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2일 일요일 장년 교과] 당신의 생각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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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저버린 아들에게 달려가서 큰 긍휼로 그를 회복하고 잔치를 베푸는 것은 타락한 한 사람이라도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는 하나님의 큰 긍휼을 상징한다.

이전 교과에서 본 것처럼, 제아무리 악독한 죄인이나 끔찍한 악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기 때문에, 죄를 불쾌하게 여기신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죄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아시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5:11-32을 읽어 보라.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 비유는 첫째처럼 집에 남아있는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경고하는가?

이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일찍 유산을 요구한 것은 사실상 아버지와 가족을 저버린 것이다. 이후에 그는 유산을 낭비하고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여물통에서 먹는 돼지를 부러워하는 형편에 이른다. 아들은 아버지 집에는 하인조차 먹을 것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하인으로라도 받아주기를 희망하며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이후의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어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돌아오자마자 내칠 것이다. “넌 유산을 가져가면서 나와 인연을 끊었다. 여기는 더 이상 네 집이 아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일상적이고 심지어 합당한 자세가 아니겠는가? 사람의 생각으로는 그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기에는, 특히 아들로서 받아들여지기에는 너무 멀리 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을 상징하는 비유 속 아버지는 전혀 그렇게 반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탕자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그에게 입을 맞추”(눅 15:20, 흠정역)었다.

(이어서) 당시에 집주인이 누군가를 맞으러 달려가는 것은 체면에 어긋나는 일로 여겨졌지만, 아버지는 큰 자비로 아들을 만나러 달려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잔치까지 베푼 것인데, 이는 단 한 사람일지라도 타락한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보여준다. 얼마나 놀라운 긍휼의 하나님인가!

<교훈> 가족을 저버린 아들에게 달려가서 큰 긍휼로 그를 회복하고 잔치를 베푸는 것은 타락한 한 사람이라도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는 하나님의 큰 긍휼을 상징한다.

<묵상> 첫째 아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인간의 논리와 생각과 어떤 차이가 있는 분이십니까?

<적용> 인간의 개념이 복음이나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얼마나 이해하지 못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새로운 이해를 내 삶의 여러 면에 어떻게 적용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탕자를 받아들이는 아버지 – “부친은 자기 아들의 비참한 모습과 누더기 옷을 경멸의 눈초리로 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 어깨에 걸쳤던 넓고 좋은 외투로 아들의 남루한 꼴을 덮어 주자 그 아들은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는 아들이 품꾼의 하나로 받아 달라는 요청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가장 좋은 대접을 받아야 할 아들이요 수종하는 남녀 종들의 존경과 섬김을 받아야 할 아들이었다”(실물 교훈, 203).

<기도> 하나님을 멀리 떠나 당신이 주신 모든 가치도 짓밟은 자를 다시 받아주시는 놀라운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부끄럽지만 주님과 사람 앞에 저지른 모든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니 도와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될 수 있게 은혜를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