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는 제자를 위한 재림의 약속은 죄로 인한 비극이 완전히 끝나는 때이다. 그분을 신뢰할 수 있기에 우리는 그 약속도 이루어질 것을 믿을 수 있다.
요한복음 14:1-3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어떤 맥락에서 이 말씀을 하셨는가?
요한복음 13장의 끝에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신다고 말씀하신다(요 13:33). 이 말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질문한다(요 13:36). 제자들은 예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 승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목숨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요 13:37).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하신다(요 13:38).
예수님은 이런 맥락 가운데 제자들에게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14:1). ‘근심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동사 ‘타라소'(tarassō)는 ‘동요하다, 방해하다, 불안하게 하다, 혼란에 빠지다’를 뜻한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혼란에 빠졌던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위해 거할 곳이 많은 아버지의 집을 말씀하신다. 그분은 그들을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그곳으로 가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가오는 십자가의 폭풍을 넘어 그분이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다시 오실 때를 가리킨다. 그분은 죄로 인한 이 모든 비극이 단번에 끝날 때를 바라보고 계신다(단 7:27 참조).
예수님은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분명히 주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이다.
그 약속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성경 예언의 성취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거기에 요한복음 14:3은 재림의 약속에 대한 다른 근거를 제시한다. 이 구절에서 ‘내가 올 것이다'(I will come)의 원문은 헬라어로 현재 시제이다(내가 오고 있다). 이것은 헬라어 문법에서 미래적 현재형을 사용한 것인데 마치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같이 묘사될 만큼 성취가 확실한 미래의 사건을 말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이어서) 따라서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내가 반드시 다시 와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합당하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우리 소망의 근거는 성경 예언의 성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그 약속을 주신 분, 바로 그분을 신뢰할 수 있기에 우리의 소망은 더욱 확실한 것이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위해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이 약속하셨기에 우리는 그 약속을 신뢰할 수 있다.
<교훈> 두려워하는 제자를 위한 재림의 약속은 죄로 인한 비극이 완전히 끝나는 때이다. 그분을 신뢰할 수 있기에 우리는 그 약속도 이루어질 것을 믿을 수 있다.
<묵상>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확실성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재림이 없다면 예수님의 초림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적용> 다시 오신다는 확실한 예수님의 재림을 나는 얼마나 확실하게 기다리고 있습니까?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생활을 다시 돌아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며 ‘각인의 눈이 그를 볼’ 것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계 1:7; 살전 4:16; 마 25:31)라 하셨다. 그때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고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이 성취될 것이다”(시대의 소망, 832).
<기도> 주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안일한 마음으로 살지 않았는지 자신을 돌아봅니다. 우리를 위해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시는 예수님 재림의 약속을 기다립니다. 하늘을 향하여 마음을 고정하고 발걸음도 주님의 오심을 향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