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코로나 사태를 대하는 크리스천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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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원영 교수는 전염병 대유행의 시대, 루터에게 배우는 교회의 역할과 책임을 조명한다.
이 글은 지난 4월, 「신학과 학문」(제22권, 제3호 [2020])에 “전염병 대유행 시대에 대한 루터의 이해와 교회의 역할과 책임”이란 제목으로 게재한 논문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 편집자 주 –

봉원영 교수(삼육대 신학과)

■ 들어가며
지난 2019년 12월, 중국의 후베이성 우한(Wuhan)시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 이하 COVID-19)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폭발적으로 진행되면서 온 지구촌을 불안에 휩쓸고 있다.

2020년 4월 29일 현재, 200개 이상의 국가와 지역에서 313만 건 이상의 감염 사례와 21만80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되었으니, 지구 역사상 최악의 어떠한 전염병과도 견줄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될 만하다.

이것은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 코로나 바이러스 2(SARS-CoV-2)에 의해 발생하는 전염병으로, 감염되면 대부분의 경우에 경미한 증상이 발생하지만 일부는 바이러스성 폐렴 및 다기관 부전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보건기구(HWO)는 지난 3월 11일, 세계적 대유행을 의미하는 팬데믹을 선언했고, 미국 역시 확진자 수가 1600명을 넘어가자 이틀 후인 13일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사태가 빨라도 7,8월까지는 계속될 것으로 예상하면서 ‘미국을 위한 대통령의 코로나19 가이드라인’을 직접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위생수칙, 여행과 쇼핑을 가급적 피하라는 내용뿐 아니라, 10명 이상이 모이는 모임을 금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COVID-19로 인해 전 세계는 그야말로 공포와 패닉이 확산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의 건강을 위협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로 인해 앞으로 닥칠 경제적 대공황에 대한 공포가 전 세계의 금융시장에 타격을 가하고 있는 모습이다.

전 세계적으로 이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생계와 관련된 필수적인 업무나 직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집에 머물도록 하는 자택대피 행정명령(Stay-at-Home order)이 시행되면서 결과적으로 자영업자들과 소상공인들이 매출 급감으로 인해 생계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이에 따라 갑자기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생겨나 역사상 최악의 실업대란과 경제하락이 발생하고 있다. 전 세계의 주식이 폭락하는 가운데, 누구도 이 범유행(pandemic)의 상황이 언제 끝날 것인지에 대해 막연한 유추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은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COVIS-19의 감염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정치계는 종교계를 향하여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 차원에서 오프라인의 종교집회를 당분간 멈추어 달라고 호소할 정도가 되었다. 따라서 개신교를 포함한 천주교와 불교 등은 실제적인 모임으로서의 모든 종교적 집회를 잠정적으로 중단하고 온라인을 통한 예배나 미사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우에,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신천지)이나 일부 개신교 안에서 대규모 집단 발병 사례가 확인되면서 교회나 특정교단이 오히려 이 바이러스의 수퍼 감염지로 인식되어 종교계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더욱 곱지 않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것은 향후 교회의 선교적 노력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중에도 건물로서의 교회건물 안에서 밀집예배를 고집하는 일부 보수적(?) 교인들로 인해 교회 안에서도 분란이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14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전역을 강타했던 흑사병(Black Death)이 최근에 다시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고 있다. 중앙아시아나 동아시아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이 흑사병은 당시의 실크로드(Silk Road)를 따라 1343년에 크림 반도(Crimean Peninsula)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는 제노바 상선을 통해 검은 쥐에 살던 벼룩이 자연스럽게 지중해 분지 전체로 퍼졌고, 이탈리아 반도를 통해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인류의 비극적인 재앙은 유럽 인구의 30-60%를 죽게 했는데, 이 흑사병으로 인해 14세기에 약 4억7500만 명이었던 세계 인구는 3억 370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렇게 줄어든 유럽 ​​인구가 이전 수준으로 다시 회복하는 데는 200년이 걸려야 했다.

이 흑사병은 1347년에서 1351년까지 유럽에서 정점에 도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탈리아의 피렌체(Florence)와 같은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19세기까지 회복이 되지 않은 채로 있었다. 이 기간 동안에 중세 가톨릭과 개신교 역시 흑사병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16세기 초, 독일의 비텐베르크(Wittenberg)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전염병 감염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1527년 7월말부터 10월말까지 함께 모이는 사역을 중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전염병 시대를 경험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과연 어떠한 사회적 책임의식을 가지고 교회로서의 바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은 16세기 이후에 COVID-19으로 인해 온 세계가 팬데믹인 지금의 상황에서, 이제 교회가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때가 되었다.

따라서 본 글은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의 마르틴 루터를 중심으로 전염병의 상황에서 당시의 교회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살펴보면서 오늘날의 현대적 교회가 이 사회의 현실적인 공적 담론으로서 인식되고 있는 COVID-19에 대한 책임과 역할을 논의해 보고자 한다.

■ 흑사병과 중세 사회
사실 흑사병이 처음 발병했던 14세기 초는 물론이고,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종교개혁의 시기에도 여전히 이 병의 발병 원인을 아무도 확실히 알지 못했다. 기록에 의하면 독일의 경우, 1339년에 흑사병이 독일의 서부 도시인 림부르크(Limburg)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사람들은 감염증상이 나타난 이후로 사흘 째 되던 날에 죽었으며, 림부르크에서만 어린 아이들을 제외한 24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가운데 28%의 주택 소유자와 지방의회의원의 35%가 이 흑사병으로 죽었다. 또한 적어도 40%의 교구 성직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이처럼 가뜩이나 끔찍한 사망자 수의 계속되는 증가 외에, 특별히 이러한 사제들과 다른 성직자들의 죽음은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상실과 전통적 관습의 권위하락에 대한 우려로 이어지게 되었다.

당시에 흑사병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과학적 차원에서 시작되기는 했지만, 학자들은 그러한 치명적인 해(害)의 원인에 대해 분명히 밝혀내지 못했으며, 다만 이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의 능력이 성직자들과 더 넓은 민중들을 보호하지 못하자, 사람들의 공통적인 인식 속에서 흑사병은 하나님이 벌로 휘두르는 심판의 도구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어떤 사람들은 이 병을 성경의 역병과 동일시하면서 시대의 종말로 보기까지 했다.

크리스텐돔(Christendom)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그 시기는 교회의 권위와 판단이 어떤 것보다도 위에 있었던 때였으므로 당시의 교회가 이 흑사병의 원인을 신앙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심판으로 간주하자, 이러한 이해로 인한 반응과 해결책이 교회와 대중들 속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그 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들 두 가지는 성직자들의 탄원(rogation)과 채찍질 고행단(Flagellants)이었고, 때로는 특정 민족에 대한 반항적 감정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1. 성직적 치료(Clerical Cure)
가톨릭은 참회에 대한 하나님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된 하나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탄원 혹은 기원의 날(Rogation Days)로 불리는 것으로서, 이 기간 동안 특별한 기도와 참회가 이루어졌으며 전에는 예수의 부활일 전 3일 동안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처럼 매년 정해진 기간에 정기적으로 진행되기도 했지만, 큰 재난의 시기에 필요에 따라 시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의식은 특정한 성도들이나 성일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들의 권위에 대한 확증으로써 더 많이 작용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전염병이 시작되자마자 나타났던 교회의 첫 번째 반응은 하나님의 분노를 진정시키고 사람들에게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이 의식을 통해서 전염병을 없애고자 시민 대중과 함께 행렬하며 미사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이 의식에는 일반적으로든 특정한 이유로든 하나님의 도움에 대한 간청이 적절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역병을 방지하기 위해 특별히 불린 행렬에 대한 별도의 기록은 없지만, 그들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당시의 표준 기원의 날 순서를 진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데, 오히려 흑사병과 관련하여 진행되었던 이 순서에서 다른 것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것은 성인에 대한 유물과 탄원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기원을 위한 의식에서는 당시 독일에서 유명했던 성 세바스찬(St. Sebastian)이나 생 로흐(Saint Roch)와 같은 흑사병 성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말로 그렇다고 하면, 이러한 성인들에 대한 존경과 숭배조차도 그들이 그토록 절실하게 희망했던 질병으로부터의 보호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어떤 급진적인 변화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 채찍질 고행단(Flagellants)
채찍질 고행단의 출현은 전염병이 하나님의 심판으로써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고행을 통해 하나님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논리에서 시작되었다. 노먼 콘(Norman Cohn)은 이것을 “하나님의 심판을 유보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막대를 거두어 죄를 용서하게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다음 삶(생)에서 경험하게 될 수도 있는 더 큰 형벌을 면하기 위한 희망으로써 자신에게 가하는 끔찍한 고문”으로 정의한다.

채찍질 고행단은 또한 개인으로서 축적된 죄에 대한 처벌을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분노의 짐을 지고 있는 것을 덜어 주려고도 노력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분노를 다수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소수의 사람들에게로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전염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의 희망과 바람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특별히 독일 지역에서 더 많이 나타났는데 그 참여수가 경이로울 정도로 많았다.

흑사병으로 인한 무수한 죽음에서 오는 큰 슬픔에 대항하여 채찍질 고행단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죄를 뉘우치고 [구원]하는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찬사를 받았는데, 결과적으로 이 공동체는 거의 매일 성장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도시의 많은 사람들, 즉 평신도들과 사제들 모두 채찍질 고행단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그 중에서도 학식이 있는 배운 사제들은 이 그룹에 거의 합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 채찍질 고행단이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당시의 절망에 대한 극단적인 반응처럼 보일 수 있지만, 중세 사람들에게는 참회적인 순례자들이 스스로에게 하는 채찍을 통해 고통 받는 피의 광경 그 이상의 것을 상징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의 인기는 단순히 피의 채찍질로 인해 대중의 눈길을 끌었던 행위 때문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나 참여하는 사람 모두에게 자신들을 보호하지 못한 교회적 규범에서 벗어나 참회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목도하게 하는 능력에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행위는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과 보다 즉각적이고 친밀한 영향력의 관계를 맺기 위한 배출구로서 중세 사회를 자극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채찍질 고행단의 성장은 탄원의 날 의식을 통해 전염병을 없애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실패한 인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교회는 지난 천년 동안 발전해 왔던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자 했다. 그러나 역병의 무자비한 지배 아래 고통 받고 있었던 대중에게는 성직자들의 그런 대책들이 충분했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전염병이 하나님의 분노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분명해지면서, 그들은 점점 더 사제들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3. 반유대주의적 감정의 표출
흑사병의 원인을 종교적으로 찾고자 했던 중세인들이 그것의 또 다른 원인으로 지목했던 것 중의 하나는 십자군 전쟁의 실패였다. 어떤 이들은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한 것이 흑사병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십자군 전쟁 그 자체가 중세교회의 반유대교적 모습을 보인 것이었음을 생각할 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은 중세교회가 유대교에 대한 타자화를 이루게 하는 논리적 근거의 시작이 되었다.

1189년 영국의 두 도시에서 발생했던 유대인 학살 사건은 유대인들이 왕을 살해하려 한다는 음모로 인해 시작된 것이었다. 이후에 중세교회는 유대인에 대한 보호의 명목으로 그들만의 거주 지역을 별도로 제공했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에 대한 제도적인 차별을 시작한 것임을 뜻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중세시기에 유대인들에 대한 반대적 감정은 계속해서 발전해 나갔다.

흑사병의 시기에 유독 유대인들의 감염과 발병률이 낮았는데 이것은 다시 중세인들에게는 그들에 대한 좋은 핍박의 이유가 되었다. 흑사병은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는 소문으로 인해 다시 그들에 대한 심각한 핍박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유대인들과는 어떠한 상업적 거래나 계약을 하지 않으려 했고, 더 나아가 1349년에는 독일의 한 도시에서 3000명 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화재로 전소되는 등 곳곳에서 집단적 학살의 시도까지 생겨났다. 하지만 그 당시에 유대인들의 감염률이 낮았던 것은 그들이 손을 자주 씻는 습관과 사망과 즉시 시신을 바로 매장하는 율법적 관습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유대인에 대한 루터의 후기 평가 역시, 당시의 이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이것은 루터의 생애에서 큰 쟁점이 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루터의 사역 초기에는 유대인들을 복음증거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께서 유대인으로 출생하셨음을 그의 논문으로 증거 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들에게 신사적으로 대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로 전향하는 것에 적극적이지 않자, 여러 논문들을 통해 유대인들은 복음을 잘못 사용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수용할 수 없는 풍습들을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지적했다. 심지어는 부적절한 심한 표현까지도 사용하면서 유대인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1536년에는 작센의 선제후가 유대인들의 선거권을 박탈하고 그들을 아내고자 했을 때, 당시 유대인의 대변인격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요엘 폰 로세임(Josel von Rosheim)이 루터에게 중재의 도움을 요청했으나 그가 이를 거절했는데, 이것은 루터가 유대인에 대한 자세가 완전히 바뀐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III. “그리스도인이 치명적인 흑사병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가?”

1. 전염병과 마틴 루터
마틴 루터가 거주하는 비텐베르크에도 흑사병이 찾아들었다. 루터가 이미 다양한 예방적 조치를 취하기는 했지만, 1527년 8월이 되면서 전염병이 독일의 비텐베르크에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 병으로 인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마을에서는 그곳을 피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마을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이때 작센의 선제후인 부동의 요한(John the Steadfast)은 루터에게도 역시 전염병을 피해 에나(Jena)로 떠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그는 그 명령을 거절하고 여전히 비텐베르크에 머물면서 목회자로서의 말씀과 섬김의 사역을 계속했다. 또한 당시 임신하고 있었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와 함께 아픈 사람들을 위한 병동으로 자신의 집을 개방하기도 했다.

그런데 루터가 이러한 반응을 보였던 바로 그 때에, 루터 자신이 이 흑사병으로 인한 개인적인 아픔을 가지고 있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루터는 이미 20여 년 전에 흑사병으로 인해 자신의 두 동생, 하인츠(Heintz)와 베이트(Veit)를 잃었던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두 동생의 죽음은 루터가 수도사로서의 서원을 했던 1505년 7월 2일 직후의 일이었다.

루터의 아버지는 수도사가 되겠다는 그의 말에 엄청나게 분노하며 반대했지만, 그것이 루터의 결심을 흔들지는 못했다. 오히려 두 동생의 죽음이 그의 결심을 더욱 굳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1517년 루터가 개혁을 일으킨 이후에 수도원을 탈출한 수녀였던 카타리나와 결혼하여 슬하에 각각 3명씩의 아들과 딸을 두었다. 그러나 1527년 8월에 다시 흑사병이 비텐베르크에서 창궐했을 때, 큰 딸 엘리자베스(Elisabeth “Elslein”)를 8개월 만에 잃고 만다.

큰 딸의 죽음이 있었던 1527년의 비텐베르크는 흑사병으로 인해 거의 초토화된 상태였다. 너무나 치명적이고 끔찍한 질병이었던 이 전염병은 희생자들을 매우 빠르고 고통스럽게 죽였는데, 높은 열과 크고 울어대는 종기를 일으켰다. 그것은 전염성이 아주 강했고 천문학적인 사망률을 가지고 있었다. 예르시나 페스티스(Yercina Pestis)에 의해 발생하는 이 세균성 급성 열성 전염병은 감염성 벼룩에 의해 전염병이 전파되었고 또한 공기를 통해서도 전염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 질병의 원인이나 전염 방식에 대해서는 흑사병이 처음 발생했던 1347년으로부터 약 200년이 지난 1527년까지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병든 사람이 주변에 있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의 한 의사는 “환자의 눈에서 빠져 나오는 공중 정체가 가까이에 서서 병자를 보고 있는 건강한 사람을 치면 즉각적인 사망이 발생한다”고 그저 막연하게 이론화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능한 “병자와 떨어져 있으라”는 통념을 만들어내게 했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역사가들은 그 당시의 건강한 사람들이 역병의 감염을 피하기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고 평가한다. 그들은 병들고 죽어가는 도시를 떠나 도망쳤고, 가게들은 문을 닫았다. 의사들은 환자들을 보는 것을 거부했고, 성직자들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마지막 의식을 행하는 것마저도 거부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루터의 비텐베르크 탈출에 대한 거부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는 병든 사람들을 계속해서 섬겼고, 말 그대로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2. 흑사병으로부터의 도피에 대한 루터의 답변
흑사병이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에 이르기 2년 전인 1525년에 독일의 다른 도시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먼저 흑사병이 도시를 덮치게 되었다. 그러자 도시는 조례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도시를 떠날 것을 명령하였다. 사람들이 그렇게 도시를 떠나갈 때, 하나의 질문은 ‘전염병의 죽음을 피해 과연 목회자도 강단을 비운 채 피난을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도시의 한 목사는 루터에게 이 상황에서 과연 그리스도인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치명적인 흑사병의 상황으로부터 떠나도 괜찮은지를 묻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에 루터는 1527년 “죽음을 피해 도망쳐야 하는지(Whether One May Flee From A Deadly Plague)”라는 글을 써서 그에게 답장으로 보냈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COVID-19)가 사람들의 일상을 바꾸고 공포와 불안으로 몰아놓고 있는 상황에서 현대의 기독교는 그 때의 마틴 루터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치명적인 재앙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가?”라는 편지에 대한 그의 답장에서 그는 이웃을 돌보는 것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그는 지역사회 공동체에 대해 언급했고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봉사와 섬김의 선물됨을 강조했다.

마틴 루터는 (사실 다윗 왕이 사울과 압살롬에서 도망했던 것처럼)죽음의 위협에서부터 도망하는 것이 반드시 잘못은 아니라고 했지만, 공동체와 가족의 책임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자신의 견해를 설명했다. 떠나기 위해서는 이웃을 돌봐야 한다는 것이 그의 대답의 요지였다. 그러나 당사자에게 병자를 돌보고 간호할 나 외의 다른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면, 누구든지 자신의 보호를 위해 그 이웃으로부터 과감히 떠날 수도 있다고 했다.

사람은 아무도 자신의 고난 중에 다른 사람을 함부로 버릴 수 없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결속되어 있어서, 자신이 도움을 받고자하는 것만큼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살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루터는 자신의 믿음과 상관없이 우리가 “서로 결속되어 묶여있다”고 확신했다.

“커뮤니티 확산(community spread)”이라는 표현이 분명하게 의미하듯이, 우리가 하는 행동과 선택은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맥락에서 루터는 예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오늘날 질병관리 및 예방 센터(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의 가이드라인과 매우 유사한 조언으로 사람들에게 약을 복용하고, 집을 소독하고, 사람과 장소를 피하여 질병을 퍼지지 않도록 하라고 촉구했다. 물론 이것은 주변에서 누군가의 지원이 필요하지 않은 경우에만 사람과 어느 특정한 장소로부터 피하라는 권고였다.

루터는 위기상황에서 공직자들의 특별한 책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사실 이들은 전염병의 영향을 받는 지역에 책임 있는 방식으로 머물러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들의 권위는 지역 사회 공동체를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조건으로 인정받고 또 행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루터에게 있어서 공공 서비스(public service)는 바로 봉사이고 섬김(service)이었다. 선견지명을 가진 것처럼 루터는 병원의 이점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병원이 실무자들로 채워져 아픈 사람들을 돌볼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있어서 각 집안에 격리되어 있던 아픈 환자들이 병원으로 올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이 바라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루터 시대에는 이런 병원이 거의 없었는데, 루터의 이 편지에서는 당시의 모든 시민이 각자의 집 안에서 병원에서나 가능한 치료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루터는 경건을 간단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정의했다.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길은 분명 이웃을 섬기는 것이었다. 그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 복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루터가 구원이 이웃에게 선행을 실천하는 것과는 별개의 것임을 강조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루터는 비극적인 전염병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과연 떠날 것인지 아니면 남을 것인지에 대해서 “자신의 결정과 판단에 따라” 결정하라고 권고한다.

이는 루터가 겸손히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는 기도와 말씀 묵상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 결정을 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병든 사람들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을 향한 선을 행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옴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