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8일 화요일 장년 교과] 눈먼 자를 치유하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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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것이 그의 죄 때문이라는 생각에 대해 그분은 주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셨다. 맹인은 예수를 보기 시작하지만, 보던 이들은 그 실체를 보지 못한다.

요한복음 9:1-16을 읽어 보라. 제자들은 이 사람이 보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했으며, 예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믿음을 어떻게 바로잡으셨는가?

제자들은 질병을 죄와 연관된 것으로 생각했다. 구약의 어떤 구절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 여지가 있지만(출 20:5, 왕하 5:15-27, 왕하 15:5, 대하 26:16-21 참조), 욥의 이야기를 통해 질병이 꼭 죄 때문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예수께서는 죄와 고통 사이의 연관성을 부인하지 않으셨지만, 이 경우에 그의 치유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더 높은 목적을 제시하시면서 문제를 바로잡으셨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눈먼 사람에게 태어날 때 빠졌던 것을 진흙을 이겨 바르심으로 채워 주는 듯한 모습은 하나님께서 첫 사람을 흙으로 만드신 창조의 이야기(창 2:7)를 떠올리게 한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기록된 기적 이야기들은 모두 문제를 진술하고, 그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와서, 치유가 일어나고, 그가 치유 받은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정한 흐름을 따른다.
요한복음 9장에서는 이런 전개가 7절에서 완결된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다른 기적과 마찬가지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보다, 그 일이 가지는 의미라는 더 큰 주제에 대해 치유받은 사람과 종교 지도자 간의 긴 대화가 이어진다. 이 논의는 죄/하나님이 하시는 일, 보지 못함/보는 것이라는 두 개의 서로 얽혀 있는 대조적인 개념 쌍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요한복음은 9:14까지 예수께서 이 치유를 행하신 날이 안식일인 것을 독자에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유대인들의 전통으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이 안식일을 위반한 것이기에 바리새인들은 그분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편,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있느냐 하면서 그들의 주장을 문제 삼았다(요 9:16).

(이어서) 토론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미 분열이 시작되었다. 눈먼 사람은 예수가 어떤 분인지 점점 더 분명하게 이해하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그분의 진짜 정체성에 대해 점점 더 혼란스러워하거나 보지 못하고 있다.

<교훈> 눈먼 것이 그의 죄 때문이라는 생각에 대해 그분은 주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셨다. 맹인은 예수를 보기 시작하지만, 보던 이들은 그 실체를 보지 못한다.

<묵상> 이 이야기는 자기 자신의 신조와 전통에 눈이 멀어 바로 눈앞에서 제시되는 중요한 진리조차 보지 못하는 위험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적용> 나의 눈과 귀를 막는 오늘날의 신조와 전통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런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볼 수 있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안식일에 살인을 계획한 이들 – “바리새인들은 이 눈먼 사람을 고쳐주신 분께서 바로 안식일을 제정하시고 안식일의 모든 의무를 아시는 분이심을 알지 못하였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준수하는 데 매우 열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바로 그날에 살인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이 이적에 대한 말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으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그분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시대의 소망, 472).

<기도> 때로 저희는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으로 눈물과 한숨 가운데 있지만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 영광도 없는 연약한 사람에게 주신 하늘의 영광과 빛을 세상에 비출 수 있도록 부족한 우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