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코로나 속 종말론적 증거의 적정성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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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익 교수는 “종말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전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 코로나 시대, 재림신앙 다시 이야기하다 시리즈 ④

김성익 교수(삼육대 신학과)

코로나19 이후의 우리에게 과연 어떤 세계가 도래할까? 유토피아일까? 혹은 디스토피아일까? 언제나 그랬듯 낙관론과 비관론이 충돌하고 있다. 종교인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유수의 언론과 석학들은 미래에 대한 여러 담론을 쏟아내고 있다.

한 가지 공통되는 사항은 결코 과거의 일상으로 되돌아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일상적인 것이 완전히 탈바꿈하는 일이 일어나는데 <재림마을>의 이번 특별기획 시리즈에서 이국헌 교수가 지적한 “탈(脫) 노말”(nomal)의 시대인 것이다. 가장 많이 나오는 이야기가 코로나19 사태 이후 세계 경제에 관한 것이다. 간혹 사회적, 정치적 담론들도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적인 분석들은 어떠할까? 타 종교에서는 코로나19 이후에 대한 전망을 하면서 먼저 그 원인을 인간의 탐욕과 이기적인 삶에 대한 자연의 반격 등으로 돌린다. 대체로 인간의 올바른 선택을 통해 위기를 극복할 수 있고, 이 재난을 보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기독교계에서는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심판과 회개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타난다. 재림교회 내에서는 종말의 시나리오가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종말론에 대한 관심은 재림교회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 개신교 안에서 유행하는 종말론과 도전
개신교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세대주의 이론이다. 영적 이스라엘의 세대 중 마지막 세대의 시작점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한 1948년을 잡고 있다. 지상 이스라엘의 회복 사건은 미국 백인 복음주의 개신교에게 매우 중요하다. 종말이 오기 전에 육신적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해석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연관하여 아마겟돈 사건이 중동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중동에서의 전쟁 추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이유이다. 러시아 혹은 간간히 중국을 북방 왕으로 해석하다보니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늘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세대주의자들은 종말의 시기 예측과 연관하여 마가복음 13장 30절의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에 주목한다. 핼 린지(Hal Lindsey)는 성경의 한 세대를 40년으로 보고, 이스라엘 건국 이후 40년째인 1988년이 아마겟돈의 해가 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 일 전에 비밀 승천, 즉 휴거(携擧, 하늘로 들림, capture)가 7년 동안 일어나므로 실제로는 1981년에 성도들이 하늘로 휴거를 시작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예언된 날짜가 지나 오류로 드러나자, 계속 날짜를 변경하였다. 문제는 연대가 계속 틀렸음에도 큰 틀에서 휴거사상이 개신교의 종말사상의 근간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도 1992년 10월 28일 세계가 종말하면서 휴거가 일어난다는 다미선교회의 시한부종말론 사건이 일어나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기독교 전체는 물론 재림교회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예수 재림”이라는 우리 교회 이름 때문에 다미선교회가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받은 기억이 있다. 당시 재림 교회는 주요 일간지 전면광고를 통해 다미선교회의 예언 해석이 틀렸음을 논증하고 이 사태의 후유증에 대한 대처방안을 제시하므로 정부와 심지어 개신교단으로부터 큰 호응과 찬사를 받은 적이 있다.

한동안 개신교 안에서 유행한 바코드를 666과 연관한 해석도 유행했다. 짐승의 표로 이마에 바코드를 찍는다는 내용으로 미래사회를 묘사하는 영화의 주제로 사용되기도 했다. 당시 버스 번호 666번이 화제 거리가 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바코드 대신에 ‘전파 식별 신분증’(RFID)이 짐승의 표라는 주장이 있다. 이 장치를 몸에 심어 사용하는 것을 ‘알에프아이디 보디 택’(RFID BODY TAG)이라 하는데, 히브리 알파벳을 숫자로 전환하는 수비학(數祕學, Gematria)으로 풀면 666이라는 주장이다. 심지어 영어로 컴퓨터를 숫자로 전환하면 666이기에 짐승의 표라는 주장도 찾아볼 수 있었다.

건강을 체크하기 위해 몸에 삽입하는 베리칩(Verification + Chip, 신원확인 칩)도 이와 유사한 기능인데 짐승의 표와 연관하여 관심을 끌고 있다. 베리칩을 주입하는 것을 짐승의 표, 즉 666의 인을 받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개신교계 뿐 아니라 미국 한인 재림성도들 사이에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번 한국에서 코로나19의 확산을 야기한 유사 기독교 집단이 사회적 관심사로 부각되면서 기독교의 종말론에 대한 평가와 분석이 심지어 일반 뉴스나 대담프로에서 자주 언급된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주장을 시한부 종말론으로 지칭하면서 이 단체와 더불어 과거 다미선교회를 조명하는 와중에 재림교회도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스치듯이 언급되고 있다.

염려되는 것은 종말론을 주장하는 것이 세속사회에서 사이비의 상징어로 전락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재림교회가 종말의 기별을 전파하면서 세속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지 새롭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재림교회의 종말론은 매우 건전한 신앙관이고 매우 합리적인 삶의 방식임을 그들이 이해하는 언어로 어떻게 고백할 수 있을지 기도하며 연구해야 한다.

■ 세속 사회 속에 나타나는 종말론과 도전
요즘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 1999년 7월에 “하늘 대왕”이 내려온다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기억하는가?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세속사회에서도 세상 종말에 대한 관심이 끊이지 않아 왔다. 종종 이런 관심사가 기독교의 종말론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2000년이 다가오면서 2000년이란 의미로 형상화 한 ‘와이투케이’(Y2K) 문제이다. 당시 2000년이 다가오면서 예측되는 전산장애로 인한 대참사 발생의 가능성이 공포를 불러일으켜 전 세계적으로 큰 관심사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소위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발생할 밀레니엄 버그로 인해 2000년 1월 1일이 되면 전 세계 컴퓨터 시스템이 꺼져 은행 시스템으로부터 시작하여 각 분야에서 대재앙이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기독교 교단은 물론이고, 한국 재림교회 안에서도 천년설과 병합하여 이 문제를 종말론적인 징조로 바라보는 일이 일각에서 일어났다. 전 세계적으로 컴퓨터 교체를 비롯하여 비상용품을 비롯한 일상의 모든 물건에 대한 사재기 광풍이 일어났다. 일각에서는 공포심을 이용한 상술이라는 비난도 있었다. 2012년에는 마야달력과 연관한 종말론이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이 두 사건 모두 영화화되었다.

종말에 관심 있는 또 다른 세속 그룹들이 있다. 물론 부분적으로 이에 동조하는 재림성도들이 있을 수 있다. 히스토리와 디스커버리 채널에는 세속적인 사람들인데도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들’(preper)에 대해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꽤 자주 방영된다. 이들은 이상 기후 등으로 야기되는 전 세계적인 자연/환경 재해,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건이나 원자폭탄 사용, 세계적인 경제 금융위기, 우주 행성 충돌론, 인구증가와 식량 부족 문제 등으로 인해 대 혼란의 시대, 다 나아가 종말이 빠른 시간 안에 임할 것이라 믿는다.

경제위기로 화폐가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 믿는 사람은 금과 은을 계속 구입하고, 무법사회가 도래하리라 믿는 사람은 정기적으로 총기사격 연습을 한다. 원자폭탄 전쟁이나 생화학전이 일어날 것이라 믿는 사람은 정기적으로 방독면을 착용하는 연습을 한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다가오는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비상식량, 비상생존에 필요한 물품 등의 시장이 상상 이상으로 커졌다는 점이다. 컨테이너 박스 단위로 비상식량을 구매하여 보관하는 사람도 있다. 더 나아가 초고액의 지하벙커는 물론이고, 미국 로키산맥의 암벽을 깊이 파서 지구 종말에도 버틸 수 있는 초고가의 피난처가 성황리에 분양되는 일도 있었다. 왜 그런가? 그들이 세속 학자들이 제시하는 종말의 증거를 믿기 때문이다.

수많은 환경생태학자와 화학생명과학자들이 기후변화 등으로 야기되는 생태계 파괴나 인구증가와 식량문제, 혹은 세계대전의 위험 등을 지적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지 않으면 지구의 종말이 있을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로마클럽은 종말 시계의 시간을 알려주는 방식으로, 다른 과학자들은 현 속도로 가면 어떤 재난이 지구에 일어날 지를 예측하는 방식으로 경고를 발한다. 경제학자들 중에는 다양한 근거를 가지고 세계적인 금융위기 혹은 파멸적인 경제위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최근에 종말과 연관된 영화와 드라마가 계속적으로 출시되는 것은 대중의 관심이 큰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들 ‘준비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많은 재림교회 공중전도 설교가들도 이런 정보를 종말의 징조로 인용해 많이 활용하고 있다. 이런 자료는 상업적으로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언뜻 매우 매력적인 이유는 단기적으로 대중에게 미치는 효과가 무척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19세기 그리고 20세기 과학자들이 미래에 대해 예측한 것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물론 소설가와 과학자들이 그린 미래에 대한 상상도가 부분적으로 성취된 것들이 있지만, 현재 세상이 그들의 예언한데로 다 성취된 것은 아니다. 전혀 이뤄지지 않은 터무니없는 것들도 많았다. 특히 지구 종말을 야기할 세계적인 위기에 대한 예측은 빗나간 것이 대부분이다.

경제 위기에 대한 경제학자들과 분석가들의 예측이 어떻게 되었는지 살펴보라. 심지어 환율이나 주가 예측의 전문가들조차 예측이 빗나가 큰 손실을 끼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경제의 미래에 대한 확정적인 예측은 무모한 것이다.

따라서 세속 학자들의 예측이나 주관적인 분석을 인용하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 우리는 인터넷에서 증거자료나 통계자료 등을 매우 극단적으로 분석하거나 왜곡하여 상황을 비관적으로 예측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들 자료를 인용했다가 빗나가면, 강사 개인의 신뢰 상실을 넘어 진리 자체의 진정성이 의심을 받게 된다.

대총회 지질연구소에서 진행하는 지질탐사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창조론이 옳다고 주장하기 위해 결코 사용하지 말아야 할 여러 증거들이 제시됐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공룡 발자국과 사람 발자국이 같이 발견되었다는 사진이었다. 필자도 젊은 시절 인용한 적이 있는 사진이었다. 심도 깊은 조사연구 결과 화석발견지의 여행가이드가 조작한 증거로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창조론은 진화론자뿐 아니라 세속 언론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진실을 증명하기 위한 선한 의도로 한 일이지만, 정확하게 확인하지 않은 잘못된 정보의 인용은 진리의 본질적인 가치를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크게 훼손시킬 우려가 있다.

■ 코로나19 사태 속에 종말론적 증거의 적정성 확인하기
몇 년 전 한국 재림교인들 사이에 미국 재림교회 지도층 인사 가운데 예수회가 잠입했다는 영상 대담자료가 카카오톡과 같은 소셜 네트워킹에 빠르게 퍼진 적이 있다. 해당 자료를 자세하게 분석해 보니 편향적 확신을 가진 사회자가 증인이라고 출연한 한 중년부인의 증언을 청취하는 형식이었다. 전체 논조는 이 부인의 친구가 가톨릭 친구를 교회에 초청했는데 그 분이 그 집회에 참석한 목사님을 보고 자신이 다니는 가톨릭교회의 예수회 소속 신부라고 말했다는 내용이었다. 본인이 직접 들은 이야기도 아니고 그렇게 들었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는 이야기가 한 시간 가량 대담에서 제시한 증거의 전부였다.

이런 정보를 접하게 될 때 기본적으로 던져야할 의문이 이런 것들이다. 직접 본 사람의 증언인가? 직접 본 사람은 신뢰할만한 사람인가? 초청받은 가톨릭 신자는 자신이 말한 바에 대한 최소한의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가? 그가 우리 공동체에 불신을 야기하려는 목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닐까?

정보의 신뢰성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란 학문적으로는 누구나 그 자료를 가지고 동일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게 만드는 증거로 확실한 출처를 밝힐 수 있는 것이다. 변호사가 법정에도 내어 놓을 수 있는 합법적인 증거여야 한다.

이런 정보들의 적절성에 대해 분별하는데 도움을 주는 책이 한스 로스링(Hans Rosling)이 2018년에 출간한 『팩트풀니스』(Factfulness)이다. 책 제목으로 사용한 단어는 분명하고 강력하게 지지할 근거에 기초한 견해를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객관적이고 확고한 증거가 부족한 견해는 우리가 사는 세상 속의 많은 것에 대한 잘못된 결론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심한 편견과 부정확한 경제적, 환경적, 정치적 예측을 하도록 대중을 이끌어 간다고 주장한다.

한스 로스링의 모든 주장에 동조할 필요는 없지만, 그의 방식은 매일 엄청난 정보에 노출되는 우리로 하여금 매일 접하는 자료의 신빙성을 확인하고 인용하는 일에 좀 더 신중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그가 제시한 10가지 본능 중 몇 가지를 간추려 우리가 코로나19와 같은 징조를 다루는 방식에 대비시켜보겠다.

(1) 직선본능을 피해야 한다
직선본능이라 과거의 행적을 가지고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의 본능을 말한다. 물론 역사는 반복되는 면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전혀 생각지 못한 변수에 의해 상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사진 필름업계를 장악하던 코닥과 후지필름이 디지털카메라가 나오면서 몰락한 것이 대표적이다. 미래는 과거와 너무나 다른 유형의 일이 과거와 너무나 다른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쌓아온 정보와 분석으로 미래를 섣불리 예측하고 단정하는 일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2) 부정의 본능을 피해야 한다
우리가 교회나 세상을 바라볼 때 좋은 소식보다는 부정적인 소식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늘 교회의 상태는 못마땅하고 세상의 상태는 더욱 나빠지고 있다고 인식한다. 따라서 옛날이 좋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해아래 새 것이 없듯이 오늘날 많은 일들은 과거에도 있었고, 오히려 특정문제는 과거가 더 심각했다는 사실을 놓칠 때가 많다. 어떤 면에서 나쁜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감시가 덜한 자유세계에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예언의 신에도 우리가 사는 세상이 죄로 많이 망가졌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있으므로, 장미의 가시보다는 장미꽃을 보는 자세로 살라는 권면이 있잖은가? 비록 우리는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세상 역사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가진 예언의 백성이지만, 우리로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 보고 불평과 불만과 비난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게 만드는 부정의 본능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권면이다.

종말론을 다룰 때 우리는 그리스도보다는 짐승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에 집중하기 쉽고,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시는 인도자 예수님보다는 환란과 핍박에 주목하기가 쉽다. 짐승의 표를 비난하다가 하나님의 표가 얼마나 멋진 것인지를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종말론의 주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게 해주시는 예수님이 중심되어야 한다. 우리가 전도를 할 때 다른 교회가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는 것보다 진리대로 사는 삶의 축복을 더 많이 이야기하면 좋겠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재림교인임이 행복합니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재림교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라고 고백하면 좋겠다. 진리대로 사는 생애가 얼마나 행복하고 멋진 삶인지를 보여줄 수 있을 때 “영원한 복음”의 진정성이 바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복음이 설득력 있는 기별로 받아들여지는 순간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3) 남 탓하는 비난 본능을 극복해야 한다
재림교회의 종말사건에 대한 이해 중 은혜의 시기가 끝나면 성령이 죄인을 떠나가 더 이상 회개할 수 없게 된다는 내용이 있다. 요즘 세대는 전 세계적으로 성령이 떠나가는 세대인 것처럼 느껴진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은혜의 시기의 마침도 점진적이다. 사방에 적대감이 충만해져가고 있다.

다름이 공존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서로 달라도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노력보다 나와 다른 것은 절대적인 악으로 규정하면서 적대와 갈등의 요소가 가혹하게 더해져 가는 것을 보게 된다. 나와는 다른 상대방이나 집단에 대해 단순히 거부하는 수준을 넘어 비난과 멸시의 의도로서 특정 계층을 비하하는 용어를 사용하는 일이 빈번하다.

특별히 ‘벌레’(蟲)라는 단어를 스스럼없이 사용하는 초등학생들의 언어를 보면서 깜짝 놀라게 된다. 육아하는 여성을 일컬어 ‘맘충’이라 부르고, 친구를 ‘급식충’, ‘겜충’ 등으로 호칭하는 혐오표현이 무차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아들을 “빨갱이”라고 부르며 호통을 쳤다는 이야기는 세속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가장 존중받고 친해야 하는 관계 사이에 오히려 적대감이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거대담론으로 말하자면 냉전 시절에는 미국과 소련의 강경파 중심으로 적대 감정의 이분화가 전부였는데, 최근에는 달라졌다. 한국도 남북 간의 적대감이 동서 갈등을 지나, 보수와 진보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적대 감정이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더해 기독교와 이슬람, 인도에서는 힌두교와 이슬람, 태국에서는 불교와 이슬람, 스리랑카에서는 불교와 기독교의 적대관계가 매우 심화되고 있다.

이런 적대의 시대에는 개인이든 단체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포를 조성하고, 늘 희생양을 만들어낸다. 앞서 소개한 한스 로스링은 이를 남 탓하는 ‘비난 본능’이라 불렀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재정문제 탓을 중국에 돌리는 것이 대표적이다. 코로나19 사태에서도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희생양을 찾는 분위기가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서구권에서는 중국이나 아시아권을 싸잡아 탓을 하고 중국에서는 아프리카인들을 몰아내고 있다. 우리는 이런 시대적 현상에서 종말론적 함의를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예언적으로 우리는 희생양으로 세계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이해를 갖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사회나 교회 일을 하면서 우리는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남 탓만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전 세계적으로 진보와 보수 진영이 대립하는 이 시대에 재림성도들 조차 이 같은 진영논리에 편승하여 상대 진영을 비난하는 영상과 확인되지 않은 소식을 퍼 나르는 것을 볼 때 매우 안타깝다. 비난 정신이 재림성도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필자는 교인이나 지인 심지어 가족 모임에서도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갑자기 사람이 달라져버리는 모습을 볼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종교와 정치의 분리 사상을 신봉하며 정치에 대해 거리감을 두던 과거의 교회문화는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고백보다는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출하는 현상이 매우 진해졌다.

만일 양쪽 진영에 절대 권력이 주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르완다에서 후투와 투치 종족 간에 갈등은 소수 민족인 투치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로 발전했다. 불행하게도 다수 종족에 속한 재림성도들도 동일하게 소수 종족에 속한 재림성도를 학살하는데 참여하는 슬픈 일이 발생했다. 재림성도로서 지역색이나 진영논리로부터 자유로운지 스스로 자문해볼 일이다.

사실 우리는 늘 ‘이단’으로 지목되며 사회적 편견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늘 약자로 우리의 종교적 자유, 양심의 자유를 호소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런데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어떤 정신으로 대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름에 대해 분노하는 감정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숙고해야 할 시기이다.

앞서 언급한 르완다의 비극 사건 가운데 잔잔한 감동을 주는 재림교인의 실화가 있다. 그 이야기는 훗날 <호텔 르완다>라는 영화로 제작됐다. 실존인물 폴 루세사바지나는 다수 종족인 후투족으로 특급호텔의 지배인이었다. 그는 여러 위험 속에서도 대학살 대상인 소수 종족 투치족을 숨겨주고 탈출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여러 난관 속에서도 100일 동안 1,268명의 생명을 구했다. 필자는 그가 목숨을 걸고 그 일을 한 가장 큰 이유를 그가 소수 종족인 투치족 아내를 두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적대의 시기에 빛을 발하는 최고의 정신은 사랑이다. 재림교인은 전 세계적으로 이처럼 살벌해지는 적대의 시기에,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희생양을 찾는 분위기가 고조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감히 은혜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 은혜와 사랑을 고백하고 실천하는 재림성도를 더 많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4) 공포 본능을 피해야 한다
세상의 정치인과 경제계는 공포를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자주 활용한다. 많은 이들이 특정 문제 때문에 너무 쉽게 비이성적으로 공포에 사로잡힌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과거 여러 위기가 닥칠 때마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은 사재기에 돌입하곤 했다. 다행히 한국은 이번 사태에서 거의 유일하게 사재기를 하지 않은 국가였지만, 과거에는 그랬던 적이 많다.

적잖은 독재자나 심지어 민주사회의 지도자조차 정치적 이유로 가상의 적을 만들고, 국민의 공포를 자극해 정치적 이익을 챙기려한다. 대표적인 것이 2000년 9월 11일 뉴욕 쌍둥이 빌딩에 대한 테러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슬람권의 테러에 대한 공포가 증가하다보니 미국으로 입국하는 일이 보통 까다로워진 것이 아니다. 배경에 대한 분석을 자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미국과 이슬람 지도자 모두가 이 사건에 대한 대중의 공포를 통해 정치적인 이득을 챙겼다는 평가받고 있다.

사실 이상스럽게도 현재 한국에서 코로나19로 목숨을 잃는 수보다 매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사람이 훨씬 많지만, 그렇다고 어느 누구도 자동차 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폭력이나 납치, 그리고 전염병 등과 같이 특정 사안에 대한 공포를 더욱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교통사고는 물론이고 전쟁에서 죽은 인원이나 인종 학살로 수십만, 수백만 명이 학살당하는 것, 혹은 최근에 지중해에서 난민들이 희생당한 숫자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둔감하다.

재림교인이 종말론을 다루면서도 유독 민감한 자료들이 있다. 어떤 자료에 대해서는 거의 맹목적이다. 특별히 교황권이나 일요일 휴업령에 대한 소식은 출처확인이나 자료의 타당성을 따지지 않고 아주 쉽게 확산된다. 많은 경우 긴박감에 대한 강조는 늘 공포라는 감정을 자극한다. 설교자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설득을 위해 종말론의 긴박감을 강조하는 공포심 전략을 사용하려는 유혹에 쉽게 빠지는 이유는 결과가 신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도를 할 때 공포심을 자극해 강권한 결심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어떤 이유든지 공포나 강권을 통해 결심하게 된 것은 일종의 강제성이 내포되기 때문이다. 강매로 물건을 사고 나면 속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사실 우리는 짐승의 표 예언 해석에서 신앙을 사형 법령으로 강제할 것이라는 사실에 매우 부정적으로 비난하지 않는가? 이를 반면교사 삼아 하나님의 표를 전하는 재림성도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종말 기별 전파를 어떻게 다르게 해야 하는지를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다.  

군 복무 시 출석하던 강경교회에 가끔 안식일에 출석하는 분이 있었다. 그분은 일요일에는 다른 교회에 성실히 출석하는 분이었다. 친구의 인도로 전도회에 참석했는데 하나님의 인을 받지 않으면 7재앙을 피하지 못한다는 설교를 듣고 두려움에 빠졌다. 공포심 때문에 가끔씩 안식일에 출석하지만 늘 그는 설교가 마치면 도망치듯 교회를 빠져나갔다. 몇 개월 후 그를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재림교인은 공포본능으로 신앙을 해도 안 되고, 공포를 이용해 선교나 교육을 해서도 안 된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 종말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전해져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해 진심으로 눈물 흘리며 침례 받는 장면을 보고 싶다. 재림교인이 되어 너무 다행이고 행복하다고 고백하는 초신자들이 많아지면 우리의 전도는 성공한 것이다. 우리의 자녀가 우리를 보고 재림신앙을 하면 더 행복해지는 삶이 될 것 같다고 말할 수 있으면 재림신자 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이다. 종말시대에 생각지 못한 고난과 재난이 덮쳐도 우리가 체험한 사랑의 하나님의 인도함 속에 요동치 않는 믿음의 삶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

종말시대에 전해질 세 천사의 기별의 핵심을 “영원한 복음”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우리의 재림기별이 복음의 핵심사항인 십자가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함을 지적해준다. 예를 들어 안식일 기별은 참된 안식일의 안식과 행복을 제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더 강조되어야 한다. 코로나 19의 공포가 극대화된 이 사회에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임을 우리 삶을 통해 보여주는 “와서 보라”고 말하는 전도는 공포 마케팅을 넘어서는 강력한 경쟁력을 가진 하나님의 방법이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