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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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예수께서는 악의 세력에 대해 승리하셨다. 지상에서 봉사하시는 동안 귀신의 영들을 진압하신 분께서는 그들의 능력을 깨뜨리시고 그들의 궁극적인 파멸을 확실하게 하셨다. 예수의 승리는 평화, 기쁨 그리고 그분의 사랑에 대한 확신 가운데 그분과 동행하는 우리에게 아직도 우리를 통제하려고 하는 악한 세력에 대한 승리를 준다. 지금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거하시며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우리의 구주이시며 주님이신 예수께 계속하여 우리를 위탁할 때, 우리는 과거의 행위의 짐에서 벗어난다. 우리는 더 이상 어둠, 악의 세력을 두려워 함, 무지 그리고 이전의 삶의 방식의 무의미함 속에서 살지 않는다. 예수 안에 있는 이 새로운 자유 안에서 우리는 매일 기도를 통해 그분과 교제하며 그분의 말씀을 먹으며 그 말씀과 그분의 섭리를 명상하며 그분을 찬양하며 예배를 위해 함께 모이며 교회의 사명에 참여하며 그분의 품성과 같아지는 데 이르도록 성장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분의 구원에 대해 증언하는 일과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봉사를 하는 일에 우리 자신을 드릴 때 성령을 통해 계속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분의 임재는 매 순간마다 매일 그것을 영적 경험으로 전환시킨다. (시 1:1, 2, 23:4, 77:11, 12; 골 1:13, 14, 2:6, 14, 15; 눅 10:17~20; 엡 5:19, 20, 6:12~18; 살전 5:23; 벧후 2:9, 3:18; 고후 3:17, 18; 빌 3:7~14; 살전 5:16~18; 마 20:25~28; 요 20:21; 갈 5:22~25; 롬 8:38, 39; 요일 4:4; 히 10:25.)-기본신조, 11.

출생은 기쁨의 순간임. 씨에 싹이 트고 최초로 두 떡잎이 나오는 것은 정원사를 행복하게 한다. 아이가 태어나 첫 울음을 울 때 그것은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새 생명이 있음을 세상에 알린다. 어머니는 모든 고통을 잊고 다른 모든 가족과 함께 기뻐하고 축하한다. 한 나라가 자유로운 나라로 태어날 때 전 국민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도시의 광장을 메우고 그들이 새로 발견한 기쁨의 상징물들을 흔든다. 그러나 상상해 보라. 그 두 떡잎이 넷으로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든지 없어지는 것을. 일년 후에 그 작은 아이가 미소를 짓지 못하고 첫걸음도 떼지 못하며 세상에 태어날 때의 그 단순한 모양으로 얼어붙은 듯 남아 있는 것을. 새롭게 자유를 얻은 나라 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두려움, 고통 그리고 속박의 감방으로 변할 것이다.

정원사의 기쁨, 어머니의 환희 그리고 자유로 가득 찬 미래에 대한 약속은 낙망, 슬픔 그리고 비탄으로 변한다. 자라남 곧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성숙하고 열매를 맺는 성장은 생명에 필수적이다. 성장이 없는 출생은 의미나 목적이나 행선지가 없다.

성장은 육체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생명과 분리할 수 없는 동일한 것이다. 육체적 성장에는 적절한 영양, 환경, 양육, 운동, 교육, 훈련 그리고 목적이 있는 삶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곳에서 고려하는 문제는 영적 성장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성장하며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해 가는가? 영적 성장의 특징들은 무엇인가?

생명은 죽음으로 시작됨

그리스도인 삶의 가장 기본적이고 독특한 원리는 아마도 그것이 죽음 곧 두 가지 사건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것일 것이다. 우선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새로운 삶 곧 사탄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고(골 1:13, 14) 죄의 정죄로부터 자유롭고(롬 8:1) 죄의 삯인 사망으로부터 자유로운(롬 6:23) 삶을 가능하게 만들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을 가져온다. 둘째로 자아의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제공하시는 삶을 살게 해준다. 그 결과 셋째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리스도의 죽음.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중심이다. 십자가가 없었다면 사탄과 그의 악마적인 세력은 패배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죄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을 것이고 사망은 분쇄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도는 우리에게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하고 있다. 구원의 계획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고안되고 시작되었다면 그 계획의 시행은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그 절의 두 번째 부분에서 설명되고 있다. 하나님의 선물의 독특한 점은 그분이 그분의 아들을 주신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아들을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시도록 주신 사실에 있다. 십자가 없이는 죄의 용서도 영생도 사탄에 대한 승리도 있을 수 없다.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에게 승리하셨다. 광야에서의 불 같은 시험부터 겟세마네의 고뇌까지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의 의지를 약하게 하고 그분으로 하여금 길에서 비틀거리게 하고 그분이 그분의 아버지를 불신하게 유도하고 대속적인 희생으로 인간의 죄라는 쓴 잔을 마시는 길을 피해 가도록 그분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십자가는 마지막 맹공격이었다. 지금이라도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내려와 죄를 위한 제물(요 3:16)로 그분의 아들을 드리는 하나님의 구속적인 목적을 성취하는 일에 실패하기를 희망하면서 하나님을 대항하는 큰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탄과 그의 천사들은 인간의 모양으로 십자가 곁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분의 생명을 포기하심으로써 사탄의 세력을 분쇄하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골 2:15)다. 십자가 위에서 “싸움은 승리로 끝났다. 그분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이 그로 승리하게 했다. 그분은 정복자로서 당신의 깃발을 영원한 고지 위에 꽂으셨다. … 온 하늘은 구주의 승리에 개선가를 불렀다. 사탄은 패배했다. 그는 자기의 나라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골로새서에 있는 사도의 생생한 묘사는 주목할 만하다. 우선 그리스도께서는 악의 정사와 권세를 벗겨 버리셨다. 벗어 버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문자적으로 ‘벗겼다’를 의미한다. 십자가로 인해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이 십자가 위의 승리를 가져오신 분을 신뢰하는 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행사하던 그의 모든 악마적인 힘을 빼앗긴다. 둘째로 십자가는 사탄과 그의 군대를 우주 앞에 “밝히 드러”낸다. 한때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사 14:14)고 뽐내던 자가 이제는 수치와 패배의 우주적인 구경거리가 된다. 악은 더 이상 신자들 위에 힘을 쓰지 못한다. 신자들은 흑암의 왕국에서 빛의 왕국(골 1:13)으로 옮겨졌다. 셋째로 십자가는 사탄, 죄 그리고 사망에 대한 마지막 종말론적 승리를 보장한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악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의 도구가 되었다.

* 그것을 통해 죄의 용서가 가능하게 된 수단(골 2:13)
* 우주적 화목을 우주적으로 드러냄(고후 5:19)
* 죄가 우리의 마음과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승리의 삶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장이 현재 가능하다는 것(롬 6:12)과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우리의 신분에 대한 보증(롬 8:14)
* 한때 사탄이 찬탈했던 왕국인 이 악한 세상이 죄의 존재와 능력으로부터 깨끗해질 것이라는 종말론적 확실성(계 21:1)

이 구속과 승리의 사다리의 단계마다 우리는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8)라는 그리스도의 예언의 성취를 본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죄의 문제를 위한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이다. 우리가 그 사실을 잊지 않도록 예수께서는 그분의 피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마 26:28) 되어야 한다고 단언하셨다. 그 피 흘림은 구원을 경험하고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것은 한 가지 일 곧 죄에 대해 말한다. 죄는 실재한다. 죄는 많은 값을 치르게 한다. 죄의 장악력은 매우 크고 치명적이어서 죄의 용서 그리고 죄의 힘과 죄책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벧전 1:19)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죄의 실재를 부인하거나 계속하여 죄에 대해 무관심한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죄에 대한 이 진리는 반복해서 말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서 죄의 악마적인 속성과 대치하게 되는데 죄는 오직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마 26:28) 그 피로만 깨끗하게 될 수 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과 그분의 죽으심 없이는 용서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결코 잊거나 그러한 사실에 무관심하게 되지 말자. 예수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한 것은 우리의 죄이다. 이는 바울이 진술한 것과 같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롬 5:6,8)셨다. 엘렌 G. 화잇은 죄가 “그리스도를 무겁게 억눌렸으며,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의식함으로 그분의 생명은 파쇄되고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예수의 죽음은 “단번에”(참조 롬 6:10; 히 7:27, 10:10) 드려진 희생적이고 대속적인 성격을 확인하고 선포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우리는 선한 사람 그리스도나, 신-인 그리스도나, 위대한 교사 그리스도나, 완벽한 모본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당신의 받으실 만한 대접을 받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받아야 할 대우를 받으셨다. 그리스도께서 당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신 우리의 죄를 인하여 정죄함을 받으신 것은 우리로 우리가 아무런 공헌도 한 바 없는 당신의 의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때에 예수의 피는 죄로부터의 용서를 보증하며 새롭게 성장할 씨앗을 뿌린다. 그리스도인 생애에서 이 새로움과 성장의 우선적인 면모 중의 하나는 화목이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고후 5:19)셨다고 말한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이 하신 것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와 두려움 없이 설 수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했던 것이 처리되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시 103:12). 십자가 위의 사람이 하나님이 계신 바로 그곳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공표하셨으며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과의 영원한 친교에 들어가라고 강권하셨다.

하나님과의 화목은 즉시 구속적인 성장 과정의 두 번째 국면 곧 동료 인간과의 화목의 국면을 연다. 십자가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운 광경 중의 하나는 그 둘레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다양함이다. 모두가 예수를 찬탄한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성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보라. 사업적 총명을 자랑하던 애굽인들이 있었으며 문명과 문화를 뽐내던 로마사람들이 있었고 학문에서 뛰어났던 헬라인들이 있었으며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생각하던 유대인들이 있었고 선택받은 자들 중의 선택받은 자라고 생각했던 바리새인 들이 있었으며 교리적으로 순수하다고 생각했던 사두개인들이 있었고 자유를 추구하던 노예들이 있었으며 한가로운 사치에 탐닉했던 자유인들이 있었고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이들 모두를 차별하지 않았다. 십자가는 그들 모두를 죄인으로 판정하였다. 십자가는 그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화목의 길을 제공했다. 십자가 아래의 땅은 높낮이가 없다. 모든 사람이 함께 모이며 더 이상 인간을 구분하지 않는다. 새로운 형제 관계가 시작된다. 새로운 교제가 시작된다. 동방이 서방과 합하고 북방이 남방으로 내려오며 백인이 흑인과 악수하고 부자가 가난한 자의 손을 잡기 위해 장벽을 뛰어넘는다. 삶의 달콤함을 맛보도록, 은혜의 경험을 나누도록, 세상에 새로운 삶과 새로운 가족의 출현(엡 2:14-16)을 선포하도록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피의 기초로 초청한다. 이렇게 십자가는 사탄과 죄에 대해 승리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새 생명을 가져왔다.

자아에 대한 죽음. 그리스도인의 새로움과 성장의 두 번째 중요한 면모는 옛 자아에 대해 죽는 것이다. 신약을 읽으면 반드시 그리스도인의 새 삶의 기본적인 면모를 알게 된다. 갈라디아서 2장 20, 21절을 읽으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또는 로마서 6장 6-11절을 읽으라.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혹은 새 생명 원칙에 대한 예수의 선언을 읽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생애는 출생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으로 시작한다. 자아가 죽기까지,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히기까지 전혀 시작이 있을 수 없다. 자아에 대한 근본적이고 생각이 깊고 전면적인 수술이 있어야 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옛 것을 변경하고 개량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자신과 죄에 대하여는 죽고 전적으로 새로운 생명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성령의 효과적인 역사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사도는 침례의 경험을 통한 죄에 대한 죽음과 새 생명으로 부활 둘 다 강조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3,4). 그러므로 침례는 상징적으로 새 생명의 문을 열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도록 우리에게 명한다.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다. 동요하던 시몬은 용기 있는 베드로가 된다. 핍박하던 사울은 전도자 바울이 된다. 의심하던 도마는 일선의 선교사가 된다. 겁쟁이는 용기 있는 자가 된다. 믿음의 횃불이 불신을 대신한다. 질투는 사랑이 삼켜버린다. 자아에 대한 관심은 형제 우애의 관심으로 변한다. 마음에는 죄가 있을 곳이 없다. 자아는 십자가에 못박힌다. 그러므로 바울은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9,10)라고 기록하였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5:24; 참조 눅 9:23)라고 주장하셨다. 그리스도인 생애에서 자아의 죽음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십자가와 그 즉각적이고도 궁극적인 요구는 그리스도인 제자의 신분을 가진 자들을 불러 세우고 그들에게 절대적인 반응을 요구해야만 한다. 디트리히 본 회퍼의 강력한 주석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만약 기독교가 제자의 신분에 대해 진지한 자세를 갖는 일을 중지했다면 복음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것도 아니며, 일반적인 생존과 그리스도인 생존 사이에 구별할 수 없는 정서적 고양으로 희석시켰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일반적으로 매일 당하는 비운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며 생애의 시련과 고생 중의 하나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에 그분은 와서 죽으라고 명령하신다. …그것은 매번 동일한 죽음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 그분의 부르심에 옛 사람이 죽는 죽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생애로의 초청은 십자가로 초청하는 것, 곧 자아와 스스로 구주가 되려는 완고한 욕망을 지속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며 우리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고전 2:5)도록 전적으로 십자가의 사람에게 붙는 것이다.

새 생애를 삶.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세 번째 면모는 새로운 생애를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생애에 대한 큰 오해 가운데 하나는 구원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며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엡 1:7)은 것은 사실이다. 또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 은혜는 값없이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은혜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아들의 생명을 치르게 하였다. 무상의 은혜는 값싼 은혜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본 회퍼의 말을 인용한다. “값싼 은혜는 회개 없는 용서를, 교회의 훈육 없는 침례를, 고백 없는 성찬식을, 개인적인 고백 없는 사죄를 설교한다. 값싼 은혜는 제자 됨이 없는 은혜, 십자가가 없는 은혜, 살아 계시고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이다.”

값싼 은혜는 예수의 부르심과 아무 상관이 없다. 사람을 부르실 때 예수께서는 그가 져야 할 십자가를 제공하신다. 제자가 되는 것은 추종자가 되는 것이며 예수의 추종자가 되는 것은 값싼 계략이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은혜의 의무에 대해 강력하게 편지한다. 먼저 그는 그 자신의 경험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렇게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생애에서 최고의 권위임을 인정한다. 곧이어 그는 이 은혜가 그에게 헛되이 주어지지 않았음을 첨부한다. 헬라어 에이스케논(eis kenon)은 문자적으로 ‘빈 것을 위하여’로 번역된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헛되고 공허한 생애를 살기 위해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능력이 아닌 내재하는 은혜의 힘에 의한, 성령의 열매가 채워진 삶을 살기 위해 은혜를 받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고 신자들에게 호소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한 종류의 공허함에서 구속하여 다른 종류의 공허함에 두려고 이르러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그분과 화목하게 하며 하나님의 가족의 일부가 되게 하는 그분의 행동이다. 일단 가족이 되면 우리는 그분의 놀라운 은혜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그 가족 안에서 산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는 것은 매일 그리스도의 뜻을 반영하며 그리스도의 길을 걷게 되도록 성숙한 성장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성숙한 삶의 특징과 그 지속적인 성장의 표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있게 될 것이다. 세목을 다 살피지 않고 그런 특징 일곱 가지를 고찰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장의 특징들

1. 성령의 삶.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고 말씀하셨다. 성령의 새로 나게 하는 능력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시작조차 할 수 없다. 그분은 “진리의 영”(요 14:17)이시다. 그분은 모든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며(요 16:13) 우리로 하여금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하신다. 그분은 죄에 대한 지각, 의 그리고 심판(요 16:7, 8)을 가져오신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 우리가 영위하는 삶의 현재와 영원한 미래의 결과를 헤아릴 수 없다.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삶에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과 임재의 변화시키는 힘이다(롬 8:14).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요일 3:24)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다. 성령계서 내재하심으로써 새 생애 곧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옛 사고방식, 행동 그리고 관계를 거부하는 새로운 생애 또한 의 가운데서 자라며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고후 3:17, 18)기까지 예수의 형상을 반사하도록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며 화목하게 하며 구속하며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롬 8:1-16) 새로운 생애가 이르러 온다.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생애가 변화된다. 죄악적인 생각은 사라지고 악한 행위와는 인연을 끊게 된다. 사랑과 겸손과 하평이 분노와 시기와 분쟁을 대신한다. 기쁨이 슬픔을 대신하고 용모는 하늘의 빛을 반사한다. 아무도 짐을 덜어 주는 손을 보지 못하며 빛이 하늘 조정에서 내려오는 것도 보지 못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때에 축복이 임한다. 그때에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능력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롬 8:17) 후사로 만드신다. 그러므로 성령에 의한 삶은 영적 행위를 하도록 부르는 초청이다. 옛 죄의 상태를 거부하고 장례의 영광을 그분과 함께 누리기 위해 현 생애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영성은 환상과 신비의 세계로 비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 우리의 공동체 그리고 우리의 가정에서 고난을 당하며 함께 나누며 증언하며 경배하며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내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예수의 기도는 비록 우리가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요 17:15)이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야만 한다. 세상은 우리의 거주지이며 우리의 사명을 이루어야 할 활동무대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데 이는 우리의 시민권과 소망이 장차 이르러 올 세상에 속하기 때문이다(빌 3:20).

바울은 성령이 힘을 불어넣은 이 생애를 영적으로 자라나고 성숙하는 생애로 묘사한다. 그러한 성숙은 육체의 일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갈 5:19-21)을 거부하고 성령의 열매 곧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 23)를 받아들일 것이다.

2. 사랑과 연합의 생애. 그리스도인 생애는 연합의 생애 곧 한편으로 하나님과 화목한 생애이며 다른 한편으로 동료 인간과 화목한 생애이다. 화목은 관계에서 깨진 것을 치료하는 것이며 이 관계의 깨어짐의 주된 원인은 죄이다.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했으며(사 59:2) 사람을 여러 당파 곧 종족, 인종, 성, 국적, 피부색, 계급제도 등으로 조각냈다. 예수의 복음은 이 죄의 문제와 그 죄의 문제에 관련된 모든 깨짐의 요인들을 다루며 연합과 화목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낸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 5:18)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 화목에서 새로운 공동체 곧 하나님과의 수직적 연합과 동료 인간과의 수평적 연합을 그 특징으로 하는 구속을 받은 공동체가 생겨난다. 진정 이 사랑과 연합의 생애는 복음의 핵심이다. 그분의 대제사장적인 기도에서 예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지 않았던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예수의 구속 전 사명과 그분의 복음의 능력은 구속을 받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결속시켜야만 하는 사랑과 연합을 소리 높여 옹호한다. 그러한 사랑과 연합 없이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사랑과 연합이 압도적인 곳에서는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모든 벽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인종, 국적, 성, 계급제도, 피부색 그리고 다른 분리 요소들은 새로운 창조, 새로운 인성을 경험한 자의 생애 속에서 폐지된다(엡 2:11-16). 그가 성장하고 성숙함에 따라 화목, 사랑 그리고 연합의 영광스러운 진리는 그리스도인 생애의 개인적인 표현이나 단체적인 표현 모두에서 점점 더 밝게 빛난다.

그리스도인 성장에서 사랑이라는 요인은 복음의 독특한 요소이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새계명(요 13:34)이라고 칭하셨다. 그러나 새롭다는 것은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하기는 하지만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것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새로운 요소를 도입하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다시 말해서 예수의 사랑이 우주적이고 희생적이고 완전한 것처럼 우리의 사랑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사랑은 벽을 세우지 않는다. 그것은 포용적이다. 그것은 원수까지 사랑한다. 이러한 형태의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마 22:37-40)다.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수정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할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를 사랑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한 아버지의 자녀로서 우리는 서로 사랑할 것이 기대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이웃이 단순히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교회나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보이셨다. 그것은 인종이나 피부색이나 계급의 구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리의 이웃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이다. 대적에게 상처받아 죽게 된 영혼은 누구나 우리의 이웃이다. 하나님의 소유인 모든 사람은 다 우리의 이웃이다.”

진정한 이웃 사랑은 피부색을 관통하며 사람의 인간됨을 직면한다. 그것은 계급제도라는 보호막 쓰기를 거절하고 영혼을 부요하게 하는 일에 기여한다. 그것은 비인간적인 편견에서 사람의 권위를 구해낸다. 그것은 물질주의의 철학적 대학살에서 사람의 운명을 구해 낸다. 사실상 참된 사랑은 각자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형상 곧 잠재적인, 가능성 있는 혹은 실질적인 형상을 본다. 성장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진정 모든 그리스도인 연합의 기초인 그러한 사랑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3. 연구하는 생애. 성장에서 음식은 필수적이다. 살아 있는 유기체는 그 어느 것이나 적절하고 지속적인 영양공급을 필요로 한다. 영적 성장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디에서 영적 음식을 발견할 것인가? 주로 두 근원 곧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일을 통해 그리고 기도의 생애를 신장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계속하는 데서 발견한다. 예수께서 손수 하신 말씀에서 분명하게 가르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영적 생애에 중요함을 말한 것은 달리 없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예수께서는 사탄을 대적하기 위해 말씀을 사용하신 것에 대한 완전한 모본을 제공하셨다. “예수께서는 성경 말씀으로 사탄을 대항하셨다. 그는 ‘기록하였으되’라고 말씀하셨다. 시험당할 때마다 그의 싸움의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사탄은 그리스도에게서 그의 신성의 표적으로 이적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모든 이적보다도 더 큰 표적, 곧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는 사탄이 논박할 수 없는 표적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시는 한 유혹자가 이길 수 없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시편 기자는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라고 말한다. 여기에 사도가 제공한 약속이 더해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그리스도인이 좌우에 날선 예리한 성령의 검을 사탄의 공격을 막기 위해 사용하면 그는 싸움에서 승리할 것이다. 영적 성장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관통하며 쪼개고 나갈 수 있는 힘과 올바른 것과 잘못된 것을 분별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올바른 쪽을 선택하며 하나님의 음성과 마귀의 속삭임을 구별할 수 있는 힘이 신자에게 주어진다. 이런 것이 영적 성장에서 말씀을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없게 한다.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 17)라고 기록했다. 그대는 진리와 교리를 이해하며 성장하기를 원하는가? 그대는 그대의 영혼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로 나아가게 하는 방법을 알기 원하는가? 그대는 오늘, 내일 혹은 후일에 하나님께서 그대를 위해 비축해 놓으신 것이 무엇인지 알기 원하는가? 성경을 손에 쥐라. 매일 성경을 연구하라. 기도로 성경에 접근하라. 하나님의 뜻을 알며 그분의 길을 추구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길은 없다.

4. 기도의 생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분의 뜻을 아는 것은 영적 성장의 일부 곧 그분과 교제하는 일의 일부이다. 하나님과 나누는 이 교제와 그분 안에서 성장하는 일의 또 다름 면은 기도이다. 우리의 영혼에 영양을 공급하는 떡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살아 있게 하는 호흡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순복함으로 무릎을 꿇는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을 충만하게 받고 일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자아를 부인하고 그분의 능력에 의지하며 그분을 기다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그 기다림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 여행을 하며 영적 전쟁을 할 수 있는 힘이 흘러나온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십자가에서의 승리를 보장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생애와 성장에서 기도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므로 “무시로 기도하고”, “성령 안에서 간구로 기도하고”, “영적으로 기도하고”, “깨어 구하고”, “힘써 기도하고”,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엡 6:18)라는 여섯 가지 기본 원리를 언급한다. 우리는 흔히 바리새인처럼(눅 18:11) 남에게 보이기 위해, 우리 자신을 위해 또는 단지 습관적으로 기도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효력이 있는 기도는 자아를 부정하며 성령이 충만하며 중보적이며 우리가 지상에서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증인이 됨으로써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할 때에라도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간구하는 기도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혼의 산소이며 그것이 없으면 영혼은 위축되며 죽는다. 엘렌 G. 화잇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도를 많이 하라. 왜냐하면 기도는 가장 필수적인 의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이는 그대가 그리스도인 생애를 유지할 수 없다. 그것은 고상하게 하고, 힘을 주며, 고결하게 한다. 그것은 영혼이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것이다.”

5. 열매를 맺는 생애. 예수께서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라고 말씀하셨다. 열매를 맺는 것은 그리스도인 성장의 중요한 면모이다. 은혜에 의한 구원은 흔히 순종과 열매 맺음을 부정하는 것으로 오해된다. 이보다 더 성경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한 것을 믿음으로써 값없이 구원을 받으며 우리 자신 안에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엡 2:7, 9; 요 3:16).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하도록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구원을 받는다.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율법주의적인 것이 아니므로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죄로부터의 해방에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결과이다. 따라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요한복은 14장과 15장에서 예수께서 하신 주장과 희망을 숙고해 보라. 주장은 성부와 그분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며 희망은 그분의 제자들과 그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우선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요 15:10)였다고 주장하신다. 예수께서 성부께 순종하신 것은 율법주의적인 순종이 아니라 그분이 성부의 사랑 안에 거하신 결과였다. 성부와 성자 사이의 친밀한 관계는 사랑, 오직 사랑에 기초하며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겟세마네와 갈바리의 쓴 맛을 보게 한 것은 이 사랑이었다.

예수께서는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관계를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과 가져야할 관계에 대한 예증으로 사용하신다. 예수께서 성부와의 사이에 가지신 관계가 그분이 성부께 순종하는 것에 앞섰던 것과 똑같이 제자들이 예수와의 사이에 가진 관계가 그들이 그분께 순종하는 것에 앞서야 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 14:31).

예수께서 제자들에 대해 가지신 희망을 살펴보라. 그분은 세상이 그분께서 성부와의 사이에 가지신 사랑의 관계를 알도록 성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신다. 사랑의 관계가 성부의 뜻을 행하는 것에 앞선다. 그분은 그분의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즐겨 그분의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그분 자신의 제자들에게 사랑의 기초를 기대하신다. 그분은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는 것, 순종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은 영적 성장의 필수적인 표들이다. 열매가 없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 것을 나타낸다.

6. 영적 전쟁의 생애. 그리스도인 제자가 되는 것은 쉬운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실제적이고 위험한 전쟁을 하고 있다. 바울은 말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2, 13).

이 전쟁에는 초자연적인 세력이 우리를 대항하기 위해 소환되어 있다. 주님의 천사들이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악에서 구원하며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인도하면서 그들을 섬기는 봉사에 종사하듯이(시 34:7, 91:11, 12; 행 5:19, 20; 히 1:14, 12:22), 타락한 천사들도 제자가 되려면 해야 할 일에서 우리를 돌이키게 하려고 교묘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 성경은 사탄과 그의 천사들이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분노하며(계 12:17) 마귀 자신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벧전 5:8, 9)는다고 주장한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길에는 마귀의 덫이 놓여 있으며 바로 그런 곳에서 우리의 영적 전쟁이 맹렬해진다. 그러므로 바울은 일어서라! 취하라! 입으라! 강하라!(엡 6:12, 13) 등 행동을 나타내는 강한 단어를 사용한다. “그리스도인 생애는 싸움과 전진의 생애이다. 이 싸움에는 면제가 없다. 계속적이고 끈기 있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끊임없는 노력을 통하여 우리는 사탄의 유혹을 승리하게 된다. 그리스도인 성실성은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구해야 하고 확고부동한 목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 모든 사람은 그들 자신을 위하여 이 싸움에 참전해야 한다. 다른 어떤 사람도 우리의 싸움을 대신해 줄 수 없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이 싸움을 감당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전쟁에서 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제공하신다(고전 15:57). 그분은 우리에게 원수를 충분히 대항할 수 있는 시험된 갑옷을 주셨다. 바울은 이 갑옷이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그리고 기도의 틀림없는 능력(엡 6:13-18)으로 이루어진다고 묘사한다. 그런 갑옷으로 방비하고 성령의 틀림없는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하면, 우리는 영적 용맹 가운데 자라며 우리가 싸우는 싸움에서 승리할 수밖에 없다.

7. 예배, 증언 그리고 소망의 생애.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진공 상태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구속을 받는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속이 필요한 공동체에 증언하는 자에게 일어난다. 사도시대의 공동체를 살펴보라. 초기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직후에 성령의 능력을 받아 개인적으로 또한 단체적으로 예배, 친교, 연구 그리고 증언에서 성장과 성숙을 나타냈다(행 2:42-47; 5:41, 42; 6:7). 단체적인 예배가 없으면 우리는 정체성과 친교의 활동무대를 잃게 되는데 우리가 성숙하고 성장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친교와 상호간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 25).

예배, 연구 그리고 친교에서 더 많이 성장할수록 봉사와 증언에 대한 요구는 더욱 커진다. 그리스도인 성장은 봉사에서의 성장과 증언을 향한 성장을 요구한다(마 20:25-28).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결코 자기라는 원 안에 사는 생애가 아니라 항상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며 증언하는 일을 통해 흘러넘치는 생애이다. 마태복음 28장의 큰 사명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속적인 은혜를 알도록 세상에 두루 용서의 복음을 전할만큼 충분히 성숙할 의무를 지운다. 성령에 의한 생애와 그리스도인 성장의 생애의 표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행 1:8) 끊임없이 확장되는 증언의 생애이다.

우리는 살고 경배하고 친교하고 증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시간은 미래 지향적이다.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빌 3:12-14)간다고 말한다. 동일한 사도는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살전 5:23)도록 성화된 생애를 영위하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장차 이르러 올 왕국에서 갖게 될 구속적인 경험의 궁극적인 완성을 기대하고 희망하는 일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겸손하고, 믿는 영혼에게는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집이 하늘의 문이다. 찬양의 노래와 기도와 그리스도의 대표자들이 하는 말들은 한 백성을 하늘의 교회를 위하여 준비시키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기능이다. 그 고상한 예배에는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