가모와 두아디라 교회를 책망하셨다(계 2:14, 15, 20). 징계에 관한 다음의 성경적 권고를 주목해 보라.
1. 사적인 죄를 다룸. 한 신자가 다른 신자에게 죄를 지었을 경우(마 18:15-17) 그리스도는 피해를 본 사람이 곁길로 간 양이 된 가해자에게 접근하여 그의 행위를 고치도록 설득하라고 권고하신다. 이러한 시도가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경우 편견이 없는 한 두 증인을 대동하고 두번째 설득을 시도해야 한다. 이러한 시도도 실패로 돌아갈 경우, 그 문제는 전 교회앞에 내어놓아야 한다.
잘못하는 신자가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혜와 권위를 배척한다면, 그는 교회의 교제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키는 것이다. 죄를 범한 바람을 출교시키는 데 있어서 교회는 다만 그 사람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뿐이다. 만일 성령의 지도아래서 교회가 성서적 권고를 세심하게 따랐다면, 그 결정은 하늘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고 말씀하셨다.
2. 공적인 범죄를 취급함.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롬 3:23)였지만 교회에 치욕을 가져오는 극악하고 반역적인 범죄들은 그 범죄자를 출교시킴으로 즉각 처리되어야 한다.
출교 조치는,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누룩과 같이 작용했을 악을 제거하여 교회의 순결을 회복시키고, 범죄자에게 되돌이키게 하는 치료제로서의 역할을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성적 부도덕의 사례를 알고 난 후 즉각적인 조치를 촉구했다. 그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고전 5:4, 5, 7)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신자라고 부르면서도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하”(고전 5:11)는 사람과는 어느 누구와도 교제하지 말라고 말했다. “이 악한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고전 5:13).
3.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을 취급함.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롬 16:17) 신자, 성서적 권고에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규모 없이 행하”는 신자는 “저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도록 그런 사람과의 교제를 피하여야 한다. 바울은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고 말했다(살후 3:6, 14, 15),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이 교회의 “두번째 훈계”에 귀를 기울이기를 거절한다면, 그 사람을 멀리해야한다. “이러한 사람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져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딛 3:10, 11).
4. 범죄자의 회복. 교인들은 출교된 자를 멸시하거나 피하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이 회개와 중생을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출교당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회개한 충분한 증거를 보일 때 재입교할 수 있다(고후 2:6-10). 하나님의 권세, 영광, 그리고 은혜가 나타나게 되는 것은 특히 죄인들을 교회로 회복시킴을 통해서이다. 하나님은 죄에 사로잡힌 자들을 해방시켜 흑암의 왕국에서 빛의 왕국으로 옮기시기를 갈망하신다. 우주의 “구경거리”인 하나님의 교회는 남녀들의 생애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의 능력을 나타내 보인다. 오늘, 그리스도는 당신의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가족의 일원이 되도록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신다. 그분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고 말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