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웰다잉(well dying)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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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가까웠던 죽음은 산업화와 핵가족 시대를 거치며 사람들과 멀어진 지 오래되었다. 가족들과 함께 임종을 맞았던 사람들은 이제는 중환자실에서 쓸쓸히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다.

지금부터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죽음은 지금보다 사람들과 훨씬 가까이에 있었다. 집안의 어르신이 돌아가실 때에는 대개 집에서 앓다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임종을 맞이했다. 어느 집의 장례도 대개는 숨길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이 모여들어 깃발을 세우고 상여를 짊어지며 마을을 몇 바퀴 돌고 장지로 향했다. 상여를 메고 가는 마을 사람을 상여꾼이라고 했는데 그들은 장송곡을 부르며 걸어갔다. “북망산천 머다더니 내 집 앞이 북망일세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오실 날이나 일러 주오.” “너허너허 너화 너 너이가지 넘자 너화 너.” 주거니 받거니 노래하는 상여꾼 뒤로 상복 입은 유족들이 머리에 새끼줄을 감고 상여 뒤를 오열하며 따라갔다. 마을의 아이들까지 멀리서, 가까이서 상여를 둘러싸며 장지까지 따라갔다. 마을에서는 장례가 일 년에 여러 번 있을 수밖에 없어서 죽음은 삶의 가까이에 늘 숨 쉬고 있었다. 죽음은 마을에서 삶과 뒤엉켜 살았다. 둘은 분리될 수 없었다. 마을 장례식은 사람들에게 언젠가는 가야 할 죽음의 길에 대하여 일깨워 주는 실물 교훈이었다.

죽음이 멀어지고 있다
이렇듯 가까웠던 죽음은 산업화와 핵가족 시대를 거치며 사람들과 멀어진 지 오래되었다. 가족들과 함께 임종을 맞았던 사람들은 이제는 중환자실에서 쓸쓸히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다. 자녀들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두었던 사람들은 각종 호스를 꽂고서 때로는 의미 없는 생명을 연장하는 데 급급하여 마지막을 잘 정리할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기까지 한다. 잘 죽는 것의 의미가 상실된 ‘죽음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삶의 후회를 용서와 관용으로 녹여 냈던 임종의 시간은 외로움과 쓸쓸함에 자리를 내어 주었다. 삶과 분리된 죽음, 관계와 괴리된 죽음, 혼자 마주하는 죽음, 삶과 관계의 회복 없는 죽음은 죽음의 본래의 모습이 아니다. 세월의 변화와 함께 죽음은 방치되어 왔고 사람마저도 방치되어 왔다. 죽음의 방치는 결국 사람의 방치이다. 웰다잉(well dying)은 삶과의 화해, 관계의 회복 그리고 인간 존엄성과 사람의 소중함에 대한 이 시대의 웅변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가까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여기에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가 있다. 살아 있는 것은 필연적으로 죽기 때문이다.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신학자 어거스틴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오직 죽음만이 확실하다.”라고 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모든 확실한 것 중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죽음이다.”라고 했다. 여기에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가장 확실한 죽음의 민낯을 대면하는 것은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할 것이다. 그러니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삶에 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프란츠 카프카는 “삶이 소중한 이유는 그것이 언젠가는 끝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고개를 돌린다고 하여 피할 수도 없는 죽음, 확실한 것 중에 가장 확실한 죽음, 사실 죽음 이야기는 사람을 사랑하게 하고 삶을 풍성하게 하고 자신을 겸손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웰다잉(well dying)이 웰리빙(well living)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죽음은 삶과 사랑을 일깨운다
말기 암 환자들을 연구한 보고서가 있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말기 암 환자들에게 물었다. “만약 삶의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대개 세 가지를 반드시 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들의 대답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첫째는 건강을 돌보고 싶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모든 것인 양 몸을 돌보지 않고 살았던 삶에 대한 후회가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사람은 육체적인 면, 정신적인 면, 영적인 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죽음이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꾼다고 하지만 어떠한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할지에 대한 권위 있고 믿을 만한 가르침을 알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성경에는 사람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인생의 지침들을 기록하고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교통사고나 전쟁으로 죽는 사람보다 걱정과 근심으로 인한 신경성 질환으로 죽는 사람이 훨씬 많다.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은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초석이 된다. 그것이 없이는 어떤 사람도 건강한 삶,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 위대한 정신 분석학자 칼 융은 “어떤 사람도 종교적 관점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치유된 사람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둘째는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좀 더 사랑하고 싶다는 것이다. 왜 돈을 벌고자 하는가? 왜 밤낮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는가? 왜 몸을 상하게 하며 일을 하는가? 소중한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이다. 행복은 사실 사소한 것, 가까운 곳에 있는데 많은 사람이 정작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시간을 쓰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인생의 종착역에 도착하면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사랑을 주지 않았으니 사랑을 받지 못했고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을 놓치고 산 결과가 되고 만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 줄 모른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어찌 사랑할 수 있으랴! 어떻게 사랑이 주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고 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올바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사랑을 삶에서 실천했다면 “나는 사랑했노라.”고 죽음 앞에서 말할 수 있다.

셋째는 하고 싶은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도해 보고 싶다고 했다. 인생은 두려움에 지배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강을 잃을까, 직장을 잃을까, 결혼을 하지 못할까, 죽지는 않을까, 미래는 어떻게 될까, 다른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등 많은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죽음 앞에 닥쳐서야 용기를 내 보지만 이미 기회가 없는 것이다.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365번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일 년 365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한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죽음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준다고 할지라도 두려움의 근원을 제거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이는 소용이 없음을 알게 된다. 죽음에 관한 가장 탁월한 전문가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는 죽음의 전문가다.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계 1:18).

웰다잉(well dying)은 웰리빙(well living)이다
죽음을 잘 준비하는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어떤 철학이나 묵상이나 명상도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으면 무의미한 것이다. 웰다잉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웰리빙 하는 것이다.

최상재
강남영어학원교회 담임목사, 인디애나 주립대 언어교육학 박사

가정과 건강 11월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