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6일 수요일 예수바라기] 시온 산에 선 144,000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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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계 14:3)

계시록 7장에 144,000인이 처음 등장하는데, 그때는 하나님의 인을 받는 자들로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서는 이미 시온 산에 서 있는, 즉 구원받은 자들로서 144,000인을 소개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144,000인에 들기를 희망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144,000인은 상징적인 숫자이고, 살아서 구원받을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 얻을 사람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다행인 건, 144,000인은 모두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완벽한 사람은 아닙니다. 여기에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간략하게 묘사했습니다. 첫째로 그들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앞 장에서는(13장)땅에서 나온 어린 양 같은 짐승이 짐승의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에게 절하게 하고, 그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데, 그 짐승의 표는 짐승의 이름이나 짐승의 수라고 하는 예언이 나옵니다(13:17-18). 하나님의 이름과 어린 양의 이름은 짐승의 이름과 대비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름은 사람의 품성을 나타내지요. 하나님의 이름, 어린 양의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품성을 가진 것을, 짐승의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짐승의 품성을 가졌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짐승의 품성은 어떤 것일까요? 어떤 짐승입니까? 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짐승은 사자, 곰, 표범, 무서운 짐승과 같은 맹수들이고, 나중에 나온 어린 양 같은 짐승도 결국에는 겉만 어린 양일 뿐 그 내면에는 맹수의 성질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49편에는 짐승이 두 번 등장합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12절)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20절). 여기서 시인이 말하려는 속뜻은 무엇일까요? 인간이 매우 존귀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8편에서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4, 5절)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우리가 존귀한 건, 하나님을 닮은 존재,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존귀를 깨닫지 못할 때 우리는 짐승과 다름없는 존재로 전락하지요.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품성이며, 하나님의 품성을 반영하는 사람이 144,000입니다.

* 컨텐츠 제공 : 월간 예수바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