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세대를 만나는 M세대 상담교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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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대 간의 ‘다름’이라는 장벽쯤은 넘을 준비가 되어야 한다. 이 장벽을 넘었기 때문에 Z세대의 만남을 통해 또 다른 관계에 대한 유연함을 얻게 된다. 우리가 서로의 세대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자신의 가치관과 태도에 유연성을 가지게 될 때 우리의 관계가 더욱 빛나게 될 것이다.

연구소가 아닌 학교로 학생을 찾아가는 상담. 처음 가 보는 학교였지만 어색함과 생소함은 잠시 접어 두고 나는 이 만남이 아주 긍정적인 신호임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최대한 환하고 밝은 표정을 지으며 친절한 말투와 목소리를 장착하고 상담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온 학생은 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자리에 앉아 말없이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하는 짤막한 질문에 거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게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여 줄 뿐 학생은 이 상담에 절대 호의적이지 않음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어느 홍보 글에 ‘Z세대를 얻는 자는 천하를 얻는다.’라는 문구를 보았는데 내가 처음 상담을 시작할 때는 Z세대를 얻지 못한 완벽한 패배자였다. 세대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지만 다른 친구들을 상담하면서도 딱 5분 정도 지나면 ‘역시나 나는 Z세대는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MZ세대로 묶어 내가 그들의 세대와 함께 불린다는 것을 그들이나 나나 원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대화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줄임말과 가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 주제에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초보 상담자였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눈을 크게 뜨고 호기심 어린 얼굴로 그 친구들을 바라보는 일뿐이었다.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와 그들이 좋아하는 콘텐츠를 즐기기에 나는 너무 다른 시대 사람임이 분명했다. 여기저기서 들은 짧은 지식으로 그들을 알고 있다고 아는 척해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가진 레이더에 내가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인지 금세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내담자의 너그러움 때문인지, 상담자의 애씀 때문인지 몰라도 간혹 내담자들로부터 “함께 갈 수 있겠다.”라는 합격점을 받는 순간도 있었다. 시시각각 바뀌는 사회 속에서 변화에 민감한 청소년을 만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고, ‘어떻게 하면 이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깊어졌다. 나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건 아닌지, 이 영역에서 상담의 전문성을 발휘할 기회가 오기는 할지 수없이 많은 생각을 하고 다른 직업을 알아보기도 했다. 서두에 언급했던 친구와의 상담 때문에 조금만 더, 다시 해 보면 될 거야 하는 마음으로 청소년 상담을 여태 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친구와의 상담 초기는 냉랭하다 못해 이 관계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고 여겨질 때도 있었다. 한 개인을 이해하기 이전에 Z세대가 가지고 있는 문화와 가치관을 알고 이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고, 서로의 공통점과 배려의 접점을 찾게 되면서 그제서야 그 친구가 가지고 있는 문제에 접근할 수 있었다. 내가 만났던 첫 내담자는 몇 명의 식구 외에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그 친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수행 평가를 위해 발표를 해야 하는 순간이나 친구들과 토론을 통해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는 순간에도 그 친구는 말을 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나를 만나게 된 계기는 본인이 위험한 순간에 노출되었는데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아 연구소로 의뢰가 왔다. 이 친구가 학교에서 말하지 않는 이유를 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나 말고도 많은 사람에게 ‘왜 말을 하지 않냐?’라는 질문과 “말 좀 해라.”라는 요구를 받았기 때문에 섣불리 질문을 하거나 재촉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우린 오랫동안 탐색전에 들어갔고 서로의 경계를 넘어가지도 넘지도 않는 상태에서 매주 만났다. 어느 날, 그 친구 손에 꼭 쥐어진 핸드폰으로 페이스북을 하는 것을 보고 페메(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근 모 프로그램에서 톡으로 대화하는 것처럼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SNS으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얼굴은 보지만 SNS으로 이야기 나누는 것은 또 묘한 매력이 있었다. Z세대는 유년 시절부터 인터넷 등의 완전한 디지털 환경에서 나고 자란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디지털 원주민)’이다. 덕분에 페이스북 메시지는 그 친구와 대화할 수 있는 좋은 매개체가 되었다. 우리는 링크를 걸어 좋아하는 것을 소개하고 다양한 이모티콘으로 감정을 표현했다. 그 친구가 기꺼이 페이스북 메시지의 다양한 기능과 밈(인터넷상에서 유행하는 말이나 사진, 영상 등이 다시 제작되어 퍼지는 그림이나 사진, 영상들을 가리킨다.)에 대해 알려 주었다. 어느 순간 어렵기만 했던 그들의 문화에 나도 스며들었다.

내가 우여곡절이 많았던 이 첫 상담을 기억하는 이유는 우리가 상담이라는 관계를 통해 부단히 애썼던 흔적들이 나와 그 친구의 인생에 새겨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흔적을 바탕으로 우린 또 다른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있다. 나는 이때의 경험이 없었다면 아마 청소년 상담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상처만 받았다고 여기며 나와 너무 달라서 함께하기 힘든 세대라고만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담은 상담자가 혼자 내담자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개선하거나 완벽하게 해결 방법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이 겪게 된 문제들이 단순히 문제로 남아 그들을 장악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신뢰 가운데 맺어진 관계를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유연함을 갖게 되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세대 간의 ‘다름’이라는 장벽쯤은 넘을 준비가 되어야 한다. 이 장벽을 넘었기 때문에 Z세대의 만남을 통해 또 다른 관계에 대한 유연함을 얻게 된다. 우리가 서로의 세대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자신의 가치관과 태도에 유연성을 가지게 될 때 우리의 관계가 더욱 빛나게 될 것이다. 세대에 대한 이해가 자칫하면 서로를 배척하고 차별하는 도구로 쓰이지 않길 바란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지나치게 ‘다름’만을 강조하다 보면 오해와 편견이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게 되지 않을까? 나의 첫 내담자가 자신과 다른 세대에 있는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었던 것처럼 우리는 서로에 대해 유연성이 필요하다.

강풍이 자주 부는 미국 서부 해안에는 세쿼이아 나무가 산다. 이 나무는 뿌리가 얕아서 바람에 쉽게 날아갈 것 같은데 거센 바람이 불어도 쉽사리 날아가는 법이 없다. 혼자 자라지 않고 꼭 여럿이 숲을 이루고 얕은 뿌리지만 단단히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행복할 때 살피고 실패할 때 꿈꿔라』, 오종환, 아름다운사람들, 2010.). 우리의 인생도 이 나무들처럼 서로에게 얽혀 있다. 혼자 사는 것 같은 Z세대도 미디어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공유한다. M세대인 나는 Z세대와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강풍이 불 때 우리가 서로에게 보여 주었던 수용과 존중이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하리라 생각한다.

정현주
현 해솔학교 전문상담교사, 경기 북부 거점학교 강사, 창동 아이윌센터 예방 강사, 성동광진교육청 마음이랑 집단상담사, 대구 한국발달상담센터 인턴 상담사

가정과 건강 5월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