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3일 수요일 장년 교과] 하늘의 문 (이사야 13~14장)

123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신앙은 자신을 높여 하나님과 같은 지위에 이르고자 했던 바벨론의 정신 곧 사탄의 정신과 같다.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사 14:14).

이사야 14장에는 떨어진 아침의 아들 ‘계명성’(사 14:12, 루시퍼), 곧 사탄에 대한 조롱과 바벨론 왕에 대한 조롱이 뒤섞여 있다. 왜 그런가? 계 12:1~9을 보면 사탄으로 확인되는 용(9절)은 아기 예수(5절)가 태어나면 즉시 그를 삼키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자는 헤롯 왕이었다(마 2장 참고). 용은 헤롯으로 대표된 사탄과 로마 제국을 가리키는데, 이는 사탄이 인간 대리자들을 통해 일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탄은 바벨론 왕과 두로 왕의 배후 세력이었다.
어떻게 ‘바벨론’이 나중에 로마(벧전 5:13) 또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악한 세력을 가리키는가?(계 14:8, 16:19, 17:5, 18:2, 10, 21).
고대 바벨론처럼 로마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바벨론’은 교만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는 잔인한 세력이다. 특히 계 17:6에 보면 그들은 “증인들의 피에 취”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반역했는데 ‘바벨론’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런 개념을 암시한다. 바벨론어로 그 성의 이름은 ‘바빌리’인데, 이는 신의 영역으로 접근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신(들)의 문’이라는 뜻이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아 올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대한 어떤 책임도 면제받는 신의 수준에 오르려고 했다.
야곱은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를 꿈에서 본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7). ‘하나님의 집’이 곧 거룩한 영역으로 접근하는 길인 ‘하늘의 문’임을 주목하라. 야곱은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집’ 곧 ‘벧엘’이라 하였다. 벧엘에 있던 ‘하늘의 문’과 바벨론의 ‘신(들)의 문’은 거룩한 영역에 이르는 정반대의 길이다. 야곱의 사다리는 하늘에서 비롯되었으며, 위에 계신 하나님에 의해 나타났다. 그러나 바벨론의 탑들과 ‘지구라트’ 신전들은 인간에 의해 땅으로부터 지어져 올라갔다.

교훈 :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신앙은 자신을 높여 하나님과 같은 지위에 이르고자 했던 바벨론의 정신 곧 사탄의 정신과 같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 바벨론의 정신은 어떻게 성경이 가르치는 은혜의 종교와 정반대의 교훈을 가르칩니까?

(이어서)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행위로 대표되는 대조적인 구원의 경로를 상징한다. 모든 참된 종교는 겸손한 벧엘의 모델에 기초한다. 우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엡 2:8)다. 반면 율법주의와 세속적인 인본주의를 포함한 모든 거짓 종교는 교만한 바벨론의 모델에 기초한다.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이 둘의 대조적인 접근 방식을 보라(눅 18:9~14).

적용 : 그대는 오늘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어떻게 하늘과 소통하며 무엇을 하나님께 구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 – “사람이 하나님의 정부에 반역하기 전까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자유스러운 교통이 있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죄가 하늘과 땅을 분리시켰으므로 사람은 창조주와 교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소망 없는 상태로 홀로 버려지지 않았다. 그 사닥다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교통의 매개인 예수님을 나타낸다”(부조와 선지자, 184).

기도
아직도 제 속에서는 ‘나’를 높이려는 욕망이 꿈틀거립니다. 그러나 겸허히 자신을 낮추시고 피조물들을 위해 죽기까지 봉사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회개합니다. 제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부어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