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선교 120주년 기념] 권태건의 내러티브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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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려앉은 성산항. 1951년 1월 18일, 이곳으로 약 1000명의 재림성도가 전쟁을 피해 내려왔다.

비계가 설치된 까닭일까. 아니면 옷을 갈아입는 중이기 때문일까. 성산교회(담임목사 마승용)는 지난해 5월 제주신설대회 설립 현장심사 취재 때와는 인상이 크게 달랐다. 당시에는 현장심사단의 이야기를 듣고 사진촬영을 하느라 교회를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없었다. 당시, 성산교회는 심사를 위한 방문지 가운데 한 곳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성산교회가 주인공이다. 이곳 성도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며, 교회가 위치한 지역주민들의 기억을 더듬어 가야 한다.

제주시 성산읍 오조리 입구에 자리잡은 성산교회는 시골 교회의 전형과도 같았다. 아름드리나무와 어우러진 모습이 고즈넉했다. 이 자리에서만 30년 넘게 마을을 지켜왔다. 사실 성산교회가 성산포 지역을 영적으로 돌봐온 시간은 70년이 훌쩍 넘어간다. 1951년 1월 전쟁을 피해 재림성도들이 성산포, 신앙리, 고성리, 오조리 등 4곳 마을에 자리 잡으며 주민들을 돌보기 시작한 까닭이다. 

교회 가는 길에는 고성5일장이 위치해 있다. 날짜의 끝자리가 4일과 9일인 날 장을 연다. 하지만 사람이 찾지 않은 지 이미 오래다. 컴컴하고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5일장이 설 정도면 과거에는 이 마을에 사람이 꽤 많이 살았다는 이야기일 터. 실제로 1989년만 해도 성산포 피난교회도 성도들이 너무 많아 새 교회를 지을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현재 오조리 입구에 서 있는 성산교회는 바로 그때 피난교회를 매각한 금액과 부지를 헌납한 부복수 집사의 헌신으로 마련했다.

마승용 목사를 따라 3층에 위치한 사택으로 올라갔다. 한 편에 마련된 작은 방이 앞으로 열흘간 취재하며 머무를 ‘베이스캠프’다. 얼마 되지 않는 짐을 풀고, 삼육대 신학과 오만규 전 교수가 쓴 <재림교회 100년사>를 펼쳤다. 책이 워낙 크고 무거운 탓에 ‘성산포 피난생활’에 해당하는 부분만 복사해 가져왔다. 제주에 오기 전부터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 현장에서 펼친 까닭일까. 한 자 한 자가 새롭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100년사에 기록된 부복수 집사와 한공숙 장로(이하 성산교회)를 만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겠다. 이 마을 토박이로서 피난교회를 직접 경험하고 기억하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선교 120주년 기념 – 권태건의 내러티브 리포트

 


선교 120주년 기념 – 권태건의 내러티브 리포트

 

재림교인은 아니지만, 당시의 교회를 기억하는 주민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기자는 외지인인 탓에 마을의 사정은 전혀 알지 못했다. 고민을 알아챈 것일까. 마승용 목사는 강관규 수석장로(성산교회)를 소개했다. 

“강 장로님께서도 피난교회를 기억하고 계시고요. 무엇보다 오조리 이장을 맡고 계셔서 마을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마을주민을 취재하려면 강 장로님의 안내가 필요할 겁니다” 

다소 막막해서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던 기자에게 천군만마 같은 소식이었다. 그 길로 강 장로에게 전화를 걸어 어떤 분들을 만나야 할지 조언을 구했고, 흔쾌히 돕기로 했다. 하나님께서 만나야 할 이들을 미리 준비해주신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권 기자님, 저랑 잠깐 바람 쐬러 다녀오실래요?” 

마 목사가 방문을 두드렸다. 그는 이미 외투를 챙겨 입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피난교회를 보고 오려던 참이었다. 기자도 점퍼를 입고 따라 나섰다. 차에 올라타고 고성5일장과 읍내를 지나 오조리를 가로질렀다. 내일 해가 밝으면 구석구석을 누벼야 할 터였다. 마을을 빠져나왔다. 마 목사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어디로 향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바로 피난교회였다. 교회가 가까워지자 마 목사는 차의 속력을 줄였다. 관목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성도들의 마음이 스며들어 있는” 석조건물의 처마가 보였다. 마 목사는 다시 속력을 높여 어디론가 향했다. 이번에는 목적지를 알 수 없었다.

이윽고 차가 멈춰 섰다. 바다 내음이 한결 짙게 다가왔다. 바로 ‘성산항’이었다. 1951년 1월 18일 이곳으로 약 1000명의 재림성도가 전쟁을 피해 내려왔다. 부두에 묶인 배들은 고요했다. 대부분 차량과 사람들을 싣고 우도와 성산항을 왕복하는 여객선이었다. 하지만 기자의 눈에는 오래전 성도들을 싣고 이곳에 상륙한 ‘LST’(Landing Ship Tank) 수송선처럼 보였다. 비록 지금은 5일장도 서지 않고 주민보다는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성산이지만, 1951년 1월의 이곳은 재림교회의 떠오르는 ‘블루오션’이었다. – 다음에 계속 – 

* 이 기사는 <삼육대학교>와 <삼육서울병원>의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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