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행 25:3).
베스도가 부임하다 베스도가 로마에서 부임합니다. 그는 일처리를 합리적으로 성실하게 진행합니다. 재판을 로마총독관저가 있는 가이사랴가 아닌 예루살렘에서 하자는 유대인들의 무리한 요구를 합리적으로 거절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법을 지키는 범주에서는 바울보다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겠냐고 슬쩍 떠봅니다(9절). 결국 법과 상식을 따라가는 합리적인 사람들도 자기 합리화가 가능하면 약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베스도의 호의를 노린다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은 재판에서 이길 수 없었습니다. 벨릭스 치하에서 이년 동안 아무 소득도 없었습니다. 이제 베스도가 부임하자 그의 호의를 얻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호의로 번역된 말은 카리스 즉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주장하는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은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세상 지배자의 은혜(호의)를 이용해서 매복하여 바울을 죽이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행동은 또한 세상 지배자의 호의를 배반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자신들의 목적만 이룬다면 하나님의 은혜도 세상의 호의도 언제든지 배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을 잘못하면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다 바울은 벨릭스에게 뇌물을 주었다면 이미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에게 돈을 주지 않고 그저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할 뿐이었습니다(행 24:24-26). 그는 자신의 자유보다 타락한 영혼의 구원에 더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베스도의 호의(은혜)을 얻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을 얻고자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과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 23:11).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바울은 주님이 주신 사명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가서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안위보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그에게 맡겨진 영혼들, 즉 벨릭스 베스도 아그립바 가이사의 구원이 더 중요하였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호의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사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살게 하소서. 세상의 호의를 얻기 보다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세상 영혼들을 얻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