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이 그의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되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창 44:1)
보복하고 싶었을까? 요셉은 자기에게 온 형들을 보며 그가 꾼 꿈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로 용서하고 화해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시므온을 가둡니다. 베냐민을 데리고 형들이 다시 오자 이제 돌아가는 형제들 중 베냐민의 부대에 은잔을 넣어 피할 수 없는 누명을 씌웁니다. 억울하게 형들에게 죽을 뻔하고 팔린 요셉은 이제 너희도 당해봐라 하면서 보복하는 것일까요?
요셉은 보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총리가 된 다음에도 보디발과 그의 아내에게 보복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또 형제들에게 보복하려면 총리가 되자마자 가나안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충분히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는 그들을 바로 용서하지 않고 벗어날 수 없는 누명을 씌웠을까요?
요셉은 자신이 꾼 꿈을 기억합니다. 거기서는 모든 형제가 함께 합니다. 그는 지금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의 꿈대로 형제들도 하나가 될 수 있는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보디발의 집과 감옥과 궁전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이 형제들에게도 그 꿈이 성취되도록 함께 하셨는지를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자신을 변화시킨 하나님이 그 형제들도 변화시켰는지 알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본성은 바로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납니다.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요셉은 베냐민만 종이 되고 나머지 형제들은 평안히 가라고 말합니다. 드디어 선택의 순간이 왔습니다. 그때 유다가 형제를 대표해서 앞으로 나섭니다.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하나로 묶여 있다”(30절)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에게 자기 아이를 담보로 맡기며 죄짐을 지겠다고 한 약속을 말합니다.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하여 잡혀 있겠다고 말합니다.
제일 억울한 누명을 쓰신 분 예수님은 아버지와 생명이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이제 그분은 우리와 생명을 하나로 묶습니다. 자신이 우리의 담보가 되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짐을 지십니다. 온 우주에서 제일 억울한 누명을 쓰신 그분은 자신의 억울함을 푸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누명을 벗는 일보다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게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저희의 억울함에서 눈을 돌려 저와 생명을 함께 묶으신 주님을 바라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