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0일 화요일 장년 교과] 겟세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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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고난의 잔을 거두어 주기를 기도했으나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셨다. 겟세마네의 여정이 분리를 상징하듯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기도하지 못했다.

마가복음 14:32~42을 읽어 보라.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 기도하셨고, 그 기도는 어떻게 응답받았는가?

예수님과 제자들은 유월절 식사를 했던 예루살렘성을 떠나 기드론 계곡을 건너 감람산 기슭에 있는 동산으로 향한다. 겟세마네라는 이름은 기름 짜는 틀이라는 뜻으로 근처에 올리브유를 가공하는 압착기가 있었으리라 짐작하게 한다. 서기 70년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할 때 감람산의 모든 나무를 베어버렸기 때문에 이전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는 없다.
예수님은 동산에 들어가시면서 제자들을 그곳에 남겨두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좀 더 들어가신다. 그러다가 이 세 사람도 남겨두고 예수님 혼자서 더 멀리 가신다. 이러한 공간의 분리는 예수께서 다가오는 고난을 마주하면서 점점 더 혼자가 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예수님은 고난의 잔을 제거해 주시기를 구하지만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신다(막 14:36). 예수님은 아람어 아바(Abba)를 사용하셨는데, 마가는 이를 “아버지”로 번역했다. 이 용어는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아빠”를 의미하지 않는다. 자녀가 아버지를 부르는 데 사용한 용어는 아비(abi)였다(레이몬드 브라운, Raymond E. Brown, The Death of the Messiah, Anchor Bible Reference Library, 뉴욕, 1권, 172). 그래도 아바, “아버지”라는 용어의 사용은 가까운 가족의 유대관계를 의미하므로 이것을 축소시켜서는 안된다.
예수께서 고난의 잔을 거두어 주시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신다(마 6:10과 비교). 수난 이야기의 이후 부분에서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아니오’인 것이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세상에 구원이 주어질 것이기에 고난의 잔을 거두지 않으실 것이다.
고난의 때에 지지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된다.

(이어서) 빌립보서 4:13에서 바울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울이 바로 그 다음 절에 어떻게 말하였는지 주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나의 고난을 함께 나누었으니 잘하였도다”(흠정역)라고 기록한 것을 보라. 이것이 겟세마네에서 예수님께서 바라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위로를 바라며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오셨다. 세 번 내내 제자들은 잠자고 있었다. 결국에 그분은 제자들을 깨우시고 당신을 기다리는 시험을 대하러 함께 가자고 하셨다. 그분은 준비되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교훈> 그분은 고난의 잔을 거두어 주기를 기도했으나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셨다. 겟세마네의 여정이 분리를 상징하듯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기도하지 못했다.

<묵상>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적용> 예수께서 원하셨지만 드리지 못한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지금 그 도움을 누구에게 주기 원하시겠습니까? 그대의 손을 펴기 위해 기도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인류 구원을 결정하는 순간 – “예수께서는 범죄자로 하여금 그의 죄의 형벌을 받게 하라,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으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멸시와 고통의 쓴 잔을 마실 것인가? 무죄한 그분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죄의 저주의 결과를 맛볼 것인가? 예수님의 창백한 입술에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씀이 흘러나왔다”(시대의 소망, 690).

<기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던 주님처럼 저희도 기도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비록 세상이 그 기도를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과 깊이 교통하셨던 예수님처럼 오직 주님 뜻을 따르고 더욱 기도하며 주신 길 충성되게 가도록 은혜를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