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4일 일요일 장년 기도력]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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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은 거기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다 읽고 계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보인 슬픔의 표시가 겉치레에 불과함을 그분은 아셨습니다. 가식적인 슬픔을 나타내고 있는 그들 중에는 능한 이적을 행하시는 분뿐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까지 죽이려고 음모를 꾸밀 자들도 있음을 그분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슬픔을 가장한 그들의 허울을 벗겨 낼 수 있었지만 자신의 의분을 억누르셨습니다. 실상을 전부 들추어낼 수 있었지만 입을 다무신 이유는 자기를 진정으로 믿고 사랑하는 한 사람이 자기 발 앞에서 슬퍼하며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를 어디 두었느냐?”라고 예수님이 물었습니다. “주여 와서 보옵소서.”라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함께 무덤으로 다가갔습니다. 애절한 장면이었습니다. 나사로는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의 누이들은 찢어지는 심정으로 그를 위해 울었습니다. 그의 친구였던 사람들은 유족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인간의 이러한 고통을 보면서 그리고 이 세상의 구주께서 곁에 서 계시는 데도 죽은 자에 대해 통곡하며 괴로워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인성을 쓰셨고 인간의 슬픔에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고통을 대할 때마다 그분의 부드럽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는 연민의 정이 일어납니다. 그분은 우는 자와 같이 우시고 기뻐하는 자와 같이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신 까닭은 마리아와 마르다에 대한 동정심 때문만이 아닙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 예수님의 눈물에는 인간적인 슬픔을 뛰어넘는 슬픔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사로를 위해 우신 것이 아닙니다. 조금 뒤면 무덤에서 그를 불러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사로를 위해 슬피 우는 자 중 여럿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분을 죽이려는 계획을 머지않아 세울 것이기에 그분은 우신 것입니다. 그러니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눈물을 올바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분이 슬퍼하시는 원인에 대하여 그분 앞에 나타난 장면의 겉 사정밖에 알지 못하는 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매우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시대의 소망』, 533~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