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9일 일요일 예수바라기] 영광스러웠던 옛날, 비참한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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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시 44:1).

그들과 우리

시인은 주님께서 옛적에 조상들(그들)에게 행하셨던 일로 44편을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뭇 백성들을 내쫓고 조상들을 약속의 땅에 뿌리 내리게 하셨습니다. 이 일은 조상들 이 자기 칼로 이룬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오른손과 주님의 팔과 주님의 얼굴의 빛이 하신 일이었습니다(1-4절).

1-4절에서 “그들”을 강조했던 시인은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5절)라고 말하며 옛날의 그들의 일을 현재의 우리 일로 받아들입니다. “구원을 베푸소서”의 문자적 뜻은 “구원을 명령하소서”로서, 이 말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과거에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듯이 현재의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시인은 지금 그들의 일을 우리의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와 그분

9절은 앞의 내용과 상반되는 말을 표현하는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형편은 버림받고(9절) 탈취당하고(10절), 잡아먹힐 양처럼 되었고(11절) 조롱당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13-14절). “우리”는 종일 능욕을 받고 얼굴에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15절).

시인은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17절)는데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22절)라고 하소연합니다. 그들이 정말 주님을 잊지 않고 그분과 맺은 언약을 어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버림받음, 잡아먹히는 양, 팔림, 조소와 조롱, 능욕, 수치…”라는 말들은 복음서의 수난 주간에서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을 묘사하는 단어들이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도살할 양”을 언급한 시편 44편 22절의 말씀을 로마서 8장 36절에서 예수님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우리가 예수님을 잊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잊지 않았고, 우리가 언약을 어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와의 언약을 새롭게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고난당하는 우리와 함께하셨습니다. 시인은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23절)라고 외쳤지만, 주님은 언제나 깨어서 우리와 함께 고난당하시고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도) 저도 언제나 깨어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