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욥 26:6).
밑천이 드러나다
하나님을 팔아 정죄했던 빌닷에 대해 욥은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욥은 빌닷의 말대로 자신은 “힘 없는 자”, “기력 없는 팔”, “지혜 없는 자”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빌닷에게 그런 자신을 어떻게 대했느냐고 질문합니다. 연약한 자기를 “도와주었는가? 구원하여 주었는가? 제대로 가르쳤는가?”라고 공박하며 그저 “자기 지식만 자랑하지 않았는가?”라고 힐난합니다(2-3절). 그러면서 “정죄할 대상을 제대로 찾았는가? 그런 정죄의 정신이 어떻게 네게서 나올 수 있는가? 네가 온전한 정신인가?”라고 묻습니다(4절).
우리는 얕은 지식으로 남을 정죄할 때 우리 자신이 제정신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밑천이 하나님 앞에 드러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영들이 물 밑에서 떨며 물에서 사는 것들도 그러하도다 하나님 앞에서는 스올도 벗은 몸으로 드러나며 멸망도 가림이 없음이라”(5-6절). 우리가 정말 알지 못하는 죽음의 세계도 하나님 앞에 벗은 몸으로 아무런 가림이 없이 드러나는 날이 있을 것이기에, 우리는 함부로 남을 정죄하기보다는 그 시간에 자기 자신의 얕은 밑천을 돌아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도토리 키 재기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빌닷의 지식은 높은 곳과 광명 곧 하늘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욥은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은 ‘구름’이 있는 대기권은 물론 ‘바다’와 ‘하늘’에도 펼쳐져 있다고 욥은 고백합니다(5-13절).
그런데 욥은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의 ‘단편’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단편’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차’는 ‘테두리의 끝’을 의미합니다. 곧 욥은 5~13절에 언급된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의 매우 작은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욥은 자신의 지식이 빌닷의 것에 비해 훨씬 탁월함을 말하면서도 그 지식조차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백하며, 그런 적은 지식으로 함부로 남을 정죄하지 말라고 빌닷에게 대답했습니다.
사실, 우리끼리 누가 더 많이 알고 있느냐고 논쟁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도토리 키 재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에 심력을 소비하기보다 그 시간에 자신을 돌아보고, 다른 이를 이해하는 일에 주님이 간여해달라고 간구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기도) 다른 이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정한 지식을 자랑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