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1일 일요일 예수바라기] 이스마엘의 족보는 이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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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족보는 이러하고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이름과 그 세대대로 이와 같으니라”(창 25:12-13)

우리는 모두 여리고의 맹인 거지 바돌로매 같은데 그런 우리를 친히 찾아 오셔서 은혜를 베푸사 밝히 보게 해주셨으니 그 은혜를 어찌 다 형용할 수 있을까요? 그 크신 은혜를 ‘아브함의 후처’(창 25:1) 그두라를 통해 다시 확실히 보게 하시니 그저 눈물로 아멘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 크신 은혜에 큰 소리로 아멘을 한 다음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다고 하면, 지금 우리는 은혜 아래 있되 그 은혜를 누리지는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란 신자로 움직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입은 바디매오처럼 말입니다.
구걸하기 위해 길가에 앉아만 있던 바디매오는 은혜로 고침을 받은 후 일어나 ‘예수를 길에서 따’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로 일어나 움직이게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막 10:52). 이처럼 은혜는 은혜 입은 자로 움직이게 합니다. 일어나 움직이지 아니 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크게 아멘을 해도 우리의 그건 은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은혜를 베푸셔도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니, 그것을 ‘값싼 은혜’(cheap grace)라 부를 수 있을지언정 진짜 은혜는 아닌 것입니다.
은혜 받은 이의 그 모습을 아브라함에게서도 밝히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아 백세가 넘어서야 제대로 보게 된 아브라함은 그의 서자들을 모두 다 떠나 보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산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쪽 땅으로 가게 하였더라”(창 25:5-6).
물론 이삭이 귀하고 귀한 아들이지만, 늙은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도 못지 않게 귀한 아들이요 그두라의 여섯 아들 역시 사랑하는 귀한 아들들입니다. 하지만 은혜로 이제는 압니다. 그 중에 오직 이삭만이 ‘언약의 아들’임을 은혜로 확실히 알게 된 것입니다. ‘이스마엘의 족보’(창 25:12)나 ‘그두라의 족보’(창 25:4)는 하나님의 계획에는 없는 족보임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은혜로 이제 그것을 알게 되었으니 오직 언약의 아들 이삭만 남기고 모두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자신의 계획, 자신의 허물, 자신의 죄, 자신의 열심과 노력, 그리고 자신의 의를 미련 없이 모두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은혜’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진실로 ‘은혜 입은 자’인가요?

* 컨텐츠 제공 : 월간 예수바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