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4일 금요일 예수바라기] 죽음이 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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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욥 3:25, 26).

어찌하여

욥기 1, 2장은 산문이고, 3장부터 41장까지는 긴 운문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욥기의 첫 운율은 위로를 받지 못한 욥의 한탄입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지 않은 편이 좋았겠다고 말했습니다. 욥은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좋았겠다고 말하며, 괜히 모태의 문이 열려서 자신이 환난을 보게 되었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욥은 “어찌하여”(11, 12, 20절)을 반복하며 자신이 왜 이렇게 비참한 일을 겪어야 하는지 탄식하며 힘들어했습니다.

“어찌하여”는 시편에서 다윗이 여러 번 사용한 낱말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비통함이 그 말에 담겨 있습니다. 특히 시편 22편 1절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진술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말씀하신 내용이기도 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거기서는

욥기 3장은 “거기서는”(17, 18, 19절)이라는 낱말도 반복합니다. “어찌하여”가 욥 자신의 태어남을 저주하는 모습이라면, “거기서는”은 죽음이 오면 이런 아픔이 끝나고 쉼을 얻을 것이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욥은 “죽기를 바라도 오지”(21절) 않는데, 죽게 된다면 정말 기쁘겠다고 말했습니다.

죽음이 답일까?

태어나지 않는 것이, 혹은 죽는 것이 우리의 고통에 대한 해답일까요? 삶이 어렵고도 힘든 우리 현대인들은 사는 것보다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죽으면 아무 고통도 없이 평온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욥은 죽음을 구하였지만 죽음을 실행하지는 않았습니다. 힘들다고 해서 욥이 죽음을 실행했다면, 욥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세 친구와의 관계도 회복하지 못했을 것이고, 아내와 가정을 회복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대쟁투의 이야기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진정한 평온은 존재의 멈춤이 아니라, 존재의 회복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외치며 죽으심으로 우리의 진정한 생명의 회복을 이루셨습니다. 진정한 도피처는 나의 죽음이 아닌 주님의 죽으심에 있습니다.

기도) 주님의 죽으심에서 평온함을 얻는 저희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