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5일 일요일 장년 교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15

그분은 왕이지만 다른 종류의 왕이심을 암시하였다. 질문 앞에 그분은 왕의 위엄으로 행하셨고 빌라도는 그를 구하기 위해 힘썼으나 유대인은 죽이려 했다.

마가복음 15:1~15을 읽어 보라. 어떤 역설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가?

본디오 빌라도는 서기 26년에서 36년까지 유대의 총독이었다. 그는 자비로운 통치자가 아니었고 그의 여러 행동은 그 땅의 주민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눅 13:1). 예수에 대한 유대인의 판결은 신성 모독죄로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그러나 로마의 통치 아래서 유대인들은 대부분의 경우 죄인을 처형할 수 없기 때문에 처결을 얻기 위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끌고 갔다.
예수를 고발한 죄목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막 15:2)라는 빌라도의 짧은 질문을 통해 혐의가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은 왕에게 기름을 부었기 때문에 어떻게 메시아(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용어가 로마 황제에 대항하는 왕권, 그리고 그에 따른 경의를 주장하는 것으로 왜곡될 수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산헤드린에 제기된 혐의는 신성 모독이었지만 총독에게 제기된 혐의는 소요죄였는데 그 역시 사형에 해당하였다.
역설적이게도 예수는 참으로 메시아이면서 동시에 유대인의 왕이셨다. 그러므로 신성 모독과 선동이라는 유죄 판결은 잘못된 것이었으며 도리어 그분은 경의와 경배를 받으셔야 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왕의 위엄으로 답하신다. “네가 그렇게 말하는도다”(막 15:2, 흠정역). 그의 답은 양면적이다. 그분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호칭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으신다. 이는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다른 종류의 왕이신 것을 암시한 것 같다(요 18:33~38).
마가복음 15:6은 유월절에 죄수를 석방하는 관습을 이야기에 도입한다. 마가복음 15:9에서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을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데, 빌라도는 역설적 의미에서 질문하였지만, 역설은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그에게 불리하게 전개된다.
마가복음 15:9, 10은 스스로 안다고 여기는 것과 실제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어서) 빌라도는 종교 지도자들이 시기심 때문에 예수를 넘겼다는 것을 알지만, 군중에게 물어봄으로써 실제로는 그들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종교 지도자들은 군중을 선동하여 예수의 십자가형을 요구한다. 빌라도는 반발한다. 십자가형은 너무나 끔찍한 것이었고, 특히 무죄로 여겨지는 사람이 당할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교도 총독은 메시아를 풀어주길 원하고 종교 지도자들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길 원하는 장면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역설인가.

<교훈> 그분은 왕이지만 다른 종류의 왕이심을 암시하였다. 질문 앞에 그분은 왕의 위엄으로 행하셨고 빌라도는 그를 구하기 위해 힘썼으나 유대인은 죽이려 했다.

<묵상> 유대인 그리고 지도자들이 빌라도에게 주었던 압박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압박과 어려움 가운데 우리는 어떤 실수를 하곤 합니까?

<적용> 압박감이 아무리 크더라도 군중을 따르지 않도록 당신을 지켜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옳은 일을 선택할 수 있습니까?

<영감의 교훈>
우유부단함이 초래한 폭동 – “아직도 빌라도는 그분을 구원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었다.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였다. 그러나 그분을 석방하겠다는 이 말이 백성들을 열 배나 광포하게 만들었다.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고 그들은 부르짖었다. 빌라도의 우유부단함이 초래한 폭풍우는 점점 거세만 갔다”(시대의 소망, 733).

<기도> 잘못된 결정으로 고민하고 어려움을 겪습니다. 환경과 다양한 어려움이 우리 가는 길을 흔들 때가 많습니다. 어떤 일에도 저희 마음을 온전하고 정직하게 지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믿음에서 벗어나지 않게 도와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