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구원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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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자비와 사랑 가운데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를 삼으심으로 우리가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우리는 자신의 필요를 자각하고, 우리의 죄악성을 인정하고, 허물을 회개하며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 대치물과 모본으로 믿는 믿음을 행사하게 된다. 구원을 받아들이는 이 믿음은 거룩한 말씀의 능력에서 나오며,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며 죄의 세력에서 구원을 얻는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거듭나고 성화된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기록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는 거룩한 생애를 살 능력을 받는다. 그의 안에 거함으로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고 현재와 심판 때에 구원에 대한 보증을 얻는다”-기본 신조, 10.

여러 세기 전, 헤르마스의 목자(Shepherd of Hermas)는 장수했던 한 쪼그랑 노파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의 꿈에, 그 노파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몸은 여전히 노쇠하고 머리칼은 백발이었지만 얼굴은 더 젊어 보였다. 마침내 그녀는 회춘했다.
토랜스(T. F. Torrance)는 이 여자를 교회에 비유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지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영이 심령속에서 왕노릇하시면(롬 8:9) 그들은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하려 하심이니라”(엡 5:25-27)고 말했다. 이러한 정결이 교회의 목표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신자들은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라고 증거할 수 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이러한 변화야말로 궁극적인 내적 오순절이다.
성경 전반에 걸쳐 신자의 경험, 즉 구원, 칭의, 성화, 정결, 그리고 구속은 (1) 이미 성취된 것으로, (2) 현재 실현되고 있는 것으로, (3) 미래에 실현될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세가지 시각을 이해하면 칭의와 성화에 관한 강조점에 있어서의 외관상의 불일치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본 장은 신자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구원을 세 주요 부분으로 나누어 취급한다.

구원의 경험과 과거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과 자애에 대한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그리스도를 제쳐놓고 자신 속에 선을 계발시키려는 시도는 반(反)생산적이다. 심령 깊숙한 곳까지 미치는 구원의 경험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 그리스도는 이 경험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3, 5)고 언급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사람은 구원을 경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행 4:12)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다.
구원의 경험은 회개, 자복, 용서, 칭의, 그리고 성화를 포함한다.

회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얼마 전 당신의 제자들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요 16:8) 깨닫게 하심으로 당신을 드러내실 성령을 약속하셨다. 오순절에 백성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구주가 필요함을 깨닫고 자신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물었을 때 베드로는 “회개하”(행 2:37, 38, 3:19 참조)라고 대답하였다.
1. 회개란 무엇인가? “회개”라는 단어는 “슬퍼하다” “회개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나함(nacham)을 번역한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노에오(metanoeo)의 의미는 “마음을 바꾸다”, “자책감을 느끼다”, “회개하다”이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과 죄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성령은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와 자신들의 잃어버린 상태를 깨닫게 하심으로써 심각성을 자각케 하신다. 그들은 슬픔과 자책감을 경험한다. 그들은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는 진리를 인정하고 구체적으로 그들의 죄들을 고백한다. 그들은 결연한 의지로 자신들을 구세주께 전적으로 굴복시키고 그들의 죄된 행위를 버린다. 이와같이하여 회개는 회심-죄인이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 [돌이켜 -로 향함을 뜻하는 헬라어 에피스트로페(epistrophe)로부터 나옴. 행 15:3참조]-으로 절정을 이룬다.*
살인과 간음죄에 대한 다윗의 회개는 어떻게 이 경험이 죄에 대하여 승리할 수 있는 길을 예비해 주는지 극명하게 예시(例示)해 준다. 성령에 의해 자신의 죄를 자각한 그는 자신의 죄를 멸시하고 슬퍼하였다. 그리고 그는 순결을 위하여 탄원하였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3, 4, 1, 10). 그에 뒤이은 다윗의 경험은 하나님의 사유하심은 죄의 용서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죄에서 마음을 고쳐 먹게 한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회개가 죄의 용서보다 앞서는 것은 사실이지만 죄인이 회개로 하나님의 그 축복을 확보할 자격을 구비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죄인은 스스로 회개를 이루어 내는 것조차도 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행 5:31; 롬 2:4 참조). 성령은 죄인이 죄에 대한 이러한 진정한 슬픔, 즉 회개를 발견할 수 있도록 그를 그리스도께로 이끄신다.
2. 회개를 위한 동기부여.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를 의롭게 해주시고 사망의 형벌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것을 느낄 때 마음은 녹아지고 굴복된다.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죄수가 느닷없이 사면장을 받았을 때 그의 감정이 어떠할지 상상해 보라.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는 죄인은 용서를 받을 뿐 아니라 무죄 방면, 즉 의롭다고 선언된다 ! 그는 이러한 대우를 받을 만하지 못하며 자신의 행위로 그것을 얻을 수도 없다. 바울이 지적한 바와같이 그리스도는 우리가 연약하고, 죄많고, 불경건하고,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우리의 의롭다 하심(칭의)을 위하여 돌아가셨다(롬 5:6-10). 그리스도의 사유하시는 사랑을 깨닫는 것만큼 우리의 심령을 뭉클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죄인들이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깊이 생각할 때, 그들은 회개하고자 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를 부여받는다. 우리를 회개로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다(롬 2:4)

칭의.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 [그리스도]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하심”(고후 5:21)이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마음은 성령으로 채움을 입는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이 동일한 믿음을 통하여(롬 12:3; 엡 2:8)회개하는 죄인은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롬 3:28).
“칭의”라는 용어는 “의로운 요구, 행실”, “규정”, “사법적 선고”, “의의 행위”를 뜻하는 헬라어 디카이오마(dikaioma)와 “칭의”, “옹호”, “무죄 석방”을 뜻하는 디카이오시스(dikaiosis)를 번역한 것이다. “의롭다고 선고되고 그렇게 취급을 받다”, “무죄 방면 되다”, “의롭다고 여겨지다”, “석방되다”, “순결하게 하다”, “공평하게 행하다”를 의미하는 관련된 동사 디카이오(dikaioo)도 그 용어의 의미에 부가적인 통찰을 준다.*
“대체로 신학적으로 사용되는 칭의의 의미는 “참회하는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거나 의롭다고 간주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칭의는 정죄의 반대개념이다(롬 5:16).”* 이 칭의의 기초는 우리의 순종이 아닌 그리스도의 순종이다. 왜냐하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롬 5:18, 19)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롬 3:24) 신자들에게 이 순종을 주신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하셨나니”(딛 3:5).
1. 믿음과 행함의 역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그들의 입장은 그들의 선행이나 악행에 좌우된다고 잘못 믿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방법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면서 바울은 자신이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8, 9)고 명료하게 진술하였다. 그는 아브라함을 지적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롬 4:3; 창 15:6)다. 그는 할례를 받기 전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며, 할례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롬 4:9, 10).
아브라함은 어떤 종류의 믿음을 가졌는가?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순종하”여 그의 고향을 떠나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여행하였다고 드러낸다(히 11:8-10; 창 12:4, 13:18 참조). 그가 하나님을 믿는 산 믿음을 소유했었다는 사실은 그의 순종에 의하여 입증되었다. 그가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은 이 역동적 믿음의 기초 위에서였다.
사도 야고보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한 또 다른 부정확한 이해 즉, 그에 상응하는 행위를 나타냄 없이도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에 관하여 경고하였다. 그는 진정한 믿음은 행위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야고보는 그의 요점을 아브라함의 경험을 사용하여 예시하였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드린 행위(약 2:21)가 그의 믿음을 입증시켜 주었다. 야고보는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는 것을 “네가 보느냐”(약 2:22)고 질문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아브라함의 경험은 행함이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의 증거라는 사실을 드러내었다. 그러므로 칭의로 인도하는 믿음은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이다(약 2:24).
바울과 야고보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하여 의견이 일치하였다. 바울이 행함으로 칭의를 얻으려고 하는 시도의 그릇됨을 지적한 반면, 야고보는 그에 상응하는 행위 없이 칭의를 주장하는, 그에 못지 않게 위험한 개념을 취급하였다. 행함이나 죽은 믿음 그 어느 것도 칭의로 인도하지 못한다. 그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며(갈 5:6) 영혼을 정결케 하는 진정한 믿음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2. 칭의의 경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통하여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 우리는 우리의 대리인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에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고 말했다. 회개하는 죄인으로서 우리는 충만하고 완전한 용서를 경험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된 것이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 관하여 스가랴가 본 이상은 칭의를 아름답게 예시하고 있다. 여호수아는 죄의 더러움을 대표하는 더러운 옷을 입고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서 있다. 그가 거기 서 있을때 사단은 그의 정죄를 요청한다. 사단의 비난은 옳다. 여호수아는 무죄 석방을 받을 가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적인 자비하심으고 사단을 꾸짖으신다.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슥 3:2). 이 사람은 내가 특별한 방법으로 보존시키고 있는 나의 고귀한 자가 아니냐?
하나님은 더럽혀진 옷을 신속하게 벗기라고 명령하시고 이렇게 선포하신다.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슥 3:4). 우리의 사랑하시는, 온전히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사단의 비난을 일축하시고 떨고 있는 죄인을 의롭다 하시고 그리스도의 의로 그를 가리우신다.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이 죄를 상징했듯이, 새옷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의 새로운 경험을 상징했다. 칭의의 과정에서 고백되고 용서받은 죄는 죄를 지시는 어린양이신 순결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옮겨진다. “그러나 무가치한, 회개하는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의 옷이 입혀졌다. 이러한 옷을 바꿔 입음, 이같은 구원의 거룩한 거래가 성경적 칭의의 교리이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신자는 용서를 경험했고 그들의 죄 씻음을 받았다.

결과들. 회개와 칭의의 결과는 무엇인가?
1. 성화. “성화”라는 용어는 “성결”, “성별”, “성화”를 의미하는 헬라어 하기아스모스(hagiasmos)를 번역한 것이다. 그것은 “거룩하게 하다”, “성별하다”, “성화시키다”, “구별하다”라는 뜻의 하기아조(hagiazo)로부터 나온 말이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카다쉬(qadash)로서 “보통 용도로부터 판별하다”를 뜻한다.*
진정한 회개와 칭의는 성화로 인도한다. 칭의와 성화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분명히 구분되지만 결코 분리할 수 없다. 그것들은 구원의 두 단계를 표시한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시는 일인 반면에 성화는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하시는 일이다.
칭의나 성화 그 어느 것도 공로가 인정되는 행위의 결과가 아니다. 둘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에서 기인된다. “우리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해주는 의는 전가되는 의이며 우리가 성화되게 하는 의는 나누어주는 의이다. 전자는 하늘에 들어갈 우리의 증서요, 후자는 하늘에 들어갈 우리의 적합성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성화의 세 국면은 (1) 신자의 과거에 이미 성취된 행위, (2) 신자의 현재의 경험 가운데서 진행되는 과정, (3) 신자가 그리스도 재림 때 경험하는 최종적 결과 등이다.
신자의 과거에 대하여 말하자면 칭의의 순간 신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고전 6:11) 또한 성화된다. 그는 “성도”가 된다. 그 시점에 새 신자는 속량함을 받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속한 사람이 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결과로(롬 1:7) 신자들은 “성도”로 불리우는데 그것은 그들이 죄 없는 상태를 이룩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빌 1:1; 요 15:1-7참조). 구원은 현재적 경험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딤 3:5) 우리를 구원하시고 구별하사 우리를 거룩한 목적과 그리스도와의 동행을 위해 성별하셨다고 말했다.
2.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됨. 동시에 신자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의 자녀로 입양하셨다. 즉, 신자들이 우주의 왕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는 그들을 당신의 후사로,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롬 8:15-17)로 삼으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며 영예이며 기쁨인가!
3. 구원의 보증. 칭의는 또한 신자의 가납을 보증해 준다. 그것은 하나님과 지금 재연합된 기쁨을 맛보게 해준다. 과거의 생애가 아무리 죄악적이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며, 우리는 더 이상 정죄나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않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
4. 승리하는 새 생활의 시작. 구주의 피가 우리의 죄된 과거를 가리운다는 깨달음은 몸과 영혼과 마음에 치유를 가져다준다. 죄책감은 제거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용서되고 모든 것이 새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날마다 당신의 은혜를 내려주심으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작업을 시작하신다.
그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자람에 따라 우리의 치유와 변화가 진전되며 그분은 어둠의 권세에 대해 점점 더 승리를 얻게 해주신다. 세상에 대한 그분의 승리는 죄의 예속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실 것을 보증해 준다(요 16:33).
5. 영생의 은사. 그리스도와의 우리의 새 관계는 아울러 영생의 은사를 가져다 준다. 요한은 이렇게 단언하였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우리의 죄된 과거는 다 청산되었다. 내재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구원의 축복들을 충만히 누릴 수 있다.

구원의 경험과 현재
정결케 함, 칭의, 그리고 성화를 가져다주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신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성화의 생애로의 부르심.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갈바리에서 이루신 것에 기초하여 성화된 생애를 영위하는 것을 포함한다. 바울은 신자들에게 윤리적 성결과 도덕적 행위에 전념하는 생애를 살도록 호소하였다(살전 4:7). 하나님은 신자들이 성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성결의 영”(롬 1:4)을 주신다. 바울은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엡 3:16, 17)라고 말하였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신자는 새로운 책임을 진다.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고 바울은 말하였다. 이제 그들은 “성령 안에서”(갈 5:25) 살아야 한다.
성령의 채움을 입은 신자는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롬 8:4, 8:1 참조)해야 한다. 그들은 변화되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롬 8:6)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령의 내재를 통하여 그들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롬 8:9)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생애의 최고의 목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살전 4:1). 성화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바울은 말했다. 그러므로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살전 4:5-7)라.

내적인 변화. 재림 때 우리의 육체는 변화함을 입을 것이다. 이 썩을 몸, 죽을 몸이 불멸성을 입을 것이다(고전 15:51-54). 그러나 우리의 품성은 재림에 대비하여 변화를 받아야 한다.
품성 변화는 날마다 새롭게 되어야 할 저 “내적 본질”(고후 4:16, RSV; 롬 12:2 참조)인 하나님의 형상의 정신적, 영적 국면들을 포함한다. 이와같이, 헤르마스의 목자의 이야기에 나오는 노파처럼 교회는 내부적으로 점점 젊어진다. 온전히 굴복한 그리스도인들은 각각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되고 있으며 마침내 재림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그들의 변화가 완성될 것이다.
1.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여. 창조주께서만 우리의 생애를 변화시키는 창조사업을 성취시킬 수 있으시다(살전 5:23).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참여없이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의 통로에 자신을 두어야하는 바 그 일은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가능하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애를 명상할 때 성령은 신체적, 정신적, 영적 기능들을 회복시키신다(딛 3:5 참조). 성령은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일에 관여하신다(롬 8:1-10 참조).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 안에 사시기를 원하신다. “내가 저희 가운데 거”(고후 6:16; 요일 3:24, 4:12 참조)하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바울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갈 2:20; 요 14:23 참조)신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창조주의 내재는 매일 신자를 내적으로 소생시키고(고후 4:16) 그들의 마음을 쇄신시켜 준다(롬 12:2; 빌 2:5 참조).
2. 신의 성품에 참여함. 그리스도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은 우리의 품성의 변화를 완성시킬 그분의 신적인 능력을 보증한다(벧후 1:4). 이와 같이 하나님의 능력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지런히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벧후 1:5-7)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벧후 1:8, 9).
1)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인간을 그들의 창조주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는 것 혹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것(롬 13:14; 히 3:14) 즉,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 3:5)이다. 그것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요일 4:12). 여기에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에 비견할만한 신비가 있다. 성령께서 신성이신 그리스도로 인성을 취하실 수 있게 해주셨던 것처럼 그 동일한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품성의 특성들을 취하는 일을 가능케 해주신다. 신의 성품을 이와같이 내 것으로 삼을 때 속사람은 새롭게 되고, 개인차는 있지만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이 만들어 준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는데 반하여 신자들은 신이 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품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이 된다.
2) 역동적 과정. 성화는 점진적이다. 기도와 말씀 연구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우리는 끊임없이 성장한다.
구원의 계획을 단순히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안에 거하나니”(요 6:53-56)라고 계시하셨다.
그의 비유적 표현은, 신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소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마 4:4도 보라)고 말씀하셨다.
품성은 마음이 “먹고 마시는 것”으로 꼴지어진다. 생명의 떡을 소화시킬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된다.
3. 두 가지 변화. 1517년 마르틴 루터가 그의 95개 조항을 독일의 비텐베르크(Wittenberg)성 교회의 문에 못 박았던 같은 해에 라파엘은 로마에서 그의 유명한 현성용(한문-Transfiguration)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 두 사건은 공통점이 있다. 루터의 행위는 개신교주의 탄생을 알렸고, 라파엘의 그림은, 의도적은 아니었지만, 개신교 정신을 요약하였다.
그 그림은 그리스도께서 산 위에 서 계시고 귀신들린 자가 골짜기에서 희망의 눈초리로 그분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담고 있다(막 9:2-29 참조).
산 위에 있는 제자들과 골짜기에 있는 제자들은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을 묘사한다. 산 위에 있는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기를 원했고 외관상 아래 골짜기의 필요에 관해서는 무관심한 듯 보였다. 각 시대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필요를 멀리 등지고 “산”위에 초막을 세웠다. 그들의 경험은 활동이 없는 기도이다.
반면에, 골짜기에 있었던 제자들은 기도없이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귀신을 내어쫓으려는 그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없이 다른 이들을 위해 활동하는 덫이나 다른 이들을 위한 활동 없이 기도만 하는 덫 중 하나에 걸려 있다. 이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은 모두 그들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킬 필요가 있다.
1) 참된 변화.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들의 의지, 마음, 소망, 그리고 품성을 일변시킴으로써 사람들을 당신의 형상으로 변화시키기를 원하신다. 성령은 신자들의 사고방식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켜 주신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여전히 썩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남아 있지만 성령의 열매들,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 23)가 이제 그들의 생활 방식이 된다.
우리가 저항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당신 자신의 것과 같게 하시고 우리의 사상과 목적을 당신의 뜻과 완전히 일치하도록 혼합시키시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충동에 따라 실행하더라도 그분을 순종하게 될 것이다. 세련되고 성화된 의지는 그분의 봉사사업을 수행하는 데서 가장 드높은 즐거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 두 종착점. 그리스도의 변형되심은 또 다른 뚜렷한 대조를 보여준다. 그리스도는 변형되셨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골짜기에 있었던 그 소년도 변형되었다. 그 소년은 악마의 형상으로 변형되었던 것이다(막 9:1-29을 보라). 여기서 우리는 두 대조적인 계획들 즉, 우리를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사단의 계획이 예시된 것을 본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유 24)하실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에 사단은 우리를 타락된 상태에 묶어두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인생에는 끊임없는 변화가 수반된다. 중립지대는 없다. 우리는 고상하게 변화되어 가는 중에 있거나 타락해 가는 중에 있거나 그 어느 하나에 속한다. 우리는 “죄의 종”이나 “의의 종”(롬 6:17, 18)중 하나에 해당된다.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는 자가 우리를 차지한다. 만일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을 점유하시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은 백성이 될 것이다. 성령이 충만한 생애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고후 10:5)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없이 살면 생명과 변화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되며 우리의 최후 멸망은 불가피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완전. 성서적 완전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가?
1. 성서적 완전. “온전한” 혹은 “완전”이라는 단어는 “완성된”, “옳은”, “평화로운”, “건전한”, “완전한” 혹은 “흠잡을 데 없는”을 뜻하는 히브리어 탐(tam) 혹은 타밈(tamim)을 번역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헬라어 텔레이오스(teleios)는 “완성된”, “완전한”, “다 자란”, “성숙한”, 충분히 계발된”,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한”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인간에 대하여 사용될 때 그 단어는 상대적 의미를 지닌다. 노아, 아브라함, 그리고 욥은 모두 불완전한 점을 가지고 있었지만(창 6:9, 17:1, 22:18; 욥 1:1, 18) 각기 완전하고 흠이 없는 자로 묘사되었다(창 9:21, 20장; 욥 40:2-5).
신약에서 완전한(perfect)은 접할 수 있는 최선의 빛에 따라 살아서 그들의 영적, 정신적, 그리고 신체적 능력의 가능성에 도달한 성숙한 사람들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고전 14:20; 빌 3:15; 히 5:14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무한한 그리고 절대적인 영역에서 온전하신 것처럼 신자들이 그들의 유한한 영역에서 온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5:48 참조). 하나님께서 보실 때, 완전한 사람은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봉사하는데 전적으로 마음과 생애를 헌신한 사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끊임없이 성장하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승리의 생애 가운데 즐거워하면서 받은 바 모든 빛에 따라 생활하는 사람이다(골 4:12; 약 3:2 참조).
2.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한 완전. 우리가 어떻게 완전하게 될 수 있을까? 성령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완전을 가져다 주신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완전한 품성이 우리의 것이 된다. 사람들은 “완전”이 그들의 타고난 소유물이거나 혹은 소유권이 있는 양 결코 독립적으로 그것을 주장할 수 없다. 완전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인간은 의를 얻을 수 없다. 그분은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성화)과 구속함”(고전 1:30)이 되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특질들이 우리의 완전을 구성한다. 그분은 우리의 성화와 구속을 단번에 이루셨다. 아무도 그분께서 하신 일에 보탤 수 없다. 우리의 결혼 예복, 혹은 의의 두루마기는 그리스도의 생애,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의해 만들어졌다. 성령은 이제 그 완성품을 취하시사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생애에서 재현되게 하신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엡 3:19) 될 수 있다.
3. 완전으로 나아가라. 신자로서 우리는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내재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영적 성숙에 이르기까지 성장한다. 그의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사들을 통하여 우리는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 4:13) 발전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 어린아이 시절의 경험을 뛰어넘어(엡 4:14), 그리스도인 경험의 초보적인 진리들 이상으로 성장할 필요가 있으며, 성숙한 신자들을 위하여 준비된 “단단한 식물”(히 5:14)을 섭취해야 한다.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히 6:1, 2)고 말했다. 그는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 1:9-11)고 말했다.
성화된 생활은 모진 어려움이나 장애가 없는 생활이 아니다. 바울은 신자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훈계하였다. 그러나 그는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았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인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 13).
그는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팍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 3:13, 14; 마 24:13)고 말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히 10:26, 27)게 된다고 경고하였다.
이러한 당부는, 그리스도인들은 “순전히 사법적인 칭의와 성화 이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내 준다. 구원은 항상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긴 하지만 그들은 품성의 성결을 필요로 한다. 하늘 가는 권리 증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달려 있다. 칭의에 덧붙여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이 증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내재에 의하여 하늘에서 살 수 있는 적합성을 준비한다. 이 적합성은 구원이 ‘성취되었다’는 증거로써 인간의 도덕적 품성에 드러나야만 한다.”*
인간의 용어로 위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끊임없는 기도는 그 발전의 매 단계마다 완전한, 성화된 생애를 사는 데 필수 불가결하다. “이로써…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9, 10).

매일의 칭의. 성령 충만한 성화된 생애(그리스도께 사로잡힌 생애)를 살고 있는 모든 신자들은 매일의 칭의(그리스도께로부터 부여받는 칭의)를 계속적으로 필요로 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의식적인 죄들과 부지 중에 지을 수도 있는 과오들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의 죄악됨을 깨닫고 다윗은 그의 “숨은 허물”(시 19:12; 렘 17:9 참조)을 용서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특별히 신자들의 죄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고 보증하신다.

구원의 경험과 미래
우리의 구원은 부활하여 영화롭게 되거나 하늘로 승천할 때 최종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성취된다. 하나님은 영광화를 통하여 구속받은 자들과 당신 자신의 찬란한 영광을 나누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 모두가 고대하는 소망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2)고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시기 위하여”(히 9:28, NIV) 재강림하실 때 이 일이 성취된다.

영광화와 성화.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은 미래의 구원, 즉 우리의 죽을 몸의 영광화를 위한 조건의 하나이다. 바울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고 말하면서 다른 곳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3, 14)고 보증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하늘의 궁전에 있다(골 3:1-4). “성령에 참예한 바”된 사람들은 실제로 “내세의 능력을 맛”(히 6:4, 5)보았다. 주님의 영광을 깊이 생각하고 우리의 시선을 매력적인 그리스도의 사랑스런 품성에 고정시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고후 3:18)른다. 우리는 재림 때 경험하게 될 변화를 위해 준비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최종적 구속과 하나님의 자녀로의 입양은 미래에 있을 것이다. 바울은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며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19, 23; 엡 4:30 참조)고 말한다.
클라이막스를 이루는 이 사건은 “만유를 회복하실 때”(행 3:21)에 일어난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세상이 새롭게”됨(마 19:28, “만물의 쇄신”, NIV)으로 부르셨다. 그 때에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1).
어떤 의미로 양자됨과 구속(혹은 구원)은 “이미” 성취되었고, 또 다른 의미로 그것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는 성서적 견해로 혼란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구속주로서 그리스도의 사업의 전체 범위에 대한 연구가 그 해답을 제공해 준다. “바울은 우리의 현재의 구원을 그리스도의 초림과 연관시켰다. 역사적인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의 하늘 봉사를 통하여 우리의 칭의와 성화는 단번에 확보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의 미래의 구원 즉 우리의 몸의 영광화를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시켰다.
이와같은 이유로 바울은 과거에 있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십자가에 비추어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하고, 우리의 몸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장래에 오실 것에 비추어 ‘우리는 아직 구원받지 못하였다’고 동시에 말할 수 있었다.”*
우리의 미래의 구원을 도외시하고 우리의 현재의 구원을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원에 대한 부정확하고 잘못된 이해를 초래한다.

영광화와 완전. 어떤 이들은 영광화가 가져올 궁극적 구원이 이미 인간에게 가능하다고 잘못믿고 있다. 저 헌신한 하나님의 사람 바울은 그의 생애가 끝나갈 무렵 자신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2-14).
성화는 평생의 과정이다. 현재의 완전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애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전히 최종적으로 변화되는 일은 재림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바울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경고한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다윗, 솔로몬, 그리고 베드로의 생애는 모든 이들에게 심각한 경고가 된다. “생명이 지속되는 한, 확고한 목적으로 애정과 정욕을 감시할 필요가 있다. 내부의 타락과 외부의 유혹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업이 진전되는 곳에는 사단은 언제나 유혹이 영혼에게 압도적인 세력으로 엄습하도록 상황을 그렇게 조성해 놓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지지 않는 한 한순간도 안전할 수 없다. “*
우리의 마지막 창조적 변화는 썩지 아니할 것과 불멸성이 우리의 것이 될 때, 성령께서 원래의 창조를 완전히 회복시키실 때 성취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납되는 근거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의 특질이나 흠없는 행위, 그 어느 것도 하나님께 우리가 가납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구원하는 의는 유일하게 의로우신 사람이신 예수로부터 나오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달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선물에 아무 기여도 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받을 수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의롭지 못하다(롬 3:10). 독립적인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에 불과하다(사 64:6; 단 9:7, 11, 20; 고전 1:30을 보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사랑에 반응하여 행하고 있는 것조차도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가납의 기초를 형성하지 못한다. 그 가납은 그리스도의 일로 확인되었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모셔오심으로 성령은 그 가납을 가져다주신다.
우리의 가납은 그리스도의 의롭다 하시는 의에 기초되는가 혹은 성화시키는 의에 기초되는가 아니면 둘 다에 기초되는가? 존 칼빈(John Calvin)은 “그리스도께서 나뉘어 질 수 없듯이 이 둘 즉 그리스도 안에 함께 연합되어 있다고 우리가 인지하는 바 칭의와 성화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봉사를 그 전체적인 면에서 보아야 한다. “칭의와 성화사이의 차이점들을 상세하게 정의하려”함으로 이 두 용어들에 관하여 억측하는 일을 피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지극히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영감(의 말씀)보다 더 상세하게 하려고 시도하는가?”*
태양이, 서로 나눌 수는 없지만 각기 독특한 기능을 보유한 열과 빛을 가지고 있는 것과 꼭같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뿐 아니라 거룩함(성화)도 되셨다(고전 1:30). 우리는 온전히 의롭다 하심을 받을 뿐 아니라 그분 안에서 온전히 성화된다.
성령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가납의 유일한 경험을 우리에게 적용하시어 갈바리의 “다 이루었다”를 우리 마음속에 가져오신다. 십자가는 이 “다 이루었다”는 가납을 얻으려는 인간의 여타 시도에 이의를 제기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마음속에 모셔오고, 우리가 구할 수 있는 구원에 대한 유일하고 진정한 자격과 적합성을 마련해 주심으로 성령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가납의 유일한 근거를 만들어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