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어떻게 건전한 종말의식으로 살아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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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익 교수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건전한 종말신앙으로 행복을 전하는 재림신앙을 구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코로나 시대, 재림신앙 다시 이야기하다 시리즈(최종회)

김성익 교수(삼육대 신학과)

재림교회는 코로나19 이전부터 종말에 대한 과도한 긴박감과 너무도 느슨한 긴박감이 상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두 입장을 어떻게 극복하고 건전한 종말신앙의 새로운 토대를 확인하고 행복한 재림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건전한 재림신앙 혹은 건전한 종말의식은 재림교회의 선교적 정체성이 우리의 일상과 어떤 연관을 갖느냐와 깊은 상관이 있다. 무관심과 과도한 긴장감이라는 두 가지 극단을 극복하는 방안에 대한 숙고를 통해 건전한 종말의식으로 사는 재림성도의 삶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 느슨해진 재림신앙과 선교적 정체성 약화 현상 극복
최근의 젊은 세대, 즉 포스트모던 세대 교인들과 세속주의 배경에서 회심하여 들어온 새 신자들은 ‘종말’이란 단어에 부담을 느낀다. 종말론에 대한 설교를 들려주면 무섭다는 반응이 많다. 고학력자일수록 타 기독교 교단을 과도히 비난하거나, 내용이 너무 선정적이거나 논리 전개가 너무 비약적이거나 합리적인 근거 없이 단정적이면 제시하면 저항감을 많이 표출한다.

특히 젊은 층일수록 그들의 현실 삶에 답을 주고 의미가 없으면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결국 이런 재림교인들의 삶 속에서 종말론적 선교적 정체성은 희미해져 가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이다.

이와 반대로 삼육대학교 신학대학원 학위논문 설문에 의하면 근대주의 배경에서 자라난 50세 이상의 한국 재림교회 2세대와 3세대는 재림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긴박한 재림의 징조 중심의 기별에는 우호적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재림이 두렵고 재림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반수를 넘어간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전도하는 일에 소극적이다. 왜냐하면 자신도 즐겁게 신앙생활을 못하는데 남에게 권할 수 있겠는가? 많은 경우 자녀들에게도 자신과 같은 길을 걷도록 권하는 일에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어떻게 하면 재림신앙이 이 두 세대 모두에게 복음이 되고 삶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도록 도울 수 있을까?

(1) 종말신앙이 매일 재림 신도의 세계관으로 작동하게 해야 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영원한 복음”을 전파하게 하려면, 재림의 교리가 매일의 일상에 의미를 주고, 삶과 상관성을 갖도록 도와야 한다. 재림기별을 포함한 모든 성서적 교리를 공부할 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거나 우리가 믿는 바를 반복하여 확증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그러나 말씀이 우리 삶에 의미를 주고 상관성을 갖게 하려면 전도단계뿐 아니라, 매주 설교에 이르기까지 말씀을 듣고 묵상한 이후에 깨달은 진리를 현실 삶에 적용하는 일을 격려해야 한다.

초기 재림교인들이 즐겨하던 ‘영적친교모임’(social meeting)이나 ‘작은 무리모임’(little company)과 같은 소그룹 혹은 안교교과 시간에 말씀 적용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 것은 유익할 것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기존에 설교노트에 개인의 깨달음과 말씀의 적용, 혹은 새로운 결심을 영적 일기 형식으로 쓰는 일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 개신교회 중 성장 모델이 되는 10대 교회 가운데, 종말 기별을 강조해 성장하는 교회가 있다. 그 교회는 역사적 종말에 대한 설교뿐 아니라 개인적 종말을 준비하라는 기별이 정기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거듭 던져지는 질문이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면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매 순간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더니 성도들이 성장하고 교회가 부흥하더라는 분석이었다. 재림기별을 매일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는 운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2) 재림교리가 “영원한 복음”으로 전파되도록 강조점을 바꿔야 한다
그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주제를 왜곡한 ‘마지막 세대 이론’을 통해 죄 없는 완전주의를 주장하는 이설에 노출된 재림교인 중에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아직 재림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염려를 가진 분들이 많다.

또한 긴박한 재림기별을 주장하는 사람 중에는 음모론적 시각으로 교단이 신신학으로 오염되어 바벨론화 되었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례가 있다. 라오디게아교회에 보내는 기별처럼 회개와 개혁은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하지만 이들은 교회가 하는 모든 것을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재림교리의 핵심은 하나님이 죄악 세상의 해결자이시고, 예수님이 우리 편에 서서 우리의 중보자 되신다는 것이다. 교회론 적으로도 하나님은 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을 세우셔서 마지막 사업을 감당하도록 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다음의 권면에 주목하라.

“교회는, 비록 연약하고 흠이 있을지라도, 지상에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최고의 관심을 쏟는 유일한 대상이다. 그는 끊임없이 염려로써 그것을 지키시며, 당신의 성령으로 그것의 힘을 북돋우고 계신다.”(가려 뽑은 기별, 2권, 396).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통해 종말 예언을 연구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일차적인 목적은 고난 가운데서 재림을 기다리는 당시 교인들에게 예수님이 비록 연약해 보이고, 여전히 회개할 것이 있는 하나님의 교회 사이에 함께하시며 교회를 붙드신다는 것이다(요한계시록 1장 11-16절, 2장 1절). 예수께서 이미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신 것처럼, 요한계시록은 고난당하는 일곱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여전히 부족하지만 종말시대에도 예수님이 계속 함께 하신다는 것이 핵심 주제이다.

또한 구원받은 자들의 찬양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천국에서는 성도의 구원이 전적으로 어린 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임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종말시대의 영원한 복음은 하나님이 어떤 상황 속에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일곱 교회 기별에 나타난 것처럼 흠이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분의 은혜로 각 시대마다 주어진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종국에는 재림하시는 주님에 의해 구원받는 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어느 말씀 집회를 마치고 한 청년이 질문했다. “목사님, 재림신도로 신앙 생활하다가 재림의 날에 가보니 ‘달아보니 부족하다’는 판정을 들으면 어떻게 해요?” 바로 대답 대신에 되묻는 질문을 했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좋아하지요? 예수님을 만나고 싶지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도하면 어떻겠어요? ‘예수님 사랑해요. 예수님, 전 예수님 얼굴을 너무나 뵙고 싶어요. 제가 준비를 잘못해서 구원받지 못한다 해도 좋아요. 예수님 얼굴 속히 뵙고 싶으니 빨리 재림해주세요.’” 정말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 재림성도의 본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진리를 다 알고 동의하는데도 왜 재림이 두려울까?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원한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한일서 4장 18절).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늘 다윗처럼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편 18장 1절)고 고백할 수 있다면 재림 사건은 결코 두려운 사건이 될 수 없다.

예수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 예수님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목숨 걸고 따라 가는 것은(요한계시록 14장 4절, 12절) 예수님이 좋으니 그리하는 것이다. 종말 기별을 전할 때 그 기별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 크게 깨닫고, 하나님을 더 열망하고 사랑하게 만들고, 하나님이 너무 좋아 그분 뜻대로 살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만드는 “영원한 복음”으로 전해졌으면 좋겠다. 좋아서 해야 목숨 걸고 순종하는 지점까지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재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재림성도에게는 좋은 소식, “영원한 복음”이다. 마치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기위해 미리 와서 텐트를 치고 기다리는 팬들처럼, 재림 때 예수님을 뵙기를 고대하며 뜨거운 기대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예수 팬클럽’ 분위기가 교회 안에 만들어지면 좋겠다. 물론 냉철하고 합리적인 사고로 마지막 시대를 위한 현대 진리와 종말의 징조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와 더불어 유리바다가 위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어린 양을 찬양하는 감동을 우리의 매일의 찬양과 예배에서 선체험 했으면 좋겠다.

(3) 역사적 종말과 개인적 종말을 통합하는 세계관을 가져야 하다  
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매일 놓치지 않고 사는 것이다. ‘오늘이 예수님이 오시는 날이라면 내 삶 속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무엇이 될 것인가?’ 우리의 죽음과 재림은 둘 다 누구도 그 시기는 모르지만 그 일이 분명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에 누구나 동의한다. 재림교회는 죽음을 잠으로 묘사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죽은 후에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따라서 죽음의 시간은 재림의 시간인 것이다. 결국 “오늘이 재림의 날이라면”이란 질문은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면”과 동일한 것이다.

고령의 재림성도가 질문했다. “젊은 시절부터 예수님이 속히 오신다고 했는데 이 나이되도록 아직도 안 오시는데 왜 여전히 속히 오신다는 설교를 하십니까?” 사실 재림교회가 “이 시대 안으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자”는 구호를 외친지 160년을 넘어가고 있다. 재림이 지연되는 것처럼 보인다. 대답 대신, 되묻는 질문을 하였다. “장로님,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에게 여인의 후손인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약속 하신 후에(창세기 3장 15절), 그 약속을 몇 년 만에 지키셨나요?” 침묵하셨다.

어색한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질문했다. “하나님에게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베드로후서 3장 8절)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침묵하셨다. 다시 질문했다. “장로님이 오늘 밤 주안에서 죽으면 그날이 예수님 재림하신 날이 아닙니까? 그런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봐도 예수님의 재림은 속히 오시는 것이고, 천년이 하루 같은 주님의 관점에서도 재림은 속히 오는 것입니다.”

매일이 종말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루를 살게 해주는 종말론적 세계관으로 매일 “예수님 속히 오시면 좋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가는 삶을 추구하면 좋겠다.

(4) 종말론을 선교적인 관점에서 강조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가장 적극적인 재림 준비는 선교다. 종말을 강조하는 교회는 최상의 종말 준비는 선교라고 가르쳐야 한다. 초기 재림교회는 교회는 종말시대의 남은무리에게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명을 성취하는 기관이라는 ‘기능적인 교회론’을 강조했다. 교회를 죄악의 바다에서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구원하는 생명선으로 자주 묘사했다.  

그러나 이후 ‘신앙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교회론’, 즉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이 널리 수용되기 시작하면서 재림교회 다수는 내적친교에 치중하며 선교를 부담스러워하거나 소홀히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은 옳지만, 교회가 교인들을 위해서만 존재해서는 안 된다.

엘렌 화잇 여사는 교회와 성도의 삶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진술하고 있다.

“그리스도 교회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이 지정하신 기관이다. 교회의 사명은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임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것이다. 각 사람은 자기의 재능과 기회가 있는 대로 구주의 맡기신 임무를 성취해야 할 것이다.”(정로의 계단, 81).

교회 안에 선교적인 교회론, 즉 교회 안에 ‘전도의 문화’가 편만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구도자의 단계에서부터 “배운 것은 전해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야 한다. 더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축복임을 강조해야 한다. 영혼구원을 통해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고(누가복음 15장), 복음으로 죄인이 거듭나는 변화를 목격함으로(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능력임을 목격하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점을 체험케 해야 한다(히브리서 4장 12절).

복음 전하는 것이 축복이 되는 문화가 확산되면 영혼 구원하기를 간절히 소원하게 된다. 영혼구원에 열심을 다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능력으로는 한 영혼도 구원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그 다음 단계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능력의 역사를 간구하는 중보기도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교회 안에서 복음 전도하는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고,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것을 명예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고조될 것이다. 이 사업에 자기가 친히 종사할 수 없는 모든 사람은 저희의 재물과 저희의 동정과 저희의 기도로 이 사업을 지원하는 일이 당연시 하게 될 것이다.

■ 종말론적 긴박감과 선교적 정체성 사이의 균형 추구
시기를 정하거나 일요일 휴업령과 완전주의에 대한 과도한 강조를 두는 일은 재림교회 안에 재림에 관한 여러 미신적인 이설을 퍼트려 사회와 고립하여 내적 준비에 몰두하는 방향으로 쓸려가게 만들 때가 있다. 특별히 개인적인 구원에 치우쳐 종말을 준비하기 위해 현실 도피하여 사회와 고립을 선택하는 일이 종종 단체적인 운동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개인주의적 신앙은 많은 경우 사회적 책무뿐 아니라 선교적 책무를 저버리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았다. 긴박한 재림을 강조하는 분들 중에는 불신자의 전도에 소극적인 사람들이 있다. 재림이 임박한 시점에 새 신자를 전도해 완전한 품성건설로 이끌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과도한 긴박감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재림신앙이란 미래뿐 아니라 현재의 삶에도 중요성을 지닌다는 것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1) 하나님 왕국의 “이미”(already)와 “아직은 아닌”(not yet)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은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사역에 의해 ‘이미’ 임했지만, 새로운 피조물로 온전한 회복이 구현되는 영광의 왕국은 ‘아직’ 온전히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증 시켜줄 필요가 있다. 이는 ‘이미’ 하나님의 왕국 속에서 구원받은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왕국을 계속 건설해가는 것이 우리 재림성도의 현실 삶의 모습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모든 재림성도의 삶은 은혜의 왕국을 체험한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왕국의 일면을 현 세상 속에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빛과 소금의 역할이다. 화잇 여사는 종말 신앙이 미래지향적일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 구현되어야 함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의 품성을 실증하는 것이다. 다른 이에게 끼치는 우리의 감화는 우리의 말보다 우리의 사람됨에 더 크게 좌우된다. 사람들은 우리의 논리에 도전하고 반박하고 우리의 호소에 반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심 없는 사랑의 생애는 그들이 반박할 수 없는 논증이다. 그리스도의 온유하심으로 특징지어진 언행일치의 생활은 세상에서 한 능력이 되는 것이다.”(시대의 소망, 141-142).

이는 종말론적 소망의 실현이 미래에 일어나기를 기다리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현실 사회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은혜 속에 사는 우리의 삶을 통해 그 소망의 작은 실현을 보여주라는 도전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래에 홀연히 변화를 입기 전에 우리가 말로 하는 진리의 증거뿐만 아니라 변화를 입은 우리가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을 통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변화의 능력을 드러내기를 원하신다(베드로전서 3장 1절).

(2) 종말의 삶은 매일 일상의 삶을 신실하게 영위하는 것임을 가르쳐야 한다
예수님이 주신 종말의 비유에서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라는 말씀과 주인이 올 때에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은 재림을 기다리는 삶이 일상의 성실한 의무 수행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마태복음 24장 40-41절, 44-47절).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사는 사람은 그 일이 영적인 영역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청지기 사상과 연관하여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이 심판의 영역에 들어간다고 가르친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인이 재정을 맡긴 것을 가지고 장사를 하여 영업 이익을 배가 시킨 종을 충성된 종이라 칭하신 이후에, 보상으로 많은 것을 맡기면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것이라 하셨다. 아무런 이익을 내지 못한 종은 가진 것을 빼앗기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질책과 함께 가진 것조차 빼앗기고 주인 앞에서 쫓겨난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므나의 비유에서는 예수께서 열 명의 종에게 은 한 므나 씩을 나누어주며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눅 19:13)고 명하신다. 놀랍게도 한 종은 열 배의 이익을 남기고, 다른 종은 다섯 배를 남김으로 모두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고 이익을 남긴 만큼의 수만큼 고을을 차지하는 보상을 주신다. 아무런 이익을 내지 못한 종은 “악한 종”이라 부르며 “너를 심판하노니”라고 말씀한 후에 그가 가진 것을 빼앗아 열 배의 이익을 받은 사람에게 주라 하신다.

종말시대를 위한 이 두 비유는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자신과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 아니라 이익을 극대화하는 일에 관심을 기우려야 한다는 점을 지적해준다. 이익이 많아져야 더 많이 나누고 헌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의 권면도 그런 관점을 강조하고 있다.

“시간, 이성, 재물, 힘, 지적 능력, 마음속에 있는 친절,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인류를 축복하는 큰 사업에 사용하라고 위탁하신 것이다. … 각 사람은 자기의 행한 대로 주님께 회계하여야 한다. … 만약에 그대가 단 한 달란트만을 가졌다면 그것을 잘 사용하라. 그러면 그것이 축적될 것이다. 우리가 받은 모든 좋은 것들은 ‘나의 것’이 아니다. 위탁받은 자본은 활용해야 한다. 그리고 이윤이 났을 때 그 이윤 역시 주님의 재산이다. 우리는 이 달란트들을 감추어 둘 권리가 없다. 주 예수께서 오실 때 그는 그분의 재산을 그 이자와 함께 받으시기를 바라신다”(편지 180, 1907).

재림신자는 직장과 생업현장에서 성실하고 믿을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더 나아가 영적인 복음 사역에서 뿐 아니라 교회 사업과 개인 사업에서도 하늘의 지혜와 인도를 구하며 모든 일에 이익을 남기는 성공적인 장사꾼의 정신으로 열심을 다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재림 준비는 일상의 의무를 심판받을 자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신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야고보서 2장 12절).
  
(3) 품성의 완전은 영혼구원에 참여하지 않고는 불가능함을 가르쳐야 한다  
재림의 가장 큰 준비는 품성의 완전을 통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는 가르침은 종종 신실한 재림성도들이 사회와 고립하는 방법을 선택하도록 만들 때가 있다. 하지만 사단은 광야에서 40일 금식한 예수님을 찾아와 시험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어디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는 삶을 살고 있느냐가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사실 예수님도 제자들이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 속한다는 개념으로 거룩함을 말씀하셨다(요한복음 17:11절, 16-17절). 포도나무 비유에서처럼 하나님께 속한 삶은 예수님이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일을 추구하는 실천적인 경건을 중요하게 여겨야한다(요한복음 5장 17절, 15장).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도움 없이도 죄인을 구원하시는 당신의 목적을 이루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을 계발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의 사업을 분담해야 한다. 그분의 기쁨, 곧 그분의 희생을 통하여 구속받은 영혼들을 보는 기쁨에 참여하기 위하여 그들의 구속을 위한 그분의 사업에 참여해야 한다.”(시대의 소망, 142).

최고의 재림준비가 품성준비라면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 최선의 품성건설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경험이다(마태복음 16장 24절).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심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가 영혼구원을 참여할 때 진정으로 십자가를 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화잇 여사는 ‘전도 문화’를 가지고 ‘전도 훈련하는 교회’에 일어나는 일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영원한 구원을 위해서 신자들을 교육하고 훈련하며 단련시키는 모든 사소한 행위들이 교회를 향상시키고 성화케 하는 큰 결과를 가져 온다.”(복음전도, 314).

이 권면은 전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개인뿐 아니라 교회를 전체적으로 성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임을 보여준다. 전하기 위해 말씀을 배우는 과정에 말씀을 제대로 깨닫게 되어 교리적 순수성을 지킬 수 있게 되고, 말씀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경험 속에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최고의 성품 변화는 하나님의 심정을 체험하는 것인데 불신자의 영혼과 씨름하면서 십자가를 지는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심정을 닮는 성품으로 변화를 입을 수 있게 된다. 바로 이 과정을 통해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 안약은 선교적 용도임을 기억하자
종말 시대 교회의 상징인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 중 하나는 눈 먼 것을 모르는 것이다. 이 교회에 보낸 처방으로 예수님은 “안약을 사서 보게 하라”고 말씀하신다(요한계시록 3장 18절). 화잇 여사는 종종 이 말씀을 진리와 오류를 분별하는 것으로 해석했지만(교회증언, 4권, 88), 선교적인 사명을 깨닫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교인들은 그들의 주위에서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을 보기 위해서 하늘의 안약을 그들의 눈에 바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거듭하여 당신의 백성들에게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들을 불러들여 당신의 집에 가득 채우라고 당부하셨다”(교회증언, 6권,  294).

따라서 안약을 사서 눈을 뜨게 된 사람은 예수님의 심정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바라본다. 안약을 바른 자들은 목자의 심정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을 목자 없는 양처럼 불쌍히 여겨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추수하는 일꾼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불태운다(마태복음 9장 36~38장). 이런 행동이 나타나야 진정으로 눈을 뜬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교회는 재정적인 면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도전을 받고 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창의적으로 선교하는 일에 모든 에너지와 기도를 집중해야 한다. 코로나19 시대에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진리와 오류를 분별하는 안목 뿐 아니라 주위 이웃과 지역사회를 위해 일할 기회를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자. 여전히 추수할 것은 많지만 일꾼이 부족하다. 주님의 심정으로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달라고 기도하자.

■ 건전한 종말신앙으로 행복을 주는 재림신앙을 구현하자   
거의 10년마다 한국갤럽이 한국인의 종교의식을 조사해 발표한다. 거의 매번 동일한 답이 나오는 영역이 있는데 각 종교별로 신앙하는 이유이다. 개신교인들은 신앙하는 이유가 ‘내세의 행복’ 때문이라는 항목이 압도적 다수이다. 하지만 불교와 가톨릭 교인은 대부분 ‘현세의 평안’이 신앙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최대 종교그룹인 불교도와 586만 명을 넘어가는 가톨릭 교인들이 우리 기별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이유가 이 때문은 아닐까? 혹시 우리는 우리의 기별을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포기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는 않았을까? 점증해가는 세속적인 젊은 세대들은 현재의 행복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가고 있다. 재림신앙이 미래에 대한 소망뿐 아니라 오늘의 삶에 의미를 주는 것임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올 6월에 예정했던 대총회가 기간을 단축해 내년 5월 20일부터 25일까지로 연기됐다. 테드 윌슨 대총회장은 필자가 참석한 화상회의에서 코로나19 사태가 야기한 참사와 공포를 설명한 이후, 현재 일어나고 있는 세상의 변화를 언급하면서 이 변화가 교회에 미치는 실제적인 영향에 대해 조명했다. 화상회의의 확대와 더불어 내년 대총회 기간이 단축되는 사태를 사례로 들었다.

과거 대총회 행사를 2주간 진행하면서 막대한 비용을 지출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단축된 대총회 기간이 재정위기가 예측되는 이 시기에 재정절감 정책과 연관하여 불가피함도 밝혔다.
또한 1910년대의 교회 역사를 인용하면서 당시 대총회 회의는 선교적 사명에 초점을 맞춘 말씀선포와 행정처리가 전부였고, 마치면 바로 선교하러 돌아갔기에 총회를 위해 큰 재정투입이 필요치 않았다고 했다.

그런 후 우리의 선교적 사명에 초점을 돌렸다. 이번 대총회의 표어인 “예수님이 오신다! 참여하라!”(Jesus Is Coming! Get Involved!)를 소개했다. 이미 재림마을에 소개된 대총회장 담화문에서도 언급했지만 “참여하라”는 표어는 ‘전교인참여운동’(TMI)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니 주님을 위해 모든 성도들이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헌신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 가장 건전한 재림신앙이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종말신앙이라는 의미이다.

사실 이런 표어는 강요한다고 일어나지 않는다. 왜 참여해야 하는가를 이해해야한다. 우리가 신앙하는 이유는 세속적인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우리 때문에 행복해지면 우리가 행복하도록 만들어 놓으셨다. 사랑을 나누면 행복해지는 것이다. 가장 큰 사랑은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믿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일에 참여해야 현재의 삶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최후의 종말사건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것이다. 이 종말시대에 행복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누리는 행복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다(로마서 13장 10절). 또한 이것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 믿음을 지키는”(요한계시록 14장 12절) 백성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필자는 재림이 너무나 분명하다고 믿는다. 재림의 소망은 늘 삶의 극한적인 상황 속에서 희망으로 살아가게 해줌을 목격한다. 이와 더불어 재림신앙은 현재의 삶도 더 행복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다 큰 우리 집 아이들에게 동일한 이야기를 한다. 부모가 신앙하는 것이 행복해 보이는지를 질문하면 다행스럽게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면 늘 우리 둘 사이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재림신앙이 우리의 현재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비결은 오직 사랑을 함께 나누는 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에게 미래의 소망과 현재의 행복을 제공하는 건전한 재림신앙이 우리로 살 맛 나게 하고 신앙하기를 잘했다는 감사가 넘치게 해주고, 우리가 전도해서 변화를 입은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봄으로 행복하다는 고백을 하게 해준다. “재림교회 오면 행복해져요”가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될 때 “예수님이 오신다! 참여하라!”(Jesus Is Coming! Get Involved!)는 구호는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 축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