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기자가 예수께서도 순종함을 배워야 했다고 말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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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총회 성경연구소의 성경 난해 문제 해석

Interpreting Scripture: Bible Questions and Answers


[대총회 산하에 봉직하고 있는 선발된 학자 49명이 내놓은 성경 난제 94개에 대한 균형 잡힌 해석들]


81.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께서도 순종함을 배워야 했다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인가?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 5:8).

이 본문에서 주요 문제는 “배워서”라는 말에 있다. 예수께서 무엇을 배우셨다는 말인가? 그분의 배움은 도덕적인 교정이나 계발을 포함하는가? 우리처럼 그분도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우셨는가? 히브리서 5:9의 “온전하게 되었은즉”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삶에도 불완전함이 있었음을 암시하는가? 또한 고난은 영적인 성장에 꼭 필요한 부분인가?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이런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이 본문의 직접적인 문맥을 이루는 히브리서 4:14∼5:10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왜 예수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기에 적합한지를 논하는 긴 기독론적인 부분이다. 필요할 때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가라는 4:4∼16의 권고는 4:14∼5:10의 서론으로 기능한다. 이 간단한 서론에는 예수에 관한 오해를 피하도록 돕는 두 가지 중요한 사항이 나타난다. 첫째는 예수가 “범사에” 우리와 같이 되셨다는 것이다(15절). 둘째는 예수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이다. 5:8에 대한 해석은 이런 범위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 간단한 서론에 뒤이어, 지상의 대제사장의 자격을 말하는 5:1∼4이 나온다. 그런 다음 5:5, 6에서는 시편 2:7과 110:4의 인용문에 따라 성취된 대로, 예수를 높여진 아들로 선언한다. 이 선언이 있은 후 우리의 대제사장이 될 예수의 자격을 말하는 히브리서 5:7∼10이 이어진다. 5:1∼10은 예수의 아들됨을 말하는 5, 6절을 중심 취지로 제시하는 카이애즘 구조를 이룬다.[1] 하지만 우리의 목적을 위해선 5:8이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예수의 자격을 설명하는 부분이라는 점을 주지하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5:8의 주된 관심사는 예수의 본성에 있지 않고 예수의 기능에 있다.
또한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서의 더 넓은 문맥을 살펴보아야 한다. 예수의 인성을 묘사하는 2:10∼18은 주제적인 면에서 4:14∼5:10과 두드러진 유사성을 띤다. 히브리서 2:10∼18은 예수께서 성육하신 목적을 밝힌다. 고난을 통해서 온전케 되는 것(2:10), 우리와 하나가 되는 것(11∼14a절), 사망과 마귀를 멸하는 것(14b, 15절), 고난과 시험을 통해 자비로운 대제사장이 되는 것(16, 17절) 등이 그 목적이다.


가장 중요한 인간의 고난:

또 하나의 중요한 문단은 히브리서 12:1∼11로, 고난이 어떤 결과를 내는지를 가르쳐 주는 권고 부분이다. 우리의 고난과 예수의 고난을 동시에 말함으로써 이 부분은 고난에는 육체적 고난 이상의 것이 결부돼 있다는 것을 보도록 돕는다. 십자가(12:2a), 수욕(12:2b), 타인에게 받는 적대감(12:3), 죄의 유혹(12:4) 등은 육체적, 사회적, 종교적 및 심리적 고통과 관련된다. 그러나 고난을 하나님의 연단으로 말하는 이 부분의 긴 논의(12:5∼11)는 영적인 고난이 가장 중요한 인간의 고난임을 분명히 한다. 시편에 나오는 많은 기도들이 사실상 이런 종류의 고난을 반영하고 있다(시 10:1, 13; 22:1; 42:9, 11; 43:2, 5; 44:23, 24; 49:5; 74:1, 11; 88:14).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그러신 것처럼, 이런 기도의 문맥에서 하나님께 “왜”라고 묻는 것은 불신이나 반역의 행위가 아니라 정신적 및 영적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왜”라고 묻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고통에서 구원하실 능력이 있는 분임을 믿고자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는 “왜”라고 물음으로써 배운다. 강한 호기심을 통해 배우려는 마음이 생기는 법이다. 우리!
가 순종의 더 깊은 수준에 도달하려는 실제적인 의도를 가지고 열렬하게 그러나 참을성 있게 대답을 찾을 때 영적으로 성장한다. “왜”라는 물음을 멈춘 자들은 배움도 멈춘다.


예수께서 순종을 배움:

이제 히브리서 5:8로 돌아가서 연구해 보자.
“그가 아들이시라도.” 여기서 아들을 언급한 것은 높여진 예수의 아들됨에 대한 선언인 히브리서 1:1∼5과 5:5에 인용된 시편 2:7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아들은 선재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대리자 곧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히 1:3)이다. 히브리서 5:5에서 시편 2:7이 다시 도입된 것은 독자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5:8의 시작하는 구절은 “그가 아들이시라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2] 다음 진술인 “순종함을 배워서”라는 구절은 지상의 예수님이 선재하시며 높여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배워서.” 지상에서 예수님의 영적인 지식도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진보되었음을 부인할 이유가 없다. 누가는 예수께서 육체적으로 자랐을 뿐 아니라 지혜도 증가했다고 분명하게 말한다(눅 2:40, 52). 누가는 예수님의 삶에도 성장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그분의 완전하심에서 뭔가를 제해 버린다는 느낌을 갖진 않았다. 하지만 “[그가] 배워서”라는 진술은 히브리서 저자가 그어 놓은 한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한 편에는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죄가 없으셨다는 저자의 앞 진술(4:15)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그분이 지상 생애의 끝에 온전하게 되셨다는 견해가 있다(5:9; 2:10).
예수님의 완전이 그분의 지상 생애 동안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는지, 아니면 그분의 부활과 승천 때에 단번에 갑자기 그분께 부여되었는지 묻는 것은 불필요하다. 어쨌거나 그분의 지상 생애 동안 완전이 그분 앞에 놓여 있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히브리서 5:8의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자라날 필요가 있었다는 것 자체(그것이 불완전이라 일컬어질 수도 있지만)가 죄는 아님이 분명하다. 사실, 성장과 배움은 인간됨의 기쁨을 구성하는 하나의 꾸러미이다. 지상의 예수께서는 그분의 생애가 다할 때까지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께 순종할 더 새롭고 더 나은 길을 모색했을 것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더욱이, 우리 중 대부분이 시행착오를 통해서 무언가를 배우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그런 식으로 배웠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히브리서 4:15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께서는 그분의 지상 생애 동안 도덕적인 실수나 기타 실수를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이와 함께, 예수께서 가르치고 섬기셨던 백성들의 무정한 태도에 자주 놀라고 고통 받으셨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때때로 그분께서는 우시기까지 했다. 그분은 참으로!
사려 깊으셨던 분이셨기 때문에 분명 이런 경험을 통해서 뭔가를 배우셨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인류를 위해 바치신 것은 십자가에서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참으신 시험의 광야나 겟세마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매일의 경험은 그분의 생명을 쏟아 붓는 것이었고, 그분은 매일 고난을 통해 순종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예수님의 생애는 온전한 신뢰의 생애였으므로 하늘과 땅을 위한 그분의 봉사에는 실패나 주저함이 없었다. 그분은 인성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했기 때문에 인간이 당해야 할 모든 시험을 맞아 저항하실 수 있었다.”(Visitor, October 2, 1912).


순종의 의미:

히브리서 10:5∼7은 예수님의 순종이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한다. 예수님의 순종은 십계명에 대한 문자적 순종이 아니라 어떤 형태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분의 희생적 순종이라는 주제는 다른 성경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나(빌 2:6∼8; 막 8:31; 10:38; 눅 12:50; 요 10:17), 아마도 로마서 5:19에 가장 분명하게 묘사돼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을 위한 희생 제물로서 고난당하고 죽으시는 것이었다. 십자가는 이런 순종의 부름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이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5, 7). 또한 다수의 학자들은 히브리서 5:8의 순종이 7절의 “경외하심”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주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이 이것이 옳다면, “경외하심” 또는 경건이 곧 고난에 나타난 순종이다.
“받으신 고난으로.” “배우다/고난당하다”(헬라어 에마쎈/에파쎈)에서 말놀이를 쉽게 인식할 수 있지만, 여기서 고난은 단순히 배움과 관련된 통상적인 어려움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된 고난의 모든 국면 곧 육체적, 종교적, 사회적, 심리적 및 정신적[영적] 고난을 포함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 완전을 배우고 이루셨다는 개념이 많은 현대의 독자들에게 어려운 개념이라는 점은 이해할 만하다. 이 본문의 목적은 고난을 미화하려는 데 있지 않고, 죄된 세상에서 고난이 인간 본성의 특징을 이룬다는 것을 논증하려는 데 있다. 지상의 예수님을 참으로 인간으로 만든 것은 그분이 고난을 수용한 데 있다. 예수께서는 고난에 대한 이런 견해를 가현설[3]이라는 이단과 날카롭게 대조하신다. 가현설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실제로 고난당하신 것이 아니라 고난당하시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히브리서는 예수에 관한 이런 피상적인 이해를 거부한다. 예수가 참으로 인간이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그분이 고난을 남김없이 수용하셨기 때문이었다.


신학적 해석:

F. F. 브루스(F. F. Bruce)가 말한 대로, 히브리서 5:8의 중심 취지는 예수께서 “이 땅의 인간 삶의 상황 속에서 실제로 순종이 의미하는 바로 그것을 배웠다.”는 것이다.[4]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는 인간이 하는 방식대로 순종을 배웠다. 그러나 그분이 경험한 것은 인간 존재가 경험했거나 앞으로 경험할 것을 훨씬 초월한다. 히브리서 5:8은 고난을 그리스도인 생애에서 성장할 기회로 보라는 초청이다. 이 본문은 또한 고난을 자비롭고 온전한 봉사에 이르는 길 곧 비아 돌로로사(“고난의 길”)로 받아들이라는 초청이다. 이는 예수님의 경험에서도 나타났듯이 특히 그러한 봉사에 고난이 요구될 때 그러하다. 포로수용소이든 대재난인 쓰나미이든 인간의 공동 운명인 고난만큼 인간을 한데 묶어 주는 것은 없다. 다른 사람을 위한 우리의 봉사는 우리가 그들의 고난에 대해 갖는 동정심의 정도만큼 온전하고 자비로울 수 있다.

<신약의 중요한 사본들>

1. 바티칸 사본: 4세기 중엽에 기록되었고 15세기 이래로 혹은 그전부터 로마의 바티칸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이것은 현존하는 신약 사본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며, 원래는 구약과 신약뿐 아니라 위경의 일부도 포함했다. 현재 이 사본에는 창세기의 대부분과 시편의 일부, 히브리서의 일부, 그리고 디도서, 디모데전후서, 빌레몬서, 요한계시록의 전체가 빠져 있다.
2. 시내 사본: 4세기부터 존재함. 이 사본은 1844년 콘스탄틴 폰 티센도르프(Constantin von Tischendorf)에 의해 시내산 기슭에 있는 성 카테리나 수도원에서 발견되었다. 1859년에 시내산에서 러시아로 옮겨진 후 1933년 영국 정부가 소련 정부로부터 100,000파운드를 주고 구입하였다. 원래 그것은 구약과 신약 전체를 포함했는데, 헬라어 구약(<70인역>)의 절반쯤과 신약 전체와 위경의 몇 책만 남아있다.
3. 알렉산드리아 사본: 5세기의 사본. 이것은 1627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알렉산드리아에서 구입하여 영국 왕 찰스 1세에게 바친 사본이다. 원래는 구약과 신약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마태복음, 요한복음, 고린도후서 등이 빠져 있다. 이것은 시내 사본과 함께 영국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P. Richard Choi


<미주>


[1] 카이애즘(헬라어 문자 키[X]에서 유래한 말)은 어떤 문장이나 더 큰 문학적 단위에서 대구되는 단어나 개념의 순서가 역전되는 것을 가리킨다. 예컨대, 마가복음 2:27를 보라.

B 사람      사람 B’
A 안식일     안식일 A’

[2] F. F. Bruce, The Epistle to the Hebrews, rev. ed.,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1990), 130.
[3] 가현설은 그리스도 교회의 초기 이단으로, 예수는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보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4] Bruce, 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