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3일 월요일 예수바라기] 그 자손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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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 산에 있는 에돔 족속의 조상 에서의 족보는 이러하고 그 자손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아내 아다의 아들은 엘리바스요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은 르우엘이며”(창 36:9)

창세기 36장은 ‘에서의 족보’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이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을 통해 가나안 여인과 혼인하지 말라 엄히 금한 걸 알면서도 에서는 가나안 여인들을 아내로 삼습니다. 그 자녀들의 이름들이 창세기 36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들 중에 낯설지 않은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 ‘아말렉’(창 36:12).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출 17:16) 하신 이스라엘의 영원한 원수, 바로 그 ‘아말렉’ 입니다. 아말렉은 에서의 아들의 아들이니 아브라함과 이삭의 직계 후손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의 영원한 원수가 되고 맙니다. ‘에서의 족보’인 까닭입니다.

하지만, ‘야곱의 하나님’은 에서도 사랑하십니다. 야곱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주님은 에서를 위해서도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니,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에서를 위한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에서 뿐만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이들이 이 구원의 은혜 아래에 있습니다. ‘야곱의 족보’에 속했든 ‘에서의 족보’에 속했든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 은혜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모두가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모두에게 베푸시지만 어느 누구는 구원을 받으나 어느 누구는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바로 ‘선택’에 있습니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하나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의 신실하심으로 언약을 이루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니, 그 은혜를 받아들이기로 ‘선택’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든 에서든 심지어는 아말렉까지. 반대로 우리가 그 은혜를 거절하기로 ‘선택’을 하면 우리는 결코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원하신다 해도, 우리가 거절해 버리면 하나님도 어찌 하시지를 못하시는 것입니다. 그 ‘선택’을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은혜를 선택하여 그 은혜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로 더 큰 은혜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 더 큰 은혜란 바로 ‘순종’입니다. 에서처럼 불순종을 일삼던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께 즐겨 순종을 하며, 에서처럼 신실치 못했던 우리가 은혜 안에서 이제 진실로 신실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나님의 그 은혜는 우리로 더욱 더 신실하게 하고 우리로 더욱더 순종하게 합니다. 그 은혜의 비에 젖으면 젖을수록 더 뜨거운 열심으로 즐겨 순종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로 구원은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