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3일 안식일 예수바라기] 하나님이 정말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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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출 7:3)

완악하게 해야 이적을 보일 수 있으신가? 본문을 읽으면 표징과 이적을 애굽 땅에게 많이 행하기 위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동안 많은 이적을 베푸신 것은 당시 사람들이 완악했기 때문인가요?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고향에서 사람들이 믿음이 없어서 많은 이적을 베풀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막 6:5, 6). 이것으로 보아 완악함과 많은 이적은 분명히 인과관계가 없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완악하게 하셨다면 하나님이 정말로 바로의 마음을 마음대로 완악하게 하셨다면 이는 반대로 마음대로 부드럽게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마음대로 완악하게 하고 부드럽게 하신다면 이 땅에 주님의 십자가는 전혀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구원 놀이라는 장난을 치시면 됩니다. 사랑하는 당신의 아들을 희생시킬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이 사람의 마음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정말로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표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출 7:13, 22)라고 두 번이나 기록합니다. 이 구절들은 바로의 마음 그 자체가 완악함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왜 그런 표현을 써서 우리를 피곤하게 할까요?

성경은 곳곳에 이런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3; 말 1:2). 하나님은 야곱도 사랑하시고 에서도 사랑하십니다. 이것은 그들의 선택이 그런 결과를 확실하게 했음을 강조하는 당시의 문학적 표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의 참뜻은 지금 바로 자신이 완악함을 선택하여 그 결과가 확실한 것이 마치 온 세상의 주권자인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만큼이나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즉 바로 자신은 자신에게 신(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오늘 제가 제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게 도우소서. 많은 기회에서 주님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