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할 때에 보니 쌍태라…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창 38:27-30)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근친상간을 한 다말은 본래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할례 받은 백성’이요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며느리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니 대를 잇기 위해 그들 족속의 풍습대로 시아버지의 씨를 받았지만, 유다는 아니었습니다. 유다가 창녀로 변장한 다말에게 들어간 것은 순전히 정욕 때문입니다. 그러니 행음은 다말이 아니라 유다가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 말을 하지나 말든지 앞으로는 택한 백성이라며 거룩한 척 경건한 척 신실한 척 온갖 척을 다 해 놓고 뒤로는 술에 취해 창녀나 찾아다니는 자, 그 자가 바로 유다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답게 죄를 증오하고 죄에 대해 분노합니다. 그런데 그 죄는 자기 자신의 죄가 아니라 남의 죄입니다. 남의 죄에 대해서는 분노를 서슴지 않되 숨겨진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럽고 관대하고 자비롭고 인자한 자, 그자가 바로 유다인 것입니다. 그러니,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며느리 다말이 아니라 시아버지 유다가 받아야 합니다.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해야 한다면, 그 자는 다말이 아니라 유다입니다. 임신한 다말에게 분노하여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창 38:24) 명령하는 유다 말입니다.
그 유다가 행음하여 며느리 다말에게서 아들을 낳으니, 그 아들의 이름이 ‘베레스’입니다. 참으로 낯부끄럽고 민망하고 수치스런 족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족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십니다. 거룩하신 여호와 하늘의 하나님이 ‘한 아기’가 되어 그 수치스러운 족보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유다 같은 우리를 그 수치스러운 ‘야곱의 족보’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족보’로 옮기시려면, 오직 그 한 길밖에 없으니 하나님은 아무 망설임도 없이 그 족보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 1:1, 3, 16).
야곱의 족보 안에 들어오셔서 ‘유다’의 후손이요 ‘다말’의 후손이요 ‘베레스’의 후손으로 나신 하나님, 그 하나님으로 인해 유다 같던 우리가 이제 감히 하늘을 소망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창세기 38장을 읽고 나니, ‘할례’를 받았다 하며 우리의 의를 내세웠던 일, ‘택한 백성’이라며 우리의 경건을 자랑했던 일, ‘남은 자손’이라며 우리의 신실함을 자랑했던 일이 낯이 뜨겁도록 부끄러울 뿐입니다. 오직 은혜, 은혜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