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대면한 후에 모세의 얼굴은 사람이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광채에 휩싸였습니다. 요셉은 노예로 있는 중에도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해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겠습니까?’라고 고백하며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누군가를 만나고, 새로운 것을 깨닫는 것은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만난다면 우리의 삶에 그 자국이, 그 영향이 남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에베소서 4-6장은 1-3장에서 만난 하나님을 통해 변화된 삶의 모습을 제시합니다. 이 가운데 인간 관계가 다뤄지는데, 특이한 것은 인간관계를 하나님과의 관계와 굳이 결부시킨다는 것입니다.
5장 후반에서는 부부 관계에 대한 창세기 구절을 인용하며, 부부의 관계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의 신비를 말해주는 은유법이라고 제시합니다. 그리고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서 있는 원리를 부부간의 관계에 대한 지침으로 제시합니다. ‘은유법’은 하나의 실물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적 사물이나 식물 등이 매체로 사용되는데 익숙한 우리에게 실생활의 관계가 그 매체가 된다는 것은 신비로운 접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모본으로 삼는 것은 부부 관계 외의 다른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됩니다. 부모와 자식, 주인과 종의 관계를 다루면서 바울은 몇 번이나 반복해 주님 안에서, 혹은 주님의 방법으로 대하기를 권하며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 같이” 행하도록 강조합니다.
특별히 6장에서 ‘주님’과 ‘그리스도’를 구분하여 각각 다른 맥락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을 주의 깊게 읽어보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순종해야 한다는 당연성이 들어가는 맥락에서(6:1, 4, 7, 8, 9, 10), “그리스도”는 우리의 행동의 모본으로 제시될 때 사용합니다(6:5, 6). 현대에 들어 예수님의 친근성이 부각되지만, 우리의 친구이시기도 하신 그분이 우리가 섬기며 순종할 주님이신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같은 원리는 언급된 몇 관계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5장21절에서 복종의 대상은 모든 성도를 일컫지요. 6장5~8절에서는 노예의 순종하는 자세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 자세와 그에 따른 상급을 노예뿐 아니라 자유민 모두가 행하며 받을 것으로 확장해 적용하며 주인도 마찬가지의 자세를 갖도록 촉구합니다(6:9). 다시 말해 구체적인 행동이 다르게 나타날 수는 있지만, 모든 인간관계 원리는 동일하게 인간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원리를 삶에 적용하고자 하면 여러 가지 실제적인 고민에 봉착합니다. ‘상대방이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닌데? 남편이 예수님과 같이 행동하지 않는데도 복종해야 할까?’ 에베소서의 가르침에 이에 대한 답변이 구체적으로 들어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지켜야 할 표준과 원칙을 매사에 주님과 연결해 제시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꾸준히 하나님 안에서 고민하도록 합니다.
답변을 찾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정신 그리고 행적을 생각하며 ‘하나님은 나에게 어떻게 하셨는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고 또 다른 질문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에 따라 예수님의 행적과 성품, 정신을 계속 묵상하게 되고, 깨달은 것을 삶에 적용하면서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지요(엡 5:1 참조).
너새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단편 소설 <큰 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이 생각납니다. 주인공은 ‘큰 바위 얼굴’을 항상 바라보며, 그와 닮은 위대한 사람을 만나기를 끊임없이 바라며 기다립니다.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가 실망하기도 하지만, 큰 바위 얼굴을 다시 보면서 그 기대와 기다림을 멈추지 않지요.
그렇게 몇십 년이 흘렀을 때, 사람들은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던 그가 바로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표준들이 어렵게 느껴진다 해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질문하며 답을 찾아갑시다. 그러면 그 노력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알며 그분을 닮아가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이 외에 상고할 만한 몇 가지 사항을 짧게 나누겠습니다.
1) 6장4절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가르쳐 기른다’는 뜻의 단어 ‘교양’(敎養)이 요즘에는 잘 쓰이지 않기 때문에 이 문장을 좀 어렵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원어로 이 단어는 전반적인 훈련, 혹은 단련을 뜻합니다. ‘훈계’는 특히 생각과 정신을 바로 세우기 위한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훈계하되 “주의” 가르침이 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을 통해, 자녀를 교육하되 인간적 감정과 생각이 아닌 주님의 뜻을 가르칠 필요성을 되새기게 합니다.
2) 6장11~17절. 11절과 13절에서 “전신갑주를 입으라/취하라”는 부분이 반복되면서, 단연 이 문단 가운데에서 중심적인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은 그 두 절의 사이에서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할 이유를 제시합니다. 4~17절에서 전신 갑주의 세부 내용은 분사(分詞, participle) 형태로 기록되면서 다른 주 동사 “서다”에 덧붙여지는 구조를 가집니다.
‘서는 것’은 11절과 13~14절에서 세 차례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대항하다”를 포함하면 네 번)반복되면서 이 부분에서의 중요성을 또 한 번 보여줍니다. 이렇게 사용한 의도를 짐작하자면, 전신 갑주는 그 자체로 훌륭한 것이 아니라, 끝나지 않는 전쟁에서 무너지지 않고 버티어 서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궁극적 의미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3) 6장19~20절.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도록 기도해주기를 독자들에게 요청합니다. ‘담대하게 말하는 것’은 오순절에 주어진 성령의 역사로부터 시작해 마지막 절에 이르기까지 사도행전에서 여러 차례 강조되는 내용입니다 (행 2:4 “성령이 말하게 하심”이라고 번역된 이 부분은 사실상 “성령이 담대히 말하게 하심”이라고 번역되는 것이 맞습니다; 28:31). 진리를 알고 믿는다 해도 그것을 매사 담대히 전하는 것은 꾸준한 기도와 성령의 역사가 필요한 일입니다.
에베소서는 참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흐름을 가지고 통일되게 쓰인 것 같습니다. 1장19절에서 하나님의 ‘힘의 강력’이 언급되는데, 원어로는 같은 단어들이 “힘의 능력”으로 번역돼 6장10절에 다시 등장합니다. 1장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소개했는데, 아무리 뛰어난 그분의 능력이라도 각 개인에게 적용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6장10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지라고 하지요. 우리가 읽으며 상고한 말씀이 영적 대쟁투를 하고 있는 우리에게 실제로 힘을 주는 말씀들로 살아 역사하길 바라보며 시리즈를 마칩니다.
그간 8회에 걸쳐 게재했던 <마은영의 ‘헬라어로 읽는 에베소서 특징’>의 연재를 오늘로 마칩니다. 그동안 바쁜 일정에도 매주 옥고를 보내주신 저자 마은영 님과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