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1일 목요일 예수바라기] 예레미야 애가 서론 통곡과 절제된 슬픔이 어우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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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애 1:1).

슬프다
애가는 1, 2, 4장이 ‘슬프다’(히, 애카)라는 말로 시작하기 때문에 애가(哀歌)라는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어찌 예레미야 애가라는 슬픈 노래가 나오게 된 것일까요?
애가는 예루살렘 멸망이 예루살렘의 죄악의 결과임을 인식하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이 무너진 것을 슬퍼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적군의 손에 점령당한 예루살렘 백성들로 인해 괴로워합니다. 슬픔은 1장부터 시작되어 2장에서 커지다가 3장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4장에서는 약간 약해지는 듯하다가 5장에서 슬픔의 탄식으로 마칩니다. 사이사이에 소망의 이야기가 없지는 않지만, 애가는 마지막 절의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애 5:22)라는 통곡으로 마무리됩니다.

슬픈 노래를 어떻게 이렇게
애가의 1~4장은 히브리어 철자 22자의 순서에 따라 각 절이 시작되는 아크로스틱 형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1, 2, 4장은 각 22절로 되어 있고, 3장은 66절인데 3절씩 같은 철자로 시작하여 66절까지 그 순서를 따릅니다. 5장은 그 히브리 철자 순서를 따르지 않음으로 아픔이 폭발할 듯 보이지만 끝내 22절의 한계선을 넘지는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큰 슬픔을 어떻게 이런 절제된 형식에 담을 수 있었을까요? 그가 아직 소망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소망이 애가의 중심부에 잘 담겨 있습니다. 성경을 펴고 애가 3장 19~25절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성읍도, 하나님의 성전도, 하나님의 백성도, 모든 영광도 사라졌기에 애통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살아계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여전히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이 무궁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여전히 하나님을 바랄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을 기다리는 영혼들에게 여전히 선하신 분임을 알았기에 예레미야는 통곡의 슬픔을 22절들에 꾹꾹 담아둘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자들은 애통하지만 무너지지 않고, 애통해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애통합니다. 그 애통함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소망이라는 더 큰 틀 안에 그 애통함을 담아둘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큰 절망 중에서도 시대의 소망이신 분으로 인해 다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기도) 소망을 담아 애가를 노래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