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강도는 죽은 당일에 낙원으로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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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총회 성경연구소의 성경 난해 문제 해석
Interpreting Scripture: Bible Questions and Answers

[대총회 산하에 봉직하고 있는 선발된 학자 49명이 내놓은 성경 난제 94개에 대한 균형 잡힌 해석들]

십자가의 강도는 죽은 당일에 낙원으로 갔는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십자가상에서 한편 강도에게 하신 예수의 약속(눅 23:43)은 전통적으로 영혼불멸, 곧 신실한 죽은 자들의 영혼이 부활 전 하늘에 의식이 있는 존재로 있다는 신조를 지지하는 주요 증거 구절로 사용되어 왔다. 대대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이는 이 견해에 따르면, 참회한 강도가 예수께 그분의 나라에서 기억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분은 그가 당일에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보증하셨다는 것이다.

본문의 구두점:
문제의 관건은 예수의 이 진술에 구두점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 대부분의 번역본들처럼 쉼표를 “오늘” 앞에 찍는다면 이 본문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가 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실제로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초기 기독교 시대에 신약의 사본들은 단어 및 문장들 사이에 구분이 없고, 본문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나타내는 구두점이 거의 없거나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예컨대, 쉼표는 9세기에 와서야 쓰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헬라어 사본에 있는 쉼표 같은 기타 구두점은 본문의 의미에 대한 당시의 이해를 나타내 줄 뿐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23:43에 구두점을 넣으면서 쉼표를 찍은 것은 문법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신학적인 확신 곧 신실한 자를 위한 최종적 상급이 죽을 때 주어진다는 사상 때문이었다.

대안적 번역:
이러한 해석이 초기교회 시대에 이 본문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 고대 역본들, 교부들의 인용문들, 심지어는 헬라어 사본들에 있는 특정한 부호 등은 사실 초기 기독교 시대에도 다른 독법을 지지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증거한다. 흔히 주장하는 것과 달리, “오늘” 바로 다음에 쉼표를 찍어도 “오늘”이라는 단어가 군더더기 표현이 되지 않는다. 어떤 진술을 시작하거나 끝맺음하기 위해 “오늘”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어질 진술이나 이미 말해진 진술의 중요성과 엄숙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지닌 셈어의 관용구라고 주장되어 왔는데, 그것은 옳다. 사실 이런 관용적 표현이 성경에도 비교적 자주 나온다.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신명기에만 다음과 같은 표현들이 40회 이상 나온다.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노니 오늘날…”,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오늘날…”, “내가 너희에게 명하노니 오늘날…”,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오늘날…”(예를 들어서, 신 4:26; 6:6; 7:11; 8:19; 11:26, 32; 30:18, 19; 32:46; 참조 행 20:26; 26:2). 초기 기독교인들이 사용한 구약의 헬라어 번역인 <70인역>을 통해서!
누가는 이러한 표현과 기타 셈어 관용구들에 익숙해 있었을 것이다.

성경의 증거:
십자가상에서 예수께서 하신 진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구원받은 자들이 낙원에서 상급을 받을 시기와 관련된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의문의 여지없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낙원”은 하늘(고후 12:2∼4) 곧 생명나무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에 있는 구속받은 자들의 영원한 처소(계 2:7; 22:1∼5)를 의미했다. 다른 성경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시면서 그분이 다시 와서 자기 백성들을 데려갈 시기도 언급하셨다(요 14:1∼3). 그때 그분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초청하실 것이다(마 25:31∼34). 이 사건은 영광스러운 재회의 순간이 될 것인데, 그때 죄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최종적이며 온전한 기념이 이뤄질 것이다(눅 22:14∼18).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는 독법은 2세기의 본문으로 여겨지는 최초기 신약 번역본 중 하나인 <큐레튼 시리아역>(Curetonian Syriac)에서 발견된다. 이런 독법은 또한 4세기의 에프라임(Ephraem), 5세기의 캇시아누스(Cassian)나 헤쉬키우스(Hesychius) 같은 교부 저술가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아마도 4세기의 위조문서인 빌라도의 행적(Acts of Pilate) 및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Christ’ Descent into Hell) 등에서도 나타난다.

본문의 의미: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신과 회개한 강도가 죽은 당일에 낙원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고 단정 짓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만약 쉼표를 “오늘” 앞에 찍는다면 신실한 죽은 자가 영원한 상급을 받을 시기에 관해서 성경 다른 곳에서 가르치는 것 및 예수 자신이 가르친 것과 이 본문을 사실상 조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쉼표를 “오늘” 뒤에 두면, 뒤따라 나올 진술의 의미를 강조하는 셈어의 관용적 표현이 된다.
마지막으로, 이 본문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새롭지도 부적절하지도 않음을 증명해 주는 광범위한 역사적 증거도 있다. 영혼 불멸에 대한 신앙이 기독교 안에 우세하게 된 후에도 초기 교회의 중요한 문서들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는 독법을 받아들였다.
강도는 예수께 그분의 나라에서 기억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의 삶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께 자신을 굴복한 사실 외에는 그의 요청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특별한 사항이 없다. 그가 그 주제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메시야에 대한 그의 개념은 초보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예수께서는 사후에 즉시 하늘에서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그와 교제할 것이라고 약속하진 않으셨다. 구주께서는 “내가 네게 이르노니” 다음에 “오늘”을 두어 엄숙한 약속을 하면서 그 죽어가는 사람의 마음에 위로와 소망을 심어 주었지만 구체적으로 언제 그 약속이 성취될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셨다.

Wilson Parosc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