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블루] 무엇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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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태 목사는 종말론적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탕자처럼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기고 = 김정태 목사(베트남 PMM 선교사) / 상담심리사 1급, 가톨릭대학교 상담심리대학원 졸

■ 불안 바이러스에 빠져 있는 신앙인들
A 집사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최근 들어 많은 심리적 불안을 느끼고 있다. 전염병에 걸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불안하게 한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으로 나타난 재림의 징조 때문이었다. 재림의 징조나 마지막 시대에 관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마음은 무거워졌다. 마음의 평안을 누려야할 교회에서 오히려 더 불안해진 것이다.

B 집사는 이번 코로나 감염병으로 인해 매출이 급감한 회사로부터 퇴직을 요구 받았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던 그는 처자식을 앞으로 어떻게 먹여 살려야 하나하는 걱정에 잠을 이룰 수 없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전염병 때문에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앞날에 대한 염려로 인해 불안만 커지고 있다.

교회에 가서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는 설교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더욱 무겁기만 하다. 한편으로는 이 위기 상황을 빨리 사라지도록, 예수님의 재림이 곧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켠에는 준비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이 혼란스럽기도 하다.

■ 개인적 불안이 종말론적 불안으로
그렇다면 예수의 재림은 우리에게 희망인가? 아니면 두려움인가? 재림의 징조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때,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우리는 각자의 현재 모습을 점검해봐야 한다. 예수의 재림이 왜 우리에게 불안감을 주는가? 예수의 재림은 왜 우리의 희망이 되지 못하는가? 예수의 재림이 우리에게 희망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불안을 조성하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이런 종말론적 불안은 개인적인 불안에서 시작한다. 개인적인 불안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때문에 개인적, 사회적 불안은 구원의 확신에 대한 의심을 갖게 하는 종말론적 불안에 빠지게 한다. 예수 재림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신앙인들이 오히려 예수 재림을 두려워하는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A 집사가 불안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구원받기에 충분한 믿음과 품성을 지니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완벽하지 못한 모습 때문에 실망한다. 이런 사람은 예수 재림의 징조와 소식을 들을 때마다 불안을 느끼며 초조해한다. 이들의 마음에는 ‘전염병보다 더 무서운 건 변화하지 않는 내 자신’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실제 상담 현장에서 내담자들이 표현하는 그들의 죄책감은 상상 이상이다.

오랜 방황 끝에 예수의 참 제자로 거듭나기 원하는 C 형제의 이야기는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자라면서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고 자랐다. 아버지는 평신도지도자로서 평생 교회를 위해 헌신한 훌륭한 분이셨다. 어머니 또한 교회에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열정적인 신앙인이었다. 그러나 C 형제는 이런 삶이 너무 답답하고 힘들었다.

사춘기가 되자 그는 엇나가기 시작했다. 교회도 종종 빠지기도 하고 심지어 술과 담배까지 입에 댔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면서는 교회와 더욱 멀어진 삶을 살았다. 부모님은 이런 아들을 위해 주야로 기도하며 그가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원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병환으로 돌아가시게 됐다. 임종 직전 아버지는 그에게 “하늘에서 보자, 아들아”라는 말씀을 남기고 가족들의 곁을 떠났다. C 형제는 아버지의 유언의 말씀을 되새기며 교회로 되돌아가고자 결심했다.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간 교회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쉽지 않았지만, 서서히 적응해갔다. 재림연수원에 가서 기도훈련도 받고 감동적인 설교를 들으면서 새롭게 거듭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집으로 되돌아온 그는 감동받은 말씀대로 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신실한 신앙인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변화하지 않는 자신 때문에 더 큰 죄책감에 빠져 들어갔다. 여러 번 목사님께 면담을 통해 조언을 구해봤지만, 시원한 답을 듣지는 못했다. 옛 품성 그대로인 것 같은데, 예수의 재림은 곧 임박했다는 설교를 들을 때마다 그는 불안하고 두려웠다.

■ 종말론적 불안을 야기하는 “완전”에 대한 성경적 의미
신앙인들이 종말론적 불안에 빠지게 하는 잘못된 개념을 성경을 통해 살펴보자. 마태복음 5장 48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권면하신다.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을 보고 ‘우리는 과연 온전한 품성으로 예수 재림을 맞이할 수 있는가?’라며 절망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온전”은 어떤 의미일까.

결론부터 언급하자면 이 성경절은 우리가 생각하는 흠도 점도 없는 도덕적 “완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완전”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그러므로”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는 위의 내용에 근거해 “온전하라”라는 의미이다. 마태복음 5장 43~44절에는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온전하라”는 말씀의 근거는 곧 이웃사랑이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게 온전의 방법이 되는 것이다. 누가는 마태가 기술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누가복음 6장 36절)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누가는 마태가 기술한 “완전”이라는 단어를 “자비”란 단어로 표현한다. 재림교회의 학자인 조지 나이트 박사는 이 성경절에 대해 “완전한”(teleios)의 의미는 “죄 없는”(sinless)가 아니라, “성숙한”(mature)을 말한다”고 설명한다.  

윌리암 바클레이 박사는 이 성경절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처럼 닮아감으로써 완전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 성서 교훈의 전부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닮게 하는 유일한 건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그에 대한 사랑을 계속하는 사랑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용서하심 같이 용서하는 것을 배우고, 하나님이 사랑하심 같이 사랑하는 것을 배우게 될 때에 참된 인간이 되고 크리스천의 온전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재물 많은 부자 청년 이야기는 유대인들의 완전 개념이 행위적 개념에 치우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청년은 예수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태복음 19장 16절)라고 묻는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는 무엇을 행해야 구원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당시 유대인의 사고방식이었다.

예수께서는 계명의 말씀들을 나열했다. 그러자, 그 청년은 그 모든 것을 다 지켰다고 말했다. 그 후 예수께서 말씀한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태복음 19장 21절).

예수께서는 구원의 길을 묻는 청년에게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말씀하셨다. 구원은 도덕적인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을 우리 삶을 통해 드러냈을 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에베소서 2장 8절 참조)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을 10가지로 표현한 게 십계명이다. 예수께서는 십계명을 마태복음 22장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분류하셨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 10절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하면서 율법을 사랑의 개념으로 말한다. 이곳에서 사용한 “완성”이라는 단어의 원어의 의미는 “채우다” “충만하다”라는 뜻이다. 사랑은 율법을 채워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즉, 율법적으로 완벽한 삶은 그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켜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거울이자 통로 역할로서 세상을 향해 채워가는 것이다.

■ 종말론적 불안에서 벗어나는 방법
완벽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불안을 느낀 사람들은 재림의 징조를 보거나 재림에 대한 설교를 듣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한다. 예수의 재림을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불안해 진다. 우리는 (결코)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재림을 기다리는 백성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를 바라봐야 한다.

탕자가 자기 자신을 바라봤을 때는 아버지께 되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가 아버지를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그는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우리는 연약한 죄인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누구든지 완벽하지 않은 모습 때문에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제일 먼저 느낀 감정이 수치심과 두려움이었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그들은 하나님과 즐거운 교제를 나눴다. 그러나 범죄 후 그들은 연약한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 죄로 더럽혀진 모습은 너무도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죄를 통해 자신을 바라본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다. 이처럼 불안을 느낀 사람은 그 두렵고 불쾌한 감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이런 감정이 예수의 재림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우리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죄책감이 들어 주님께 되돌아가기 힘들 때마다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가 필요하다”고 고백해야 한다. 사단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로부터 벗어나게 하려고 불안의 감정을 심어 놓는다. 불완전한 모습으로 힘들어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성경 말씀으로 위로를 드리고 싶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언 24장 16절).

성경은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의인라고 말하지 않는다. 넘어질지라도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일어난 사람이 의인이다. 죄책감으로 인해 넘어지고 쓰러져서 포기해버리면 성경은 그들을 향해 “악인”이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강권한다. 예수를 바라봄으로 탕자와 같이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용기를 갖자. 이럴 때 예수의 재림은 불안이 아닌,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