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총회 성경연구소의 성경 난해 문제 해석 Interpreting Scripture: Bible Questions and Answers [대총회 산하에 봉직하고 있는 선발된 학자 49명이 내놓은 성경 난제 94개에 대한 균형 잡힌 해석들] |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이것은 사소한 질문이 아니다. 이에 대한 대답이 요한복음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로 작용한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구약과 신약을 이해하는 방법의 상당 부분을 결정한다. 그리고 각 개인의 그리스도인 삶이 성장하는 데 근본적인 영향을 끼치며, ‘율법의 계명들을 과연 지켜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도 답한다. 그러나 이 모든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먼저 요한복음 1장에 나온 이 문제의 원래 문맥을 살펴보도록 하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찬송시: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말하는 아름다운 찬송시로 시작한다. 제1연(1:1∼5)은 그분의 영원한 선재성, 창조의 능력, 빛으로 충만한 삶 등을 말한다. 제2연(1:6∼8)은 그분과 침례자 요한을 대조시키는데, 1연과 흥미로운 대구를 이룬다(즉 말씀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 예수는 항상 요한보다 더 우월한 분으로 제시된다.
제3연(1:9∼13)은 예수께 보인 사람들의 반응(영접 혹은 거절)을 묘사하면서,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 태어날 것을 말한다. 제4연과 마지막 연(1:14∼18)은 예수의 성육하심(“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 및 이 계시에 대한 믿는 자들의 반응을 묘사한다.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분이라고 예수에 대해 증거한다(1:15). 믿는 자들은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라고 증거한다(1:16). 이렇게 하여 우리는 논의하려는 본문인 17절에 이르게 되는데, 모세는 율법이 오게 된 중개자라고 말해지고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를 가져 온 분으로 묘사된다. 이 찬송시는 18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긴밀한 관계를 재차 확언하면서 끝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의 중개자:
요한복음 1:17은 예수 그리스도에 주의를 집중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은혜와 진리의 축복이 이르게 하는 중개자이시다. 이 본문에서 다른 점을 말할 수 있으나, 어쨌거나 이 진리는 확실하며 우리의 삶에 놀라운 축복이 된다. 그렇다면 모세를 말하는 첫 부분과 예수를 말하는 둘째 부분은 어떤 관계를 갖는가? 두 부분이 서로 보완 관계에 있는가, 아니면 대조 관계에 있는가? 다시 말해서, 질문에 있는 대로 모세의 율법은 예수의 은혜로 대체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는 최선의 길은 찬송시의 문맥에 비추어 제4연(1:14∼18)의 배경 안에서 본문(17절)을 보는 것이다. 4연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14절)라는 상당히 독특한 진술로 시작한다. 여기서 눈에 띠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 동사의 변화이다. 앞 절들에 “존재하다”를 의미하는 흔한 헬라어 동사 에이미를 사용하여 그분을 묘사한다. 이 동사는 이 문맥에서 “영원히 존재함”을 의미하는데, 6절에서 침례자 요한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헬라어 동사 기노마이(“존재하게 되다”)와 대조된다. 말씀이신 예수는 과거에도 존재하셨지만, 요한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예수는 영원하지만 요한은 정해진 시작점이 있다.
그러나 14절에서 찬송시는 “육신이 되신” 말씀에 대해서 말한다. 영원하신 말씀 곧 하나님이 인간의 실존 속으로 들어 온 것이다. 요한은 이제 기노마이라는 동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적용한다(“그분이 육신이 되셨다”). 그는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문자적으로 “그의 장막을 치셨다”)고 말함으로써 그 개념을 한층 더 강조한다. 그것은 출애굽기 25:8을 분명하게 반영한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는 것은 마치 구약 성소 위에 머문 불기둥을 보는 것과 같다. 마태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는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다(마 1:23).
“바울을 오해하고 율법과 은혜를 불필요하게 이분화시킴으로써 모세의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자라난 그리스도인에게는 율법을 부정적으로 깔아보면서 이 절[요 1:17]을 읽을 유혹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이 복음서 기자의 의도가 아니다. 요한복음에서 모세는 긍정적인 하나님의 종으로 여겨지고 있다(예를 들어, 5:45∼47; 6A:32; 7:19∼23). 이 복음서에서 예수께 문젯거리는 모세와 율법이 아니라, 모세와 율법을 오용한 불순종하는 유대인에게 있었다(예를 들어, 6:31∼32; 9:28∼29)”(Gerald L. Borchert, John 1∼11,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TN: Broadman & Holman, 2002], 123). |
“은혜 위에 은혜”: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전문 용어로 “하나님의 현현”) 인간의 반응이 요청된다. 이런 반응이 바로 요한복음 1:15, 16에 묘사된 것인데, 요한 및 “우리”(교회)가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빛에 반응한다. 16절의 마지막 구절은 은혜의 충만을 표현한다(“은혜 위에 은혜”).(2) 그러나 요한은 계속 증가하는 이 은혜의 넘침을 좀 더 자세히 표현하고자 17절을 쓴 것으로 보인다.
요한복음 1:17은 헬라어 호티(“왜냐하면”)로 시작한다. 이 말은 앞에서 말한 것에 대한 이유 혹은 설명을 나타낸다. 16절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차고 넘침을 표현한다. 17절은 그것을 좀 더 자세히 해명한다. 헬라어 본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몇 가지 중요한 개념이 부상한다. 첫째, 17절의 첫 단어 “왜냐하면”이 16절의 설명으로 16절과의 연결을 유도한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이 16절에서 무엇을 의미하든, 17절이 그것을 설명하고 그것의 속뜻을 풀어준다. 둘째, 17절은 서로 대구를 이루는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율법은 “은혜와 진리”와 대구 관계에 있고,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와 대구 관계에 있다. 셋째, 17절의 첫째 부분과 둘째 부분 사이에 어떤 접속사(그리고, …할지라도, 그러나 등)도 없다. 이런 문법적 구조를 전문적인 용어로 무접속사(asyndeton)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절 사이를 연결해 주는 접속사의 생략을 가리킨다. 그것은 종종 묘사된 개념을 강조하는 효과를 내기 위해 사용된다. 예컨대, “왔노라, 그리고, 보았노라, 그리고 이겼노라.” 대신에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고 쓴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요한이 17절의 두 부분을 극적으로 강조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6절에서 요한은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서 넘치는 은혜를 받았음을 강조한다. 그런데 17절에서 갑자기 율법이 모세를 통해 주어졌다고 말한다. 왜?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나쁜 것이거나 제거되어야 할 어떤 것인가? 아니다. 구약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축복하기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의 일부였다. 그 옛 계시는 선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계시가 훨씬 더 낫고 영광스럽다(참조 고후 3:4∼18). 전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기둥 가운데서 계시하셨으나 지금은 그분이 몸소 육체로 오셨다. 전에는 우리가 그분의 얼굴을 보지 못했으나 지금은 아들 안에서 그분을 볼 수 있다. “17절에 율법에 항구적인 사랑이 결여된 것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항구적인 사랑이 나타난 것이 대조돼 있다는 이론은 요한이 모세를 존경하는 태도로 언급하는 것(1:45; 3:14; 5:46)과 잘 맞지 않는다. 오히려 17절은 율법에 나타난 항구적인 사랑과 예수 안에 계시된 항구적인 사랑의 최고의 본보기를 비교하고 있다.”(3)
결론:
모세의 율법은 예수의 은혜로 대체되었는가? 아니다. 율법과 은혜는 상반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함께 작용한다. 율법은 우리에게 필요를 보여 주고, 은혜는 그것을 채워준다. 은혜는 우리에게 용서를 제공하고, 율법은 우리의 의무를 가리킨다. 구약은 구원자의 도래를 예언하고, 신약은 이 예언을 성취한다. 요한복음은 예수와 모세의 율법을 이간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로 인한 율법의 잘못된 해석에 반대하셨다. 이런 관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된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한다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에 순종하게 될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빛은 시내산에서 영광스러웠지만 십자가에서는 훨씬 더 영광스럽다. 주께서 돌아가신 것은 우리로 그분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그분을 위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Tom Shepherd
<미주>
(1). 달리 언급하지 않으면 모든 번역은 저자 개인의 번역이다.
(2). 이 구절은 17절을 해석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헬라어로는 카린 안티 카리토스이다. 어떤 해석자들은 헬라어 안티가 사용된 것이 모세의 율법을 대신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는 대조를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이런 견해의 문제점은 두 가지다. 첫째, 그것은 율법을 대신한 은혜가 아니라, 은혜를 대신한 은혜가 될 것이다. 둘째, AD 1세기부터 유대인 작가 필론은 이 구절을 “은혜 위에 은혜”라고 이해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이 용법의 예를 든다(Philo, Poster. Cain. 145). W. Baur, W. F. Arndt, F. W. Gingrich, and F. Dank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second edition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9), s.v. anti를 참조하라.
(3). Raymond Brown, John I∼X, Anchor Bible Commentary vol. 29 (Garden City, NY: Doubleday, 1966),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