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9일 화요일 예수바라기]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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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출 7:13)

바로가 완강하게 거절을 합니다. 마음이 심히 완악한 까닭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손을 뻗치사 ‘여러 큰 심판’(출 7:4)을 내리십니다. 열 재앙으로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완악한 바로가 거절을 하니 나일강을 피가 되게 하신 첫 번째 재앙으로부터 둘째, 셋째, 넷째…. 그렇게 해서 열 재앙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두 다 아십니다.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완강하게 거절하리라는 걸 첫번째 재앙을 내리시기도 전에 이미 훤히 다 아십니다. 다 아시면서도 왜 재앙을 열 번이나 내리신 걸까요? ‘여러 큰 심판’(출 7:4)이라 하셨으니 그 열 재앙으로 <심판>을 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애굽에 손을 뻗치고 펴시사 ‘여러 큰 심판’ 곧 열 재앙을 내리시는데, 이것을 문자 그대로 읽으면 하나님은 다 아시면서도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열 가지 재앙을 준비해 놓으셨다가 거절할 때마다 더 혹독한 재앙을 차례로 내리시는 게 틀림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극렬한 재앙으로 그 완악한 바로와 패역한 애굽을 심판하시니, 그게 혹시 하나님의 <공의(公義, Justice)>인 것일까요?

그것이 만약 ‘하나님의 공의’라면 그런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는 참으로 불쌍한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거절할 걸 뻔히 다 아시면서도, 심지어는 그 바로의 마음을 완악케 하시고는, 거절을 했다고 열 재앙으로 심판을 하시면서 그것을 <공의>라 말씀하신다면, 그런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는 참으로 불쌍한 자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게 공의일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확언을 하는 것은 그것이 공의가 아니라는 확실하고 분명한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공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극렬한 <분노>입니다. 하나님의 그 극렬한 분노가 맹렬하게 쏟아져 내린 곳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공의의 하나님은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기도 하십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죄인을 극렬히 <사랑>하지 아니하고는 도무지 견디지를 못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죄인을 향한 그 사랑 때문에 당신의 목숨을 버리십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그 격렬한 하나님의 사랑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곳입니다. 그 극렬한 사랑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바로 <공의>요 <사랑>이니, 다 아시고서도 내린 그 극렬한 열 재앙이 하나님의 공의일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은 왜 그 열 재앙을 내리셨을까요? 완악한 바로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두 훤히 다 아시면서도 하나님은 왜 그 열 재앙 곧 ‘여러 큰 심판’을 바로와 애굽에게 내리신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