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죽음과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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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러나 유일한 불멸의 존재이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속받은 자들에게 영생을 주실 것이다. 그 날이 되기까지는 죽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무의식 상태가 된다. 우리의 생명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부활한 의인들과 살아 있는 의인들은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공중으로 끌어올려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둘째 부활, 즉 불의한 자들의 부활은 1,000년 후에 있게 될 것이다.-기본 신조 26.

블레셋의 군대는 수넴으로 이동하여 진을 치고 이스라엘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사울의 마음은 전혀 낙관적이 아니었다. 그는 이스라엘 군대를 가까이에 있는 길보아 산에 주둔시켰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보증이 사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지도하여 그 원수를 두려움 없이 대항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섬기지 않고 돌아섰다. 그러므로 그 배반한 왕이 임박한 전쟁의 결과를 알기 위하여 하나님과 교신하고자 할 때, 하나님은 그와 교신하기를 거절하셨다.
미지의 다음날에 대한 불길한 공포는 사울을 무겁게 눌렀다. 사무엘이 여기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사무엘은 죽었으므로 더 이상 사울에게 조언할 수 없었다. 사무엘이 살아 있었다해도 그에게 조언할 수 있었을까?
그의 초기에 신접한 자를 쫓아낼 때 피해 간 한 영매자를 찾아내어 그 키 큰 왕은 이튿날의 전쟁의 결과에 대하여 물어보기 위하여 몸을 굽혔다. 그는,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고 요구하였다. 강신술을 걸어서 그 영매자는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이 신(영)은 속절없는 왕에게 이스라엘이 전쟁에 패할 뿐 아니라 그와 그의 아들들이 죽임을 당할 것을 알려주었다(사무엘상 28장 참조).
그 예언은 적중되었다. 그렇다면 예언한 것은 정말로 사무엘의 영이었던가? 하나님께 정죄 받은 한 영매자가 어떻게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의 영을 지배할 능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리고 사무엘은 어디에서 왔으며, 왜 그의 영은 “땅에서” 올라왔는가. 죽음은 사무엘에게 어떤 결과를 끼쳤는가? 사울에게 말한 것이 사무엘의 영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누구였던가? 성경이 죽음과 죽은 자와의 교신과 부활에 대한문제를 어떻게 말하는지 알아보자,

불멸성과 죽음
불멸성은 죽음에 굴하지 않는 상태나 특성이다. 성경의 번역자들은 헬라어 아다나시아(athanasia, 불사)와 아프타르시아(aphtharsia, 부패하지 않음)를 불멸성(immortality)이라고 번역했다. 이 개념이 하나님과 인간에게 어떻게 관련되는가?

불멸성. 성경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불멸이라고 알려준다(딤전 1:17). 사실상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딤전 6:16)다. 그분은 창조 받지 않으시고, 스스로 계시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시다(본서 2장 참조).
“성경은 어느 곳에도 사람이-혹은 그의 “영혼”(soul, 네페쉬)이나 “영”(spirit, 루아흐)이-천성적으로 불멸의 특성이나 상태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영혼'(네페쉬)과 ‘영'(루아흐)이라는 말이… 성경에 1,600회 이상 사용되고 있지만, “불사” 혹은 “불멸”이라는 낱말과는 결코 관련되어 있지 않다”(본서 7장 참조).*
하나님과는 달리 인간은 죽게 되어 있다. 성경은 그들의 생명을,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약 4:14)에 비유한다. 그들은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시 78:39)이다. 사람은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욥 14:2)한다.
하나님과 인간은 분명하게 구별된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인간은 유한하다. 하나님은 불멸하시고 인간은 죽는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인간은 무상하다.

조건적 불멸성. 창조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창조의 이야기는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받았다고 말한다(행 17:25, 28; 골 1:16, 17 참조). 이 사실을 근거로 생각하면 불멸은 인간이 타고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그들에게 자유 의지, 곧 선택의 능력을 주셨다. 그들은 순종할 수도 불순종할 수도 있었고, 그들의 계속적인 존재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한 계속적인 순종에 의존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불멸성의 선물을 소유하는 것은 조건적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이 선물이 박탈될 것이라는 조건을 자세하게 설명하셨다. 하나님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그들에게 경고하셨다.*

죽음: 죄의 삯. 불순종하면 죽음이 온다는 하나님의 경고와는 반대로 사단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후에 그들은 죄의 삯이 정말로 사망(롬 6:23)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죄는, 너희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너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는 선고를 받게 했다. 이 말은 생명의 계속을 가리키지 않고 생명의 단절을 가리킨다.
이 선고를 하신 후 하나님은 범죄한 부부가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차단시켜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 영생하”(창 3:22)지 못하게 하셨다. 그분의 행동은, 순종을 조건으로 약속된 불멸성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바 된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그들은 이제 죽을 수 밖에 없이 되었고, 죽음에 굴복하였다. 아담은 그가 더 이상 소유하지 못한 것을 물려줄 수 없었고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롬 5:12)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가 아담과 하와에게 즉각적인 죽음을 면하게 해주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그들은 다른 기회, 곧 두 번째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창세 때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 13:8, 영어 성경 참조)이셨다.

인간의 소망. 비록 사람들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태로 태어났을지라도 성경은 불멸성을 찾도록 그들에게 격려한다(롬 2:7 참조). 예수 그리스도는 이 불멸성의 근원이시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요일 5:11 참조). 그분은,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음성이 무덤을 열고 죽은 자를 부활시키실 것이라고 친히 말씀하셨다(요 5:28, 29).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으셨으면 인간의 상태는 절망적이었을 것이며 죽은 모든 사람은 영원히 멸망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으로 말미암아, 아무도 멸망할 필요가 없다.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죄의 형벌을 도말해 줄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 무한한 불멸의 선물을 보증해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딤후 1:10) 드러내셨다. 바울은, 성경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딤후 3:15)한다고 우리에게 보증한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불멸성을 받지 못할 것이다.

불멸성을 받음. 바울은 불멸성의 선물이 주어지는 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전 15:51-54). 이 말씀은, 하나님이 신자에게 죽을 때에 불멸을 주시지 않으시고 부활 때, 곧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준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일 때에 영생의 선물을 받는 것으로 요한이 지적하고 있는 반면(요일 5:11-13), 이 선물의 실제적 실현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이루어질 것이다. 오직 그 때에 가서야 우리는 죽음의 상태에서 불멸의 상태로, 썩을 몸에서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죽음의 본질
죽음이 생명의 중단이라면, 성경은 죽은 사람의 상태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성경의 교훈을 이해하는 것이 왜 요긴한가?

죽음은 잠자는 것임. 죽음은 완전한 절멸(絶滅)이 아니고, 그 사람이 부활을 기다리는 동안의 일시적인 무의식 상태에 불과하다. 성경은 이 상태를 거듭거듭 잠이라고 부른다.
구약 성경은, 다윗과 솔로몬과 이스라엘과 유다의 다른 왕들의 죽음에 관하여 말하면서 그들이 조상들과 함께 자는 것으로 묘사한다(왕상 2:10, 11:43, 14:20, 31, 15:8; 대하 21:1, 26:23). 욥은, 다윗(시 13:3)과 예레미야(렘 51:39, 57)와 다니엘(단 12:2)과 똑같이 죽음을 잠이라고 불렀다(욥 14:17-12).
신약 성경도 동일한 비유적 표현을 사용한다. 죽은 야이로의 딸의 상태를 묘사하면서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잔다고 말씀하셨다(마 9:24; 막 5:39). 그분은 죽은 나사로도 같은 표현으로 말씀하셨다(요 11:11-14). 마태는,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마 27:52)났다고 기록했고, 스데반의 순교를 기록하면서 누가는, 그가 “자니라”(행 7:60)고 했다. 바울과 베드로 역시 죽음을 잠이라고 불렀다(고전 15:51, 52; 살전 4:13-17; 벧후 3:4).
죽음을 잠이라고 한 성경의 표현은 다음의 증거들과 비교해 볼 때, 그 상태와 분명히 일치된다. 1. 죽은 자는 의식이 없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전 9:5). 2. 잘 때는 의식적 사고(意識的思考)가 중단된다. “그 호흡이 끊어지면…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시 146:4). 3. 잠은 일상의 모든 활동을 그치게 한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 4. 잠자는 자들은 깨어 있는 자들과, 그들의 활동에서 완전히 분리된다.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전 9:6). 5. 정상적인 잠은 정서적 활동을 그치게 한다.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지 오래니”(전 9:6). 6. 잘 때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니”(시 115:17). 7. 잠은 깨어날 것을 전제로 한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나오리라”(요 5:28, 29).*

사람이 흙으로 돌아감. 죽을 때에 사람에게 어떤 일이 생기는지 이해하려면 사람의 본질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아야 한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의 유기체(有機體)라고 한다(본서7장 참조). 때로는 성경이 전인적(全人的)인 사람을 나타내기 위하여 “영혼”(네페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애정과 정서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 말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분리된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몸과 영혼(네페쉬)은 오직 함께 존재한다. 그것들은 하나와 보이지 않는 연합을 이룬다.
인간을 창조할 때, 흙(땅의 요소)과 생기와의 연합이 산 사람, 혹은 영혼(네페쉬)을 만들었다. 아담은 하나의 분리된 단위로서의 영혼(네페쉬)을 받지 않고 생령이 되었다(창 2:7; 본서 7장 참조). 그리고 죽을 때에는 반대 현상이 생긴다. 곧 땅의 흙으로 이루어진 사람에게서 생기가 제거되면, 의식이 전혀 없는 죽은 사람 혹은 죽은 영혼(네페쉬)이 된다(시 146:4). 몸을 이루었던 요소는 본래 그대로 흙으로 돌아간다(창 3:19). 영혼(네페쉬)은 육체를 떠나서 의식적 존재로 남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죽을 때 영혼(네페쉬)이 하나의 의식적 존재로 생존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진실로 “범죄하는 그 영혼(네페쉬)은 죽”(겔 18:20)는다.

죽은 자의 거처. 구약 성경은 사람들이 죽을 때에 가는 곳을 스올(sheol, 히브리어)이라 하고, 신약 성경은 하데스(hades, 헬라어)라 한다. 성경에서는 스올이 가장 빈번히 무덤을 의미한다.* 하데스의 의미는 스올의 의미와 유사하다.*
죽은 자는 의인이나 악인을 막론하고 모두 이곳으로 간다. 야곱은, “내가… 음부(스올)에 내려…가리라”(창 37:35)고 말했다. 땅이 고라와 그의 일당들을 삼키고자 “입을” 열었을 때, 그들은 “산채로 음부(스올)에” (민 16:30) 내려갔다.
죽을 때 전체로서의 사람이 스올에 들어간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을 때 그분은 무덤(하데스)으로 내려가셨지만 부활 때에 그분의 혼은 무덤(하데스, 행 2:27, 31, 혹은 스올, 시 16:10)을 떠났다. 다윗이 치료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때, 그는 그의 혼이 “음부(스올)”(시 30’ 3)에서 구원받았다고 증언했다.
무덤은 의식이 있는 장소가 아니다.* 죽음이 하나의 잠이기 때문에 죽은 자는, 무덤(하데스)이 그 죽은 자를 내어주는(계 20:13) 부활 때까지 무의식 상태로 무덤 속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신(영, spirit)은 하나님께로 돌아감. 몸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신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솔로몬은 죽을 때에,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전 12:7)간다고 말했다. 이것은 의인과 악인을 막론하고 모두가 똑같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성경절이 죽은 후에도 사람의 본질은 계속 살아 있다는 증거를 제공해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경은, 신(영)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루아흐(ruach)와 헬라어 프뉴마(pneuma) 그 어느 것도 육체를 떠나서 의식적 존재가 될 수 있는 하나의 지성적 실체라고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 용어들은 “호흡”, 곧 개인의 생존에 필수적인 생명의 기운, 동물들과 인간을 갈리는 생명의 소인(素因)을 의미한다(본서 7장 참조).
솔로몬은 이렇게 기록했다.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난외주에는 ‘영’, 루아흐)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다 혼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루아흐)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루아흐)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 3:19-21). 그러므로 솔로몬에 의하면, 사람의 혼(루아흐)과 짐승의 혼(루아흐)과는 구분이 없다. [성경에는”spirit”(루아흐)과 “soul”(네페쉬)이 일관성 있게 번역되어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spirit”은 “영”으로, “soul”은 “혼”으로 번역된다. 성경에는 “soul”이 “영혼”으로 많이 번역되었고 “spirit”은 때때로 “혼”으로도 번역되었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필요시에는 번역된 용어 옆에 원어를 표기해 놓았다.-편집자 주] 혼(루아흐)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솔로몬의 말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나누어주신 생명의 소인을 가리킨다. 혼(루아흐) 혹은 호흡이 육체를 떠난 하나의 의식적 실체라는 뜻은 없다. 이 루아흐는, 하나님이 생명 없는 육체를 살리기 위하여 최초의 인간에게 불어넣으신 “생기”와 같다고 할 수 있다(창 2:7 참조).

성경 전체와의 조화. 죽음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포괄적으로 연구하지 않은 많은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이 부활할 때까지 계속되는 하나의 잠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영이나 영혼이 죽음 후에 의식적 실체를 가지고있다는 사상을 여러 성경절들이 지지한다고 단정해왔다. 그러나 주의깊이 연구해 보면 죽으면 의식 작용이 중단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임을 밝혀준다.*

강신술. 만일 죽은 자가 전혀 의식이 없다면 강신술의 영매들은 누구와, 혹은 무엇과 교통을 하는가? 모든 정직한 사람은, 최소한 이런 현상 중 어떤 것은 속이는 일임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른 것들이 있다. 강신술에는 어떤 초자연적 세력이 분명히 관련되어 있다. 성경은 이 점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가르치는가?
1. 강신술의 기초. 강신술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고 사단이 하와에게 한 최초의 거짓말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말은 영혼 불멸에 관한 최초의 설교였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모든 종류의 종교는 부지중에 이 오류를 반복한다.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 18:20)는 하나님의 선고가 “영혼이 비록 범죄했을지라도 영원히 살리라”는 말로 뒤집혀졌다.
이 본질적 불멸성에 대한 거짓 교리가 죽어도 의식이 있다는 신조를 갖게 했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이런 주장은 이 문제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과 정반대가 된다. 그것들은 큰 배교의 시대에 이교의 철학, 특히 플라톤의 철학에서 온 것으로,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혼합되었다(본서 12장 참조). 이런 신조들은 그리스도교 내에서 우세한 건해가 되었고, 오늘날도 지배적인 견해로서 계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죽은 자에게 의식이 있다는 믿음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신술을 받아들이게 했다. 만일 죽은 자가 살아서 하나님 앞에 있다면, 그들이 봉사하는 영으로서 세상으로 돌아오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그들에게 조언과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또한 불행을 피하거나 슬픔 중에 위로를 받기 위하여 그들과 교신하고자 시도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이런 이론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 사단과 그의 사자들(계 12:4, 9)은 그들의 기만을 관철시킬 교신의 통로를 마련했다. 강신술과 같은 수단을 통하여 그들은 사별한 사랑하는 자들로 가장하여 산 자들에게 가상적인 위로와 보증을 가져다 준다. 때로는 그들이 미래의 사건들을 예언하는데, 그것들이 그대로 이루어지면 사람들에게서 신임을 얻는다. 그리하여 그들이 주장하는 위험한 이단설들이 성경과 하나님의 율법과는 반대될지라도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인기를 얻는다. 악을 저항하는 방벽을 제거해 버리고, 사단은 마음대로 고삐를 쥐고 사람들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가 분명한 멸망에 빠지도록 이끌었다.
2. 강신술에 대한 경고. 아무도 강신술에 의하여 기만당할 필요는 없다. 성경은 그 주장이 거짓임을 분명히 밝혀준다. 성경은,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무의식 상태로 무덤 속에 누워있다고 우리에게 말해 준다.
성경은 또한 죽은 자나 영계와 더불어 교통하고자 하는 어떤 시도도 강력히 금지한다. 성경은, 강신술의 영매들이 오늘날 하는 것처럼 죽은 자들과 교신하노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사실상 악령과 “신접한 자들”로 더불어 교신하고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레 19:31, 20:27; 신 18:10, 11 참조).
이사야는 강신술의 어리석음을 잘 나타냈다.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사 8:19, 20). 진실로, 오직 성경만이 이 무서운 기만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다.
3. 강신술의 현현. 성경은, 바로의 술객들과 니느웨와 바벨론의 박수와 점성술사와 술객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박수와 영매자들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강신술의 활동에 대해 기록하고있다. 한 가지 예는, 이 장(章)의 서두에서 언급한 사울이 찾아간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다.
성경은,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삼상 28:6)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엔돌에서 일어난 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시다. 사울은 죽은 사무엘로 가장한 마귀에게 기만당하였다. 그는 진짜 사무엘을 본 것이 결코 아니다. 그 술사는, 사울이 사무엘인 줄로 안, 혹은 사무엘일 것이라고 단정한 한 노인의 형상을 보았다(14절).
만일 우리가 그 유령을 정말로 사무엘이라고 믿어야 한다면 우리는 점장이, 마술사, 무당, 마법사, 강신술자, 영매 등이 의인이 죽을 때에 간 곳에서 죽은 의인들을 불러낼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경건한 사무엘이 땅속에서도 의식이 있는 상태로 존재해 있었다는 것을 수락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노인은 “땅에서”(13절) 올라왔기 때문이다.
이 강신(降神)은 사울에게 희망이 아닌 절망을 가져왔다. 이튿날 그는 자살을 했다(삼상 31:4). 그러나 이른바 사무엘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다(삼상 28:19). 만일 그의 예언이 옳았다면 우리는, 죽은 후에 불순종한 사울과 의로운 사무엘이 함께 거하였다고 결론을 지어야 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악한 천사가 이 강신술을 통하여 기만적 장면들을 연출했다고 결론짓는 것이 타당하다.
4. 최후의 기만. 과거에는 강신술의 현현이 신비로운 영교(靈交)의 영역에 국한되었었다. 그러나 더욱 최근에 강신술이 그리스도교의 모양을 갖추게 되었으므로 그리스도교계를 기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와 성경을 받아들이노라고 공언함으로써 강신술은 신자들에게 극히 위험한 원수가 되었다. 그 영향은 미묘하고 기만적이다. 강신술의 영향을 통하여 “성경은 변화되지 않은 마음을 즐겁게 하는 그런 방법으로 풀이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엄숙하고 주요한 진리들은 효력을 나타내지 못한다. 사링은 하나님의 주요한 속성으로 강조되지만, 그것은 선과 악을 거의 구분하지 못하는 하나의 연약한 감상주의(感傷主義)로 전락되었다. 하나님의 공의, 죄에 대한 그분의 경고, 그분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 등은 모두 간과된다. 사람들은, 십계명을 하나의 죽은 문자로 취급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마음을 즐겁게 하는, 매혹적인 우화들이 감각을 사로잡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믿음의 기초가 되는 성경을 거절하게 한다.”*
이 수단들을 통하여 정(正)과 사(邪)는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 되고 각 사람이나 상황이나 문화가 무엇이 “진리”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사실상 각 사람이 신(神)이 되고,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 3:5)라고 한 사단의 약속을 성취시킨다.
우리 앞에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계 3:10)가 놓여있다. 사단은 세상을 속이기 위하여 마지막 노력을 함에 있어서 기사와 이적을 사용하고자 한다. 이 노련한 기만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요한은 말했다.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계 16:13, 14, 13:13, 14 참조).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고 성경의 진리로 마음을 무장하고 그것을 그들의 유일한 권위로 받아들이는 자들만이 그 기만을 피하게 될 것이다.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은 보호의 길을 잃고 이 기만에 휩쓸려 갈 것이다.

첫 죽음과 둘째 죽음. 둘째 죽음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 곧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마지막 형벌이며, 그것은1,000년기 끝에 있다(본서 26장 참조). 이 죽음에는 부활이 없다. 사단과 불의한 자들의 멸망과 함께 죄는 사라지고 죽음 자체도 없어진다(고전 15:26; 계 20:14, 21:8).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 2:11)고 보증하셨다.
성경이 둘째 사망을 지적한 것에 근거하여 첫 째 사망은, 승천 한 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아담이 범죄한 결과로서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타락적인 죄의 영향을 받은 인간성에 나타나는 자연적 결과”이다.*

부활
부활은, “죽음 다음에 있는, 완전한 개체와 개성을 지닌 생령의 회복”이다.* 인간은 죽게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이 무덤 저편에 있는 생명을 경험하려면 부활이 있어야 한다.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종들은 부활의 소망을 표현하였다(욥 14:13-15, 19:25-29; 시 49:15, 73:24; 사 26:19; 고전 15장).
우리가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부활의 소망은, 죽음이 모든 사람의 운명으로 되어 있는 이 현실 세계 저편에서 더 좋은 미래를 누릴 수 있다는 용기를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

그리스도의 부활. 죽은 자들을 최종적으로 일으키실 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시기 때문에 죽은 의인들이 불멸성으로 부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밀접히 관련된다(요 5:28, 29).
1. 그리스도의 부활의 중요성.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 바울은 그 결과를 이렇게 요약한다. 1)복음의 전파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고전 15:14). 2) 죄의 용서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7절). 3) 예수님을 믿는 목적도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고전 17절). 4)죽음에서 일어나는 일반적 부활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12절). 5) 죽음 저편에는 소망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17, 18절).
2. 육체적 부활. 무덤에서 나오신 그리스도는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계셨던 동일한 예수님이셨다. 이제 그분은 육체를 소유하고 계셨는데 그것은 여전히 실제적 육체였다. 그 육체는 너무도 실제적인 육체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 차이를 조금도 발견하지 못했다(눅 24:13-27; 요 20:14-18).*
예수님은 당신이 어떤 유의 영이나 유령이 아니라고 직접 부인하셨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그분은,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 그분의 부활의 육체적 실체를 입증하기 위하여 그분은 또한 그들 앞에서 음식을 잡수셨다(43절).
3.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향. 그리스도의 부활로 그의 제자들은 자극을 받고 분기되고 불이 붙었다. 그것은 약하고 겁에 질린 일단의 사람들을 용감한 사도로 변화시켜서 그들의 주님을 위하여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주었다(빌 3:10, 11; 행 4:33), 그 결과로 그들이 담당한 사명은 로마 제국을 진동시키고 온 세계를 뒤집어놓았다(행 17:6).
“복음 전파에 핵심과 능력을 준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이었다(빌 3:10, 11).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산 소망이 있게 하'(벧전 1:3)심에 대하여 말한다. 사도들은 그들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행 1:22)으로 임명되었다고 생각했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은 구약의 메시야적 예언에 근거된 것이었다(행 2:31). 그들의 증거에 ‘큰 권능’을 준 것은 ‘주 예수의 부활'(행 4:33)에 대한 개인적 지식이었다. 사도들이 나가서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2절)를 전할 때 그들은 유대 지도자들의 반대를 받았다. 산헤드린 앞에 소환되었을 때, 바울은 그가 ‘심문을 받’은 것은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행 23:6, 24:21). 로마인들에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롬 1:4)다고 편지를 썼다. 침례를 받을 때, 그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롬 6:4, 5).*

두 가지 부활. 그리스도께서는 두 가지의 일반적 부활, 곧 의인들에게 해당되는 “생명의 부활”과 악인들에게 해당되는 “심판의 부활”이 있다고 가르치셨다(요 5:28, 29; 행 24:15). 이 두 부활 사이에는 1,000년 간의 기간이 있다(계 20:4, 5).
1. 생명의 부활.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다”고 불리어진다(계 20:6). 그들은 천년기 끝에 불못에서 둘째 사망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14절). 생명과 불멸성을 입는 이 부활(요 5:29; 고전 15:52, 53)은 재림의 때에 이루어진다(고전 15:22, 23; 살전 4:15-18). 그것을 경험하는 자들은 더 이상 죽지 않을 것이다(눅 20:36). 그들은 영원히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부활한 육체는 무엇과 같을 것인가? 그리스도처럼, 부활한 성도들은 실제적인 육체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된 분으로 일어나신 것처럼 의인들도 그러할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 :21)고 말하였다. 그는 영광스럽게 변화되지 못한 몸과 영광스럽게 변화된 몸을 각각 “육신적인 몸”과 “영적인 몸”이 라고 부르는데, 전자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썩을 몸이고 후자는 불멸하고 죽지 않을 몸이다.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불멸의 것으로 바뀌어지는 일은 부활시에 순간적으로 이루어진다(고전 15:42-54 참조).
2. 심판의 부활. 불의한 자들은 1,000년 끝에 있는 둘째 부활에 일어난다(본서 26장 참조). 이 부활은 마지막 심판과 정죄에 앞서 있다(요 5:29). 이름이 생명 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은 이 때에 부활하여 “불못에 던”져져서 둘째 사망을 경험한다(계 20:14, 15).
그들은 이 비참한 결과를 피할 수도 있었다. 분명한 음성으로 성경은 피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을 제시한다.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갈지니라”(겔 18:30-32).
그리스도께서는,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 2:11)고 약속하신다. 예수님과 그분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그분께서 영광스럽게 돌아오실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경험할 것이다. 그들은 결코 쇠하지 않을 행복을 누리며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요 구주이신 분과 함께 지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