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2일 금요일 예수바라기] 에스겔 14장 마음에 들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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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겔 14:3).

마음에 들인 것

어느 날 이스라엘 장로 두어 사람이 장래에 있을 일과 예루살렘의 운명에 관해 묻고자 에스겔에게 왔습니다(1절).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여쭤보려고 온 일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통해서 장래 일과 심판에 대해 충분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장래 일을 물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와서 회개하고 돌이키는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장로들은 그저 “자기를 위하여” 물으려고 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의 안위를 위해 왔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마음의 중심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마음에 자기 우상을 두고 죄악을 행하면서도 위급한 때에만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에게는 하나님도 그저 우상들 중의 하나로만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결코 응답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상과 죄악을 품은 채 하나님께 온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하실 응답은 오직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서 그들을 끊는 것밖에 없었습니다(7, 8절).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 있어도

여호와께서는 어떤 나라가 불법을 행하여 범죄하므로(13절)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공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14절, 참고 16, 18, 20절)라고 네 번에 걸쳐 말씀하십니다.

노아, 다니엘, 욥은 타락한 세대 가운데서 의로움을 지켰거나 극도의 환난 중에서 의로움을 지킨 인물들입니다. 즉 에스겔 당시가 그 세 사람이 활동하던 상황들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패악한 상황을 포함한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과 각 개인과의 관계에 따른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에스겔이 같은 시기에 활동하던 다니엘을 언급한 것은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일이 어렵다고 핑계 대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말씀은 그런 의로운 인물들일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며 진정한 중보자는 하나님뿐이고 그들을 구원할 자도 하나님뿐이므로 그분께로 각 개인이 돌아가야 한다는 호소일 수도 있습니다.

기도) 제 우상을 주님 앞에 내어놓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