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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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하나님이 계신다: 성부, 성자, 성령 곧 동일하게 영원하신 세 신격의 통일체 하나님은 불멸이시고, 전지 전능하시고, 만유 위에 계시고, 항상 존재하신다. 그분은 무한하시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분이시면서도 그분의 자기 계시를 통해 알려지신다. 그분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영원히 경배와 숭배와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기본 신조, 2.

갈바리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거절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예수님이 사실상 누구이셨는지를 알아차렸다. 그들 중에는 그분을 주님이라고 불렀던 죽어가는 강도가 있었고(눅 23:42),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 15:39)라고 말했던 로마 군인이 있었다.
요한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요 1:11)다고 기록했을 때 십자가 주위의 무리나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으며, 각 세대를 포함했던 것이다.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인간이 갈바리에서 떠들어댔던 무리들처럼 예수님 안에서 그들의 하나님과 구주를 알아보는 일에 실패했다. 인간 최대의 비극인 이런 실패는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지식이 심각하게 결핍되어 있음을 증거한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
하나님을 설명하고자 하는 수많은 이론들과 그분의 존재에 대한 수많은 찬반 논리들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지혜로는 신성을 꿰뚫어 볼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지혜만을 의지하여 하나님에 관해 알고자 하는 것은 별자리를 연구하기 위하여 확대경을 사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지혜는 “감취었던 것”(고전 2:7)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비밀이다. 바울은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고 기록했다.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계명 중 하나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마 22:37; 신 6:5, 참조), 우리는 아는 바가 전혀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찾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깊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욥 11:7).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창조주를 알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가?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인간의 궁지를 아시는 하나님은 사랑과 동정으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알리셨다.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탐구한 것에 관한 기록이 아니라, 당신 자신과 당신의 목적들을 인간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계시의 산물”*이라는 점을 성경은 밝혀준다. 이러한 자기계시는 반역적인 세상과 돌보시며 염려하시는 하나님 사이의 구렁 위로 다리를 놓기위해 계획된 것이다.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사랑은 그의 최고의 계시인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표현되었다. 예수를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를 알 수 있다. 요한의 말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하”(요일 5:20)셨다.
또한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좋은 소식이다. 비록 하나님을 완전하게 아는 것이 불가능하긴 하나, 성경은 우리가 그분과 더불어 구원의 관계속으로 들어가기에 충분한 그분에 관한 실제적 지식을 제공해 준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는 법. 다른 지식과는 달리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두뇌에 관계된 것인 만큼 마음과도 관계된 일이다. 이것은 지성만이 아닌 전 인격을 포함하고 있다. 성령께 마음을 열어 놓아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요 7:17; 마 11:27, 참조).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마 5:8)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불신자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바울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상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0, 21).
성경으로부터 하나님 알기를 배우는 방법은 지식을 얻는 다른 모든 방법들과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 위에 우리 자신을 세워 놓을 수 없으며, 하나님을 분석하거나 측량할 수 있는 것처럼 취급할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탐구할 때에 우리는 그분의 자기 계시인 성경의 권위에 복종해야만 한다. 성경은 그 자체가 해석자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 제시하는 원칙들과 방법들에 대해 우리 자신을 굴복시켜야 한다. 이러한 성경의 지침이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예수님 시대의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파악하는 일에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성경을 통한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굴복시키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별을 그릇되게 해석하고 그들의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들의 문제는 지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지성을 어둡게 만들고 영원한 멸망을 초래한 것은 그들의 닫힌 마음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제공하는 두 가지 주요한 자료가 있다. 그것은 천연계와 성경이다.

천연계의 증거.천연계의 증거. 모든 사람은 천연계와 인간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에 관해 배울 수 있다. 다윗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라고 기록했다. 요한은 천연계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계시가 각 사람을 계몽시킨다고 주장했다(요 1:9). 그리고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 1:20)라고 선언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동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제시한다.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한 아테네 사람들의 경배 가운데서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증거를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3). 바울은 또한 비그리스도교인의 행동이 “그(들의) 양심”의 증거를 드러내며 하나님의 율법이 “마음에 새”(롬 2:14, 15)겨져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이러한 직관은 성경을 전혀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에 관한 이러한 일반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수많은 고전적인 이성적 논증들을 불러일으켰다.*

성경의 증거.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지 않는다. 성경은 그것을 당연한 일로 치고있다. 성경의 첫 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고 선언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창조주, 유지자, 모든 피조물의 통치자로 묘사하고 있다. 창조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너무 강력하여 무신론은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무신론은 신적 진리를 억압하거나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증거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마음에서 발생하는 것이다(시 14:1; 롬 1:18-22, 28).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발견하고자 진지하게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확신시켜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증거들이 충분하게 있다. 그러나 믿음이 선행 조건이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히 11:6)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것은 맹목적이 아니다. 이것은 성경과 천연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에서 발견되는 충분한 증거 위에 기초되어 있다.

성경의 하나님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 활동, 속성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본질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 성경이 기록될 당시 이름은 중요한 것이었는데, 근동 지방과 동양에서는 아직까지도 그러하다. 그 곳에서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성격, 본성, 신원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분의 본성, 성품과 신분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7)는 명령 속에 드러나 있다.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다.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시 7:17)하라.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심이로다”(시 148:13).
히브리 이름인 엘(El)과 엘로힘(Elohim, “하나님”)은 하나님의 신적 능력을 나타낸다. 이것은 강하고 힘센 분, 창조의 하나님(창 1:1; 출 20:2; 단 9:4)으로 그분을 묘사한다. 엘룐(Elyon, “지극히 높으신 분”, “Most High”)과 엘 엘룐(El Elyon,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God Most High”)은 그의 높으신 지위에 초점을 맞추고있다(창 14:18-20; 사 14:14). 아도나이(Adonai, “주”)는 전능하신 통치자로 하나님을 묘사한다(사 6:1; 시 35:23). 이러한 이름들은 하나님의 위엄 있고 초월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다른 이름들은 백성들과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자발성을 계시한다. 샤다이(Shaddai, “전능한 분”, “Almighty”)와 엘 샤다이(ElShaddai, “전능의 하나님”, “God Almighty”)는 축복과 안위의 근원이신 전능한 하나님을 나타낸다(출 6:3; 시 91:1). 여호와(Jehovah)로 번역된 야훼(Yahweh)*라는 호칭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과 은총을 강조한다(출 15:2, 3; 호 12:5, 6).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야훼는 당신 자신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 혹은 “나는 스스로 될 자”(I shall be what I shall be)로 기술함으로써 당신의 백성과의 변함 없는 관계를 지적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부르시며(출 4:22; 신 32:19 참조), 때때로 “아버지”라는 칭호를 통해 더욱 친근한 관계로 나타내신다(신 32:6; 사 63:16; 렘 31:9, 말 2:10).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들은 구약의 것들과 의미가 같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더욱 가깝고도 개인적인 관계를 갖도록 아버지를 사용하셨다(마 6:9; 막 14:36; 롬 8:15; 갈 4:6 참조).

하나님의 활동. 성경 기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보다는 그분의 활동을 기술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썼다. 하나님은 창조주(창 1:1; 시 24:1, 2), 세상을 붙드시는 분(히 1:3), 구속자와 구주(신 5:6; 고후 5:19)로서 인류의 궁극적인 운명을 책임지신 분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분은 계획하시고(사 46:11), 예고하시고(사 46:10), 약속하신다(신 15:6; 벧후 3:9). 그분은 죄를 용서하시며(출 34:7), 따라서 우리에게 경배를 받아야 할 분이시다(계 14:6, 7), 궁극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을 통치자, 즉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딤전 1:17)으로 계시한다. 그분의 행동은 그분이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증한다.

하나님의 속성들. 성경 기자들은 하나님의 신적 속성들에 관하여 증거함으로써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부가적으로 가르쳐주고 있다. 나누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들은 피조물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당신의 신적 본성의 측면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존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당신 안에 생명”(요 5:26)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의지(엡 1:5)와 능력(시 115:3)에 있어서 독자적이시다. 그분은 전지하셔서 모든 것을 아신다(욥 37:16; 시 139:1-18, 147:5; 요일 3:20). 왜냐하면 알파와 오메가로서(계 1:8) 그분은 처음부터 종말을 아시기 때문이다(사 46:9-11).
하나님은 편재(偏在)하시며(시 139:7-12; 히 4:13), 모든 공간을 초월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모든 공간에 충만하게 임재하신다. 하나님은 영원하셔서(시 90:2; 계 1:8) 시간의 제한을 초월하신다. 그러면서도 매 순간마다 충만하게 임재하신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그분께 불가능한 것은 전혀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분께서 목적하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이루실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단 4:17, 25:35; 마 19:26; 계 19:6). 그분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불변하신다. 그분은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라고 말씀하신다(말 3:6; 시 33:11; 약 1:17 참조). 이러한 속성들은 하나님의 고유 속성이기 때문에 이것들은 나누어 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누어줄 수 있는 속성들은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의 관심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이것들로는 사랑(롬 5:8), 은혜(롬 3:24), 긍휼(시 145:9), 인내(벧후 3:15, NIV), 거룩함(시 99:9), 의(스 9:15; 요 17:25), 공의(계 22:12), 진리(요일 5:20)가 있다. 이러한 은사들은 그것들을 주시는 분 자신과 더불어서만 이르러 온다.

하나님의 주권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을 명백하게 가르친다. “그는 자기 뜻대고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할 자가 없도다”(단 4:35).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1).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시 135:6). 그러므로 솔로몬은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고 말할 수 있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하고서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행 18:21; 롬 15:32 참조)고 기록하였으며, 한편 야고보는 “당신들은 만일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약 4:15, 공동번역)라고 권면했다.

예정과 인간의 자유. 성경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온전히 주관하고 계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미리 정하셨”다(롬 8:29, 30). 또한 당신의 자녀로 입양되도록, 기업을 얻도록 미리 정하셨다(엡 1:4, 5, 11). 이러한 주권은 인간의 자유에 대해 무엇을 의미하는가?
동사 예정하다(to predestinate)는 “미리 결정한다”는 뜻이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성경절들이 인간 자신의 선택 여하에 관계없이 어떤 이는 구원을 받도록, 어떤 이는 멸망을 받도록 하나님이 독단적으로 선택하신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성경절들의 문맥을 연구하게 되면, 하나님이 변덕스럽게 어떤 사람을 배제시키는 것에 대해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
이런 성경절들의 원 취지는 포괄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고 성경은 명백하게 기술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벧후 3:9)신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멸망받도록 명하셨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그러한 것을 명하셨다면 갈바리를 부정하는 것인 바, 갈바리에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는 구절 속의 “믿는 자마다”란 말씀은 어떤 사람이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끊임없이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들을 제시하시며 죄인들로 하여금 순종과 생명을 선택하도록 강권하신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신 30:19; 수 24:15; 사 1:16, 20; 계 22:17) 인간의 자유 의지가 개인적 운명을 결정짓는 요소임이 자명하다. 한때 은혜를 맛보았던 신자라 할지라도 타락하여 멸망에 처해진다는 사실로부터(고전 9:27; 갈 5:4; 히 6:4-6, 10:29)도 이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각 개인이 어떻게 선택할지를 미리 보실 수 있으시다. 그러나 그분의 예지(豫知)가 그 선택이 어떻게 되도록 결정하지 않는다. 성경의 예정은, 그리스도를 믿기로 선택하는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도록 되어 있는, 아직도 유효한 하나님의 효과적인 목적 속에 존재한다(요 1:12; 엡 1:4-10).”*
그렇다면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말하는 성경절(롬 9:13)과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는 말씀(17, 18, 15, 16절 참조; 출 9:16, 4:21)은 무슨 뜻인가? 본문 말씀의 문맥은 바울의 관심이 선교였지 구원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원은 누구나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별한 일을 위하여 특정인들을 선택하신다.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는 야곱과 에서에게 똑같이 제공되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의 기별을 세상에 전파하는 계보로서 에서가 아닌 야곱을 택하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교 전략에 있어서 주권을 행사하신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것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허용하신 것을 당신이 행하신 것으로 돌리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호소에 대한 바로의 부정적 반응은 하나님께서 그의 선택의 자유를 존중해 주셨다는 것을 사실상 증거하는 것이다.

예지와 인간의 자유. 어떤 이들은, 인간이 선택을 할 때까지 하나님은 그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모른 채 인간과 관계하신다고 믿는다. 또한 하나님은 재림, 천년기, 지구의 회복 등과 같은 특정 미래를 아시지만 누가 구원을 받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신다고 믿는다. 그들은 만일 하나님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아신다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역동적 관계가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시초부터 종말을 안다면 하나님이 따분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개인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하나님이 아신다고 해도 그들이 실제로 행하기로 선택하는 것을 간섭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역사학자가 과거의 인물들이 행했던 것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행동에 관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사진기가 장면은 녹화하지만 그것을 변동시키지는 못하는 것처럼, 예지는 미래를 변경시킴 없이 그것을 직시한다. 하나님의 예지는 결단코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

하나님 내부의 역동성
오직 한 하나님만 계시는가? 그리스도와 성령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의 유일성. 주변 이교국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믿었다(신 4:35, 6:4; 사 45:5; 슥 14:9). 신약 성경도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하여 동일하게 강조하고 있다(막 12:29-32; 요 17:3; 고전 8:4-6; 엡 4:4-6; 딤전 2:5). 이러한 유일신론적 강조는 그리스도교의 삼위 일체 개념(성부, 성자, 성령)과 모순되지 않는다. 도리어 이것은 여러 종류의 신들을 모시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증언한다.

하나님 내부의 복수성. 비록 구약이 하나님이 삼위 일체이심을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지는 않으나, 구약은 하나님 내부의 복수성을 시사한다. 때때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신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창 3:22), “우리가 내려가서”(창 11:7). 때때로 여호와의 사자가 하나님과 동일시되고 있다. 여호와의 사자가 모세에게 나타나서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고 말하였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신과 하나님을 구별하고 있다. 창조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 하시”(창 1:2)었다. 어떤 구절은 성령을 언급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사업에 셋째 위격을 포함시키고 있다. “이제는 주 여호와 [아버지]께서 나 [하나님의 아들]와 그 신[성령]을 보내셨느니라”(사 48:16), “내[아버지]가 나의 신을 그[메시야]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사 42:1).

하나님 내부의 관계. 그리스도의 초림을 통해 우리는 삼위 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많은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요한의 복음서는 하나님은 독특하고 신비스러운 관계를 지닌 삼위의 영원한 신격의 연합체이신 아버지 하나님(본서 3장)과 아들 하나님(4장)과 성령 하나님(5장)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밝혀준다.
1. 사랑의 관계. 예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 15:4)라고 외치셨을 때, 주님은 죄가 야기한 아버지로부터의 분리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계셨다. 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원래적 관계를 파괴하였다(창 3:6-10; 사 59:2). 죄를 전혀 알지도 못하시는 예수님이 당신의 마지막 시간에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다. 우리의 죄를 취하시고 우리의 위치를 대신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운명이었던 하나님과의 분리를 체험하셨으며, 마침내 죽으셨다.
죄인들은 삼위 일체 하나님께 예수님의 사망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영원 전부터 그분은 당신의 아버지와 성령으로 더불어 함께 계셨다. 이분들은 상호간에 전적으로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 속에서 동일하게 영원성을 지니신 채 공존하셨다. 그토록 오랫동안 함께 있는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내부에 존재했던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사랑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는 말씀은 삼위의 각 분께서 전적으로 다른 분을 위해 사셨기 때문에 모두 다 완전한 만족과 행복을 체험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에 정의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오래 참음이나 인내와 같은 자질들이, 완전한 사랑의 관계를 지닌 분이신 삼위 하나님 내부에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한다. 인내는 반란을 일으킨 천사들을 다룰 때 처음으로 필요했으며, 후에는 곁길로 나간 인간들을 취급하실 때 필요하였다.
삼위 일체 하나님의 위격 사이에는 전혀 간격이 없다. 삼위 모두가 신성이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들의 신적 능력과 자질들을 공유하신다. 인간의 조직체에서 최종적 권위는 한사람 즉 대통령, 왕, 혹은 수상에게 있다.
하나님의 내부에서 최종적 권위는 삼위 모두에게 있다.
하나님은 개체에 있어서는 하나가 아니시지만 목적, 정신, 품성에 있어서는 하나이시다. 이같은 단일성이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된 개성을 말살시키지 않는다. 또한 신성 안에 존재하는 개체의 독립성이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시라는 성경의 유일신론적 주장을 파괴하지도 않는다.
2. 활동상의 관계. 하나님 내부에는 기능상의 경제성이 존재한다. 하나님은 불필요하게 중복해서 일하시지 않는다. 질서는 하늘의 첫번째 법칙이므로 하나님은 질서 있게 활동하신다. 이러한 질서는 신성 내부의 연합에서 나오며 신성 내의 연합을 보존한다. 성부는 근원으로, 성자는 중보자로, 성령은 실행자 혹은 적용자로 행동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성육신은 신성의 삼위께서 가지고 계신 활동상의 관계를 훌륭하게 보여주셨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을 주셨으며,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을 주셨고, 성령은 예수님이 태어나도록 하셨다(요 3:16; 마 1:18, 20).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증언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신비적 사건 속에서 세 분 모두의 활동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
신성의 각 위께서는 그리스도의 침례시에 임재하셨다. 아버지는 격려하셨고(마 3:17),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본으로서 침례를 받으셨고(마 3:13-15), 성령은 예수님께 능력을 주시기위하여 당신 자신을 주셨다.(눅 3:21, 22).
예수님은 지상 생애 말기에 조언자와 조력자로서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셨다(요 14:16). 여러 시간 후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당신의 아버지를 향해 외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구속의 역사가 절정에 달하였던 때에 성부, 성자, 성령은 모두 등장하셨다.
오늘날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접근하신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것이요”(요 15:26)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와 아들은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하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신다. 삼위 일체 하나님의 간절한 염원은 각인에게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알려 주시는 것과(요 17:3) 예수님의 임재를 실제화하는 것이다(마 28:20; 히 13:5 참조). 신자들은 구원을 위하여 선택을 받았다. 베드로는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벧전 1:2)라고 말한다.
사도의 축도 중에는 삼위 하나님 모든 분이 포함되어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그리스도가 맨 첫머리에 나와 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접촉은 과거에도 현재도 인간이 되신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비록 성삼위 일체 모든 분께서 구원하시기 위해 함께 일하셨지만 오직 예수님만 인간으로 사셨고, 인간으로 죽으셨으며,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요 6:47; 마 1:21; 행 4:12).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후 5:19)었으므로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주라 부를 수 있다(딛 3:4참조). 왜냐하면 그분은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이다(엡 5:23; 빌 3:20; 딛 3:6 참조).
기능상의 경제성에 입각하여 삼위 하나님 그분께서는 인간을 구원하는 일에 각기 다른 과업을 수행하신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희생의 충분함 위에 그 어느 것도 추가하지 않으신다.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내재케 됨으로 십자가에서의 객관적인 대속 사업이 주관적으로 적용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골 1:27)에 대해 말하였다.

구원에 초점
초대 교회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풀었다(마 28:19).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목적이 나타난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였기 때문에 성경은 그분께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분은 구약에 제사와 절기들 속에 예표된 소망이시다. 그분은 복음서에서 무대 중앙을 차지하고 계신 분이다. 그분은 제자들이 설교와 책들을 통해 복된 소망으로 선포한 복음이시다. 구약은 그분의 오심을 고대한다. 신약은 그분의 초림을 기록하며, 그분의 다시 오심을 고대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이신 그리스도는 이렇게 우리를 하나님께 연합시킨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시다. 복음은 어떤 행사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한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복음은 단지 규범들의 준수가 아니라 관계성을 중시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는 곧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모든 진리와 생명을 위한 핵심과 내용과 배경을 발견한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된다. 그 고통의 도구 위에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사랑을 쏟으셨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고난과 공허로 가득 찬 우리 심령에 채워진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물과 우리의 대속물로서 그 곳에 매어 달리셨다. 갈바리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시고자 땅의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오셨다. 그러나 이곳이야말로 우리가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다. 우리가 갈바리로 갈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지점까지 올라간 것이다.
십자가에서 삼위일체께서는 이타심을 완전히 드러내 보이셨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완전하게 보았다. 그리스도는 인류를 위해 죽고자 인간이 되셨다. 그분은 자아의 존재보다도 자아의 부정을 더욱 가치 있게 여기셨다. 그곳에서 그리스도는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고전 1:30)이 되셨다. 우리가 가지고 있거나 가지게 될 가치와 의미가 그 어떤 것이든지 그 모든 것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분의 희생에서 기인할 것이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십자가의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구원하시는 능력을 우주에 드러내셨다. 그분은 반역한 지구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 때문에 분리의 고뇌를 자원하여 통과하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계시하셨다. 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사랑의 초청을 선포하신다. 화해하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