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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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성경 속에 당신의 창조 활동에 관한 권위있는 설명을 계시하셨다. 엿새 동안 주님은 “하늘과 땅”, 그리고 지상의 모든 생물을 만드셨으며 그 첫 주일의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이렇게 그분은 당신께서 창조 사업을 마친 것에 대한 영구적인 기념물로 안식일을 제정하셨다. 첫 남자와 여자는 창조의 극치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세상을 다스리고 그것들을 보호할 책임을 가지게 되었다. 세상이 다 창조되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었으며 “심히 좋았”다. -기본 신조, 6.

성경의 설명은 간단하다.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따라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것”(출 20:71)이 즉시 나타났다. 단 엿새 동안에 “혼돈하고 공허”한 지구가 완전히 성숙한 동물들과 식물류로 가득 찬 곳이 되었다. 우리 유성은 청순하고 밝은 색깔과 형태와 향기로 단장을 했으며, 또한 화려한 모습과 심히 정교한 기능이 조화를 이루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일을 마치신 후 경축하시기 위하여, 즐기시기 위하여 “안식하셨다.” 이 엿새동안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은 그분께서 완성하셨기 때문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었다. 태초에 있었던 사건에 대한 성경의 설명을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은 물과 흑암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첫째날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을 격리시키시고 빛을 “낮”이요 어두움을 “밤”이라 부르셨다.
둘째 날 하나님 은 “물과 물로 나뉘게” 하셨다. 땅 위의 물과 대기권을 분리하심으로 생명체가 거할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하셨다. 셋째날 하나님은 물들을 한 곳으로 모으심으로 육지와 바다를 조성하셨다. 그 다음에 하나님은 벌거숭이 해안, 언덕, 계곡을 옷 입히셨다. 땅에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맺는 나무를 내”(창 1:12)셨다.
넷째날 하나님은 해, 달, 별들을 만드셔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게 하셨다. 태양은 낮을 주관하고, 달은 밤을 주관하게 하셨다(창 1:14-16).
다섯째날 하나님은 조류와 수중 생물을 창조하셨다. 그분은 “그 종류대로”(창 1:21) 그것들을 창조하셨다. 이것은, 그분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이 일관성 있게 자기 종류를 번식시킨다는 것을 가리킨다.
여섯째날 하나님은 고등동물들을 만드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하시고”(창 1:24).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극치로서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창 1:27)셨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보셨는데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하셨다.

창조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라고 기록하였다. 어떻게 이 창조력이 있는 말씀이 작용하였는가?

창조력이 있는 말씀과 선재하는 물질. 창세기는 창조 주일 엿새 동안의 장엄한 사건들을 유발하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명령, 즉 “하나님이 가라사대”를 도입하고 있다(창 1:3, 6, 9, 11, 14, 20, 24). “혼돈하고 공허”한 유성을 낙원으로 변화시킨 창조적 에너지로 충전된 각각의 명령이 발해졌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9). 진실로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히 11:3)졌다.
이 창조력이 있는 말씀은 선재하는 물질(exnihilo)에 의존한 것이 아니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비록 때때로 하나님은 선재하는 물질을 사용하셨지만-아담과 짐승들은 흙으로 형성되었고, 하와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창 2:7, 19, 22)-근본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물질을 창조하셨다.

창조 이야기
창조에 관한 창세기의 설명에 관하여 수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성경 첫 책에 있는 두 개의 창조 이야기는 서로 상충되는가, 혹은 일치되는가? 창조의 하루는 문자 그대로인가, 혹은 엄청난 시간적 기간들을 대표하는 것인가? 하늘-해, 달, 그리고 별까지도-은 정말 겨우 6,000년 전에 만들어졌는가?

창조에 관한 설명. 창조에 관한 한 성경의 두 기사, 곧 창세기 1장 1-2장 3절과 창세기 2장 4-25절의 말씀은 조화된다.
첫째 이야기는 만물의 창조를 그 이루어진 순서대로 설명하고 있다.
둘째 이야기는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는 말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창세기에서 가족의 역사를 도입할 때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다(창 5:1, 6:9, 10:1; KJV에서는 ‘대략’이란 말이 generations로 ‘계보’, ‘사적(事蹟)’, ‘후예’ 등의 단어에 사용되고 있다. -역자주). 이 이야기는 창조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엄격하게 시간적 순서를 지키고 있지 않으나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하고 있음을 계시한다.* 이것은 첫번째 것보다도 더욱 상세하게 아담과 하와의 창조, 그리고 에덴동산에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환경 등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덧붙여서, 이것은 인간의 본질과 하나님의 통치에 관해 알려준다. 이 두 개의 창조설명을 문자적이며 역사적인 것으로 수용할 때에만 성경의 다른 부분과 이것들은 조화를 이루게 된다.

창조의 날들. 성경의 창조 기사에 나오는 날들은 문자적인 24시간의 기간을 의미한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시간을 측량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창 1:5, 8, 13, 19, 23, 31)라는 표현은 저녁, 혹은 일몰로부터 시작되는 개별적인 날들을 의미한다(레 23:32; 신 16:6 참조). 이 표현이 레위기에서는 문자 그대로의 하루를 의미하고 창세기에서는 수천, 수백만 년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정당성이 없다.
창세기 1장에서 ‘날’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욤(yom)이다. 욤이 한정된 숫자와 함께 나올 때 이것은 언제나 문자적인 24시간 하루를 의미한다(창 7:11; 출 16:1의 예들을 참조하라). 이것은 창조 이야기의 날들이 문자 그대로의 24시간 하루들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십계명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의 날들이 문자적인 날을 의미한다는 또 다른 증거를 제시한다. 넷째 계명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하나님은 창조 이야기를 간결하게 재언급하신다. 각 날(욤)은 창조적 활동으로 채워졌으며, 그 다음에 안식일을 통하여 창조 주일은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24시간 안식일은 문자 그대로의 창조 주일을 경축하는 것이다. 만일 각 날이 영겁을 의미한다면, 넷째 계명은 무의미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다는 베드로후서 3장 8절의 말씀을 인용함으로 창조의 하루가 문자적인 24시간 하루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자들은, 동일한 구절이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로 끝나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의 날들을 수천 년, 혹은 수백만, 수억 년의 막연한 기간으로 읽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을 의심하는 자이다. 뱀은 하와가 바로 이렇게 행하도록 유혹했던 것이다.

“하늘들”은 무엇인가? 어떤 이들은 하나님 이”천지(하늘들과 땅, the heavens and the earth)를 창조하시니라”(창 1:1, 2:1: 출 20:11 참조)는 구절과 그분께서 6,000년 전의 창조주일 넷째 날에 해, 달, 별들을 만드셨다는 말씀을 볼 때에(창 1:14-19) 당황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 때에 모든 천체가 존재케 된 것일까?
창조 주일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거하신 하늘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하늘들”은 아마 지구에 가장 근접해 있는 유성들과 별들을 언급할 것이다.
사실상 지구는 그리스도의 첫번째 창조물이라기보다는 그분의 가장 마지막 것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우주의 머나먼 어떤 장소에서 하나님과 회합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데(욥 1:6-12), 이들은 아마 타락하지 않은 모든 세계의 아담들일 것이다. 아직까지는 우주 탐사를 통해 인간이 거하는 어떤 유성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분명히 광대한 우주 속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 그들은 죄로 오염된 태양계로부터 죄에 감염되지 않을 만큼 멀리 격리된 곳에 있다.

창조의 하나님
우리의 창조주는 어떤 하나님이신가? 그토록 무한하신 분께서 당신의 우주 저 멀리 모퉁이에 존재해 있는 보잘것 없는 우리 인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말인가? 지구를 창조하신 후에 그분은 더욱 크고 나은 일들을 하러가지 않으셨는가?

돌보시는 하나님. 성경의 창조 설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에게로 옮겨온다. 그것은 천지를 창조할 때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완전한 환경을 준비하셨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남녀 인간은 그분의 영광스러운 걸작품이었다.
창조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세심한 분임을 알게 된다. 그분은 그들을 위하여 특별한 동산의 가정을 장만하시고 그들에게 그 곳을 경작하는 일을 맡기셨다. 그분은 인간들이 당신과 관계를 맺도록 창조하셨다. 이것은 강요되거나 부자연스러운 관계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었다. 그분은 선택의 자유와 당신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창조주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삼위 하나님께서 모두 다 창조에 관여하셨다(창 1:2, 26). 그러나 활동적인 행위자는 하나님의 아들, 선재하시는 그리스도이셨다. 창조 설명의 서언에서 모세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기록했다. 이 말을 회상하면서 요한은 창조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을 명확히 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이어서 요한은 동일한 장에서 자기가 기록하고 있는 분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예수님은 창조주, 땅을 말씀으로 존재케 하신 분이셨다(엡 3:9; 히 1:2 참조).

창조주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깊은가! 자애로운 관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아담을 향해 무릎을 꿇고 이 첫 인간의 손을 조성하실 때, 그분은 인간들이 어느날 그 손을 남용하고 결국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음이 분명하다. 어떤 의미로 창조와 십자가는 한데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주 그리스도는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이다(계 13:8). 그분의 선지성(先知性-foreknowledge)*이 그분을 중단시키지 않았다. 험악한 갈바리 구름 아래에서 그리스도는 이 창조적 행위로 인해 당신에게서 생명의 호흡이 거두어질 것을 아시면서 아담의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셨다. 결코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창조의 기초이다.

창조의 목적
사랑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의 원동력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요일 4:8). 그분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 당신의 사랑 때문에 그분은 당신만이 허락하실 수 있는 가장 큰 은사인 “존재”를 창조를 통해 나눠주셨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떤 목적을 위해 우주와 그 거민들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작품들을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 19:1-4).
하나님은 왜 이렇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가? 천연계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역할을 한다. 그분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작품들이 사람들을 그들의 창조주께로 향하게 하도록 의도하셨다. 바울은 말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20).
우리가 천연계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특성 곧 우리 자신의 생활 속에 반영시킬 수 있는 특성에 대해 더욱 많이 알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품성을 명상함으로 우리는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되며, 따라서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이루게 된다.

세상에 사람들이 거주하도록. 창조주께서는지구가 외롭고 공허한 유성이 되도록 의도하지 않으시고 이곳에 사람이 거하도록 하셨다(사 45:18). 첫 인간이 반려자의 필요를 느꼈을 때 하나님은 여자를 창조하셨다(창 2:20; 고전 11:9). 이렇게 해서 결혼 제도가 제정되었다(창 2:22-25). 그리고 창조주는 이 부부에게 새로 창조된 이 세계를 다스리도록 하셨을 뿐 아니라 “생육하고 번성하”(창 1:28)라는 말씀으로 그들에게 이 창조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셨다.

창조의 중요성
사람들은 창조 교리를 무시하라는 유혹을 받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지구를 어떻게 창조했는지 누가 안단 말인가? 우리가 알아야만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늘에 갈 수 있는가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한 창조 교리는 “그리스도인과 성서 신학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기초”*를 형성한다. 성경상의 수많은 근본적 개념들은 하나님에 의한 창조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어떻게 “천지”를 창조하셨는지를 아는 지식은 궁극적으로 계시자 요한이 말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 교리가 함축하고 있는 것들은 어떤 것인가?

우상 숭배에 대한 해독제. 하나님의 창조주신분은 그분을 여타의 모든 신들로부터 구별시킨다(대상 16:24-27; 시 96:5, 6; 사 40:18-26, 42:5-9, 44장).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경배해야지 우리가 만든 신들을 경배해서는 안 된다. 당신의 창조주 신분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전적인 충성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이러한 충성심을 교란하는 어떤 관계도 우상 숭배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창조주께 신실성을 지키는 일은 생사의 문제이다.

참된 경배의 기초.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배는, 그분께서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에 기초한다(시 95:6). 이 주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 지상 거민들을 향해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계 14:7)를 경배하라는 호소 속에 그 내용을 포함시킨 것을 보아 엿볼 수 있다.

안식일-창조의 기념물. 하나님은 제칠일을 안식일로 제정하심으로 매 주일마다 우리 자신이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셨다. 안식일은 은혜의 선물로서, 우리가 행한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말한다. 그분은 특별히 이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심으로, 인생은 일하는 것 외에도 창조주와 교제하는 일, 휴식을 취하는 것, 하나님의 놀라우신 창조 사역을 경축하는 일(창 2:2, 3)등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결코 잊지 아니하도록 하셨다.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창조주께서는 당신의 창조적 능력을 거룩하게 기념하는 날인 안식일을 창조의 영원한 표징과 상징으로서 기억하라는 명령을 도덕률의 중심에 위치시키셨다(출 20:8-11, 31:13-17; 겔 20:20; 본서 19장을 보라).

결혼-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도. 창조주일 중에 하나님은 거룩한 제도로서 결혼제도를 수립하셨다. 그분은 두 개인 간의 이 거룩한 연합이 결코 나뉘어질 수 없도록 의도하셨다. 남자는 “그 아내와 연합하여”야 했으며, 또한 그들은 “한 몸을 이룰” 것이었다(창 2:24; 막 10:9 참조; 본서 22장을 보라).

참된 인간 가치의 기초. 창조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진술한다. 이러한 이해를 통하여 개인의 참된 가치에 대한 개념이 형성된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결코 열등하게 평가하도록 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참으로 우리는 창조물 속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로서 끊임없이 창조주와 교통할 수 있는 특별한 혜택과, 점점 더 그분처럼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

참된 교제의 기초. 하나님의 창조주 신분은 그분의 부권(父權, fatherhood)을 확립하며(말 2:10), 모든 인류가 형제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시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다. 성과 인종과 교육과 지위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이 개념을 이해하고 적용하기만 한다면 인종주의, 독선, 기타 어떤 형태의 분리주의도 해소되고 말 것이다.

개인적인 청지기 직분.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다. 이 사실은 우리의 신체적·정신적·도덕적 기능들에 대하여 우리가 신실한 청지기로서의 신성한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창조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행동하는 것은 배은망덕의 전형(典型)이라 할 수 있다(본서 20장을 보라).

환경에 대한 의무. 창조 때에 하나님은 첫 남자와 여자를 동산에 두셨다(창 2:8). 그들은 땅을 갈고 모든 동물들을 다스려야 했다(창 1:28). 이와같이 우리는 우리의 환경을 보존해야 할 의무를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다.

육체 노동의 존엄성. 창조주께서는 아담에게 에덴 동산을 “다스리며 지키”(창 2:15)라는 요구를 주셨다. 완전한 세계에서 인간에게 이 유용한 일을 맡기신 것은 육체 노동의 존엄성을 드러낸다.

물질적인 우주의 가치. 창조의 각 과정에서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것을 “좋았더라”(창 1:10, 12, 17, 21, 25)고 하셨다. 그분은 당신께서 완성하신 창조물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선언하셨다. 이렇게 해서 창조된 물질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 아니라 선하다.

비관주의, 고독감, 허무주의에 대한 치료제. 창조 이야기는 만물은 우연한 진화 때문에 존재케 된 것이 아니라 목적이 있게 창조되었음을 말해 준다. 인간은 창조주 자신과 영원한 관계를 갖도록 의도되었다. 우리가 이유 있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때 인생은 의미있고 풍요롭게 된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표현하고 있는 고통스런 공허감과 불만족감은 사라지고 대신 하나님의 사랑이 자리잡게 된다.

하나님의 율법의 거룩성.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 타락 이전에 존재했다. 인간은 타락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율법에 복종해야 했다. 이것은 자기 파멸을 경계하고 자유의 한계를 드러내며(창 2:17), 하나님 왕국의 백성들의 행복과 평화를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창 3:22-24; 본서 18장을 보라).

생명의 신성성. 생명을 창조하신 분께서 인간의 생명을 생성하는 일에 계속해서 관여하신다. 이에 의해 생명은 신성한 것이 된다. 다윗은 자기의 출생에 그분께서 개입하신 것을 찬송하고 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내가 은밀한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 139:13-16). 이사야서에서 주님은 당신 자신을 “모태에서 너를 조성한 나 여호와”(사 44:24)라고 신분을 밝히신다.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 사실상 우리는 이것을 보존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업은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를 끝내셨는가? 창조 이야기는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창 2:1)는 진술로 끝을 맺고 있다. 신약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가 “세상을 창조할 때”(히 4:3) 완성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창조적인 힘이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창조적인 말씀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아직도 작용하고있다.
1. 그리스도와 그분의 창조력이 있는 말씀. 창조로부터 사천 년이 지난 후에 한 백부장은 그리스도에게 말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마 8:8). 창조시에 당신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러자 하인은 고침을 받았다. 예수님의 지상 봉사 기간동안 내내 아담의 생명없는 신체에 생명을 부여했던 동일한 창조력이 죽은 자를 일으켰으며, 또한 당신의 도움을 요청하는 고난 속에 빠진 이들에게 새 생명을 가져다 주었다.
2. 오늘날의 창조력이 있는 말씀. 이 세상이나 우주는 그 자체 내에 고유하게 있는 어떤 능력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것들을 보존하시고 유지하신다. 그분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예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시 147:8, 9, ; 욥 26:7-14 참조). 그분은 당신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다(골 1:17; 히 1:3 참조).
우리는 우리 신체의 각 세포가 작용하는 데서도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다. 매번의 호흡과 심장 박동, 눈 깜짝임 하나하나가 사랑이 깊으신 창조주의 돌보심을 말해준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고 있느니라”(행 17:28).
하나님의 창조력은 오로지 창조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속과 회복에도 관여하고 있다. 하나님은 심령을 재창조하신다(사 44:21-28; 시 51:10). 바울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엡 2:10)라고 말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 우주를 가로질러 수많은 은하계를 펼쳐 놓으신 하나님은 가장 크게 타락한 죄인을 당신의 형상으로 재창조하기 위하여 동일한 능력을 사용하신다.
이 구속하는 능력과 회복시키는 힘은 인간의 생애를 변화시키는 일을 위해서라면 제한을 받지 않는다. 원래 천지를 창조했던 동일한 능력이 최후의 심판 후에 그것들을 재창조할 것이다. 그것들은 새롭고 장엄한 창조물, 곧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만들어질 것이다(사 65:17-19; 계 21, 22).

창조와 구원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와 구원이 이루어진다. 그분은 장엄한 우주와 완전한 세계를 창조하셨다. 창조사업과 구원 사업을 놓고 서로 대조하고 비교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창조에 사용된 기간. 창조시에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셨다. 그러자 즉시 성취되었다. 엄청난 기간의 변태 현상 대신에 그분의 권능의 말씀이 창조를 이루어 냈다. 6일 동안에 그분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그런데 왜 6일이 걸렸을까? 단 한번의 말씀으로 순식간에 만물이 존재케 하실 수 없었는가?
아마도 그분은 우리 유성을 그 6일 동안에 들어내기를 기뻐하셨던 것 같다. 혹은 이 “연장된” 시간이 그분께서 각각의 피조물에 부여하신 가치와 관계가 있을 수 있으며, 또한 7일 주일이 그분께서 인간을 위하여 의도하신 활동과 휴식의 주기를 제시하는 모델이 되도록 하신 것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구원이 존재하도록 말씀하지 않으셨다. 백성들을 구원하는 과정은 수천년에 걸친 것이다. 그것은 옛 언약과 새 언약,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생활하신 33년 반의 세월, 그리고 곧 이어서 거의 2,000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하늘의 중보사업 기간을 포함하고 있다. 성경의 연대에 의하면 창조로부터 약 6,000년이 지났는데도 백성들은 아직도 에덴 동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창조와 재창조에 필요되는 시간을 대조해 볼 때, 하나님의 활동들은 언제나 인류의 최선의 유익을 위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조가 단시일에 이루어진 것은 그분께서 당신의 창조물을 즐길 수 있는 완전히 계발된 인간들이 나타나도록 하는 일에 얼마나 큰 열망을 가지고 계셨는지를 반영한다. 창조가 점진적인 발달 과정에 따라서 오랜 시대에 걸쳐 이루어지도록 내버려두어 창조의 완성을 지연시키셨다면 그것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성품과 반대되었을 것이다. 재창조에 허용된 시간의 양은 가능한 한 많은 백성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소망을 나타낸다(벧후 3:9).

그리스도의 창조 사업. 에덴에서 그리스도는 창조력이 있는 말씀을 하셨다. 베들레헴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요 1:14)셨다. 창조주께서 창조물이 되신 것이다. 얼마나 철저한 비하(卑下)인가! 비록 아무도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많은 사람은 맹인에게 시력을 주고(요 9:6, 7), 벙어리로 말하게 하고(마 9:32, 33), 나병 환자를 고치고(마 8:2, 3),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요 11:14-45)을 목격하였다.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 곧 인류의 새로운 시작으로 오셨다(롬 5장). 그분은 에덴 동산에서 인간에게 생명나무를 주셨다. 그런데 인간은 그분을 갈바리에서 나무 위에 매어 달았다. 낙원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늠름히 서 있었다. 그런데 갈바리에서는 한 인간 예수께서 축 늘어진 범죄자의 형상으로 매어 달리셨다. 창조의 금요일과 십자가의 금요일, 두 날 모두에 창조 사역이 완성되었음을 알리는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발해졌다(창 2:2; 요 19:30). 전자의 경우에는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이고, 후자는 인간으로서 이루신 것이다. 전자는 신속한 능력으로, 후자는 인간으로서의 고난 중에 이룩한 것이다. 전자는 단시일 동안이요, 후자는 영원토록이다. 전자는 타락에 굴복했고, 후자는 사단에 대하여 승리를 거둔 것이다.
처음으로 인간에게 생명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그 완전하고 거룩한 손이었다. 인간에게 영생을 주게 될 것은 찔림당하고 피에 물든 그리스도의 손이다. 인간은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재창조될 수 있다. 두 번의 창조 모두가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사업이다. 그 어느 것도 자연적인 진보에 의하여 내부의 힘으로 이룩된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의무를 지고 있다. 당신의 창조 사업의 극치로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재창조하시는 능력을 날마다 구함으로써 당신과의 교제에 들어오도록 우리 각 사람을 초청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분의 형상을 좀더 충만하게 반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