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2일 일요일 장년 교과] 갈릴리에서의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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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베드로를 다시 부르시고 사역으로 회복시키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신보다 예수께 초점을 맞추고 겸손하게 행하였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21:1-19을 읽어 보라. 이 구절에는 특히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겸비에 관한 어떤 중요한 진리가 나타나 있는가?

요한복음 20장은 책의 목적을 서술하며 마치기 때문에 복음서가 거기서 끝나도 논리적으로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한 장을 더 기록하고 있다. 21장은 갈릴리로 돌아온 몇몇 제자들에게 베드로가 호수에서 하룻밤을 보내자고 제안하면서 시작된다. 마치 옛날로 돌아간 듯 보였고 제자들은 다시 고기를 잡는다. 하지만 그날 밤 아무것도 잡지 못한다.
아침이 되자 호숫가에 있던 낯선 사람이 제자들에게 배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는다. 마치 예수님과 사역을 시작하던 그때 같았다(눅 5:1-11). 요한은 즉시 예수님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말한다. 베드로는 곧 물로 뛰어들어 물가로 헤엄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하시는데, 모두 주님을 사랑하는지 물으신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라고 장담했다(요 13:37). 그러자 예수님은 그가 세 번 부인할 것을 예언하셨다(요 13:38). 이번 갈릴리의 만남에서 베드로는 더 이상 자신을 기준점으로 삼지 않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춘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1:17).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할 때 동사 아가파오(agapaō, 헬라어)를 사용해서(마지막을 제외하고) 사랑하느냐고 물었고, 베드로는 친구로서 사랑한다는 필레오(phileō)로 대답하였다는 점을 주목한다. 이는 베드로가 더 높은 종류의 사랑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암시한다는 주장이다.
사실 베드로의 반응은 겸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신의 실패의 기억이 너무나 생생했기에 그는 겸손하게 ‘낮은 개념’의 표현을 사용하며 자신에 대해 너무 강하게 주장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겸손을 인정하셨으며 이는 베드로를 다시 사역의 길로 회복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겸비는 분명 그리스인이 감당할 사역의 가장 큰 자질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판단의 초점을 자기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추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회복과 초기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 중 하나이다. 예수께서 다른 제자들 앞에서 베드로를 다시 부르지 않으셨다면 그가 감당한 두드러진 역할을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교훈>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베드로를 다시 부르시고 사역으로 회복시키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신보다 예수께 초점을 맞추고 겸손하게 행하였기 때문이다.

<묵상> 주님을 알고 따르고자 하는 사람에게 겸손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적용> 십자가에 비추어 볼 때, 누구라도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어떤 것을 버리고 무엇으로 자랑스러워해야 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깊은 회개를 나타낸 베드로 –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공공연하게 부인했었다. 예수께서도 세 번씩이나 가시 돋힌 화살과 같은 이 날카로운 질문을 그의 상처받은 마음에 화급하게 던짐으로써 그의 사랑과 충성의 보증을 베드로에게서 끌어내셨다. 모인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회개의 깊이를 나타내셨으며 한때 자만스럽던 제자가 얼마나 완전히 겸손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셨다”(시대의 소망, 812).

<기도> 주님을 떠난 제자들을 찾아와서 사랑으로 기회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서도 갈릴리 어부들같이 저희의 삶도 주님에게서 알게 모르게 멀어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주님 사랑하는 마음 변하지 않게 도와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