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수요일 예수바라기] 하나님, 어디에 계신가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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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시 13편 1~3절)

이런 인사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에이 숨채요.” 사할린으로, 러시아의 오지로 끌려갔던 고려인들, 까레이스키들의 인사말이라고 합니다. 그 뜻은 ‘살아있다는 것이 숨차도록 고맙다’라는 뜻이랍니다. 눈물겹고 힘겹지만 산 자의 땅에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자는 일종의 북돋움일 겁니다. 몸을 받아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누구나 고통을 겪습니다. 가끔 자신의 존재와 상황이 견디기 어려운 무게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물론 세상에서 겪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사람을 더욱 힘겹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조차도 그를 외면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주님,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영원히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언제까지 나의 영혼이 아픔을 견디어야 합니까? 언제까지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여야 합니까? 언제까지 내 앞에서 의기양양한 원수의 꼴을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1~2절) 시인을 괴롭히는 것을 요약하면 네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잊으심, 하나님의 외면, 아픔의 지속, 의기양양한 원수들의 존재입니다. 반복되는 ‘언제까지’라는 단어는 그가 겪는 시련이 느
닷없이 찾아온 불청객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실 ‘언제까지?’라는 질문은 질문이라기보다는 하소연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와 늘 함께 있겠다.’ 하셨던 언약에 충실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절에 나오는 지나칠 정도로 간결한 ‘주님’이라는 호칭이 시인의 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3절에 오면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주, 나의 하나님’으로 바뀝니다. 삶이 힘겨워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시인은 자기가 처한 곤경을 해결한 힘이 자기에게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럼, 고통의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나와 너>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는 20세기를 일컬어 ‘신의 일식’의 시대라고 말했습니다. 일식은 지구와 태양 사이에 달이 자리 잡음으로써 일시적으로 태양 빛을 차단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일식 현상이 나타나도 해가 사라졌다거나 해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살다 보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차단하는 장애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나친 욕심, 감사할 줄 모르는 마음, 미움과 시새움, 악의, 분쟁, 오만, 자랑, 무정함, 절망…. 열거하다 보니 이런 것을 통칭하여 이르는 말이 떠오릅니다. 바로 ‘죄’입니다. 죄야말로 우리 영혼의 창문을 불투명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시인은 자기 영혼을 죽음의 잠에 빠뜨리는 것들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힘겨운 삶에 하나님은 하늘 너머에서 계시지 사라진 분이 아니십니다.

* 컨텐츠 제공 : 월간 예수바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