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봉원영 교수 ‘한국 재림교회의 공공신학 이해와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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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원영 교수는 ‘한국 재림교회의 공공신학 이해와 실천’을 제목으로 전한 주제발표에서 안식일의 신학적 측면을 통한 공공신학적 사회윤리 이론을 소개했다.
I. 서론
일반적으로 공공신학에서 말하는 공공성은 복음과 교회, 신학이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영역인 공적 삶과 관련이 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지금까지 전통적인 범주 안에서 공공(public)은 신학의 외부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신학은 교회 이야기, 하나님 이야기여야만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이야기, 교회 이야기를 실천하는 장소가 곧 일상의 삶의 터전이기에 그것은 곧 공공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공신학은 공공을 신학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말이 아니라, 신학이 실천되고 이루어져야 할 장소가 바로 공공의 영역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학교나 직장, 가정과 같은 일상의 다양한 터전인 공적인 장소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어떻게 실천하고 전달할 수 있을까?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끼리 주고받은 그 감동적인 이야기를 어떻게 학교와 직장에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공공신학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마틴 마티(Martin Marty)가 1974년 처음으로 공공신학이란 용어를 사용한 이래, 교회 안에서 공공신학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의견들이 있었다. 그것은 성서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차별화되는 각 교단의 스펙트럼만큼 다양하고 넓다.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전통적으로 보수적 입장을 취했던 기독교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공적 영역에서의 사회 참여적 주장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현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의 종교계의 재구성이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이에 따라 교단적 차이의 중요성은 과거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고 종교적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사이에서 긴장 관계가 새롭게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양극단의 중간 지대에 더 많은 다수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주의적 진영에서는 공적 영역에서의 정중한 사회 참여를 위한 매우 건설적인 내용들이 제안되었다.  

또한 비교적 진보적인 개신교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대안들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처럼 기독교의 사회적 적용에 대한 다양한 관심사와 방법은 자연스럽게 여러 실행 가능한 모델들을 발전시켰다. 크게는 종교적 역할 이해와 공공신학의 방향과 흐름 그리고 공공신학의 실행 방법 등 세 가지 관점에서 공공신학의 모델을 구분할 수 있다. 이 중에서도 주의 깊게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공공신학이 실행되는 방법에 따라 구분된 공공신학의 모델이다.

첫째는 공개모델로, 이것은 신학의 공적인 역할을 스스로를 세상에 드러내신 하나님이 주도하는 과제로 규정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부터 당신의 사역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고 대답하였다(요 18:20). 예수께서는 회당과 성전, 그리고 야외 등 어느 곳에서나 설교하고 가르치고 토론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전파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증거하셨다. 공개모델은 하나님의 공적인 실존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당신의 방식으로 드러내시기 때문에, 교회 역시 그 신앙을 공개적으로 입증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둘째로는 보편적 모델이다. 이 모델은 기독교의 언어가 세상과 소통이 쉽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특정한 공공정책에 대한 지지나 주장을 위하여 직접적으로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도 있지만, 기독교적 배경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그러한 근거들이 불편할 수도 있음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자연신학이나 일반계시에 근거해서 그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는 방법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교회는 공적 영역에서의 삶에 개방적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입장은 종교적인 이성을 포함해서 일반의 시민들이 생각하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성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편적 모델의 구체적 예로서, 신학의 재구성을 통해 흑인, 여성, 토착민 등의 특정 사회 집단의 경험을 회복한 많은 다양한 이론들을 들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신학은 더 이상 신앙의 고독한 지식인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담론의 민주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입장은 현재 미국을 포함한 공공신학의 주류적 관점을 보이고 있는데, 데이비드 트레이시(David Tracy)는 이 모델과 관련하여 가장 대표적인 학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모델을 트레이시 모델이라고도 표현한다.

트레이시는 대중이 어느 하나의 특성만으로 공통된 동질적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전통, 가치, 그리고 가정(assumptions)을 가진 다양한 사회적 현실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신학자는 그 신학이 쓰이는 주요 대중에게 신학을 맞출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학문, 교회 및 사회 이 세 가지를 공적 영역의 주요 구성요소로 구별하면서 이 세 영역 모두에서 설득이 가능하도록 독특한 형태의 담론과 근거(warrant)를 활용하는 다양한 신학분야가 개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는 사실적 모델이다. 이 모델의 입장에서는 신학의 공공성은 더 이상 의도적으로 추구해야 할 과제가 아니다. 이 모델은 신앙이란 자연스럽게 그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신앙이 굳이 의도적인 대중화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공개 모델이 다양한 종교와 신앙의 행동을 통해 가시성에 이른다는 것이고, 보편적 모델은 특정 범위를 넘어서 필연적으로 공공화 된다는 것이라면, 사실적 모델은 종교의 공개적 존재와 신학의 가능성을 독립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실증적 현실로 확대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두 가지 모델과 차이점을 보인다.  

미국의 기독교 진영에서 시카고학파가 교회 밖 공동체를 설득하기 위한 노력과 실천을 더욱 강조하는 반면, 예일학파는 우회적인 방법을 통한 교회 밖 공동체와의 조우를 주장한다. 예일학파의 로널드 티만(Ronald F. Thiemann)은 공공신학을 “기독교적 확신과 기독교 공동체가 살고 있는 더 넓은 사회문화적인 맥락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것을 추구하는 신학”이라고 이해한다.

로버트 벤(Robert Benne)은 교회와 사회의 구별되어야 함을 인정하면서도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주장하면서 하나의 종교적인 전통이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공적 맥락(public context)을 강조한다. 교회는 그것이 생성되기 이전의 사회적 정황과 문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종교적 전통은 오늘날의 사회적 문맥 속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벤의 이러한 이해는 예일학파의 입장과 유사하다.  

이처럼 미국 기독교의 보수적 입장을 표명하는 복음주의의 예일학파 역시 기독교 밖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향한 기독교적 변증의 어려움을 지적하면서도 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완전히 단절된 입장이 아니라, 그들과의 의사소통의 과정을 통하여 교회 밖 공동체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 사회를 변혁해 나갈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의 신학이 반드시 교회 내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며 세상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함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실행의 방법에 있어서는, 시카고학파가 공적인 영역에서 적극적인 담론과 대화를 통한 변증적 노력과 실천을 주장하는데 반해, 예일학파는 교회적 신학이 그 신학 나름대로 사회변혁의 방안이 된다고 이해함으로 차이를 보인다. 다시 말해, 교회가 교회다운 정체성을 바르게 유지할 때, 사회를 변혁하게 된다는 논리이다.

미국에서 복음주의적 입장에 더 가까운 보수적 성향의 현재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Seventh-day Adventist Church, 이하 재림교회)는 예일학파의 공공신학적 입장과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재림교회의 공공신학적 모델은 그 역할 이해의 관점에서는 포괄주의적 입장과 배타주의적 입장의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방향성과 흐름의 관점에서는 현대사회의 도덕성의 실종 문제를 바로잡고 선교적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독교적 정체성을 회복함으로 다원주의 사회에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또한, 공공신학의 주된 분야라고 할 수 있는 실제적인 실행 방법에 따른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실존에 바탕을 두고 복음 전파의 방식을 포함하여 다양한 방법을 통해 교회가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입증해야 한다고 보는 공개적 모델과 교회가 교회다운 정체성을 바르게 유지할 때 자연스럽게 사회 속에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의도적인 대중화 과정은 필요하지 않다고 보는 사실적 모델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재림교회는 공공신학에 대한 이론적 이해를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학적인 협의와 논의의 여지를 열어두고 있다. 본 연구는 다양한 신학적 이해들 가운데 재림교회가 사회적 책임 윤리의 동기로서 이해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지를 다루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들이 실제로 재림교회 안에서 어떻게 구체적인 신학적 동기로서 작용했으며 역사의 과정에서 나타난 유산의 결과들은 무엇이었는지를 다루는 것은 지면의 한계로 본 연구에서는 논외로 한다.  

II. 공공신학에 대한 재림교회의 신학적 이해
창조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등의 신학적 주제는 기독교 안에서 공적 역할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토대를 다룰 때 거의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신학적 가치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제들은 재림교회 안에서도 동일한 이해로서 적용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은 재림교회와 일반 개신교와의 공공신학에 관한 공통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안식일이나 선지자의 역할, 재림의 교리 등은 재림교회의 독특성과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신학적 교리로서 이해될 수 있는데, 재림교회는 이러한 교리들에도 교회의 사회적 책임 윤리의 정신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A. 안식일
지금까지의 안식일에 대한 대부분의 재림교회 연구는 주일 중 일곱 번째 날이 안식일이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신 도덕법의 일부로서 네 번째 계명이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항상 관련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에 집중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안식일의 의미, 안식일 교리와 사회적 양심의 관계 등에 대해서는 최근에서야 재림교회 신학자들의 글에서 나타나고 있다.

1. 안식일의 의미
사카에 쿠보(Sakae Kubo)는 재림교회 안에서 안식일 준수의 의미와 실천적인 그리스도인 생활과의 관계를 가장 먼저 지적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다. 쿠보는 안식일이 ‘세계의 생일’이라고 말하면서 안식일은 그저 어느 하나의 도시나 국가만이 아닌 ‘우주 전체의 축제’라는 안식일의 보편성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 보편적인 안식일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떠한 차별도 두지 않는데, 따라서 그것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의 임재는 어느 특정한 장소나 국가, 건물이나 사람들에로 한정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 우주 안에서 당신께서 창조하신 존재들과 접촉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는 어떤 것도 별도로 선택하지 않으셨다. 실제로 만약 그분께서 거룩하고 특별한 장소로써 어느 장소나 건물을 지정하셨다면, 이것은 그 근처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복과 혜택을 얻을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시간의 한 부분을 선택하셨다. 시간은 보편적이므로 어느 누구도 더 유리한 위치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과 더불어 모든 것은 평등하다. 그런 의미에서 안식일은 세계적인 축복이 된다.

그리고 정말로 안식일의 쉼에 대한 접근성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기 때문에 전 세계의 사람들이 평등하다면,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그들의 출신, 경제적 지위, 또는 성별에 관계없이 동일한 지위를 공유하는 이상적인 사회구조를 지향하신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안식일은 인간의 권리를 상정하고 매주마다 정기적으로 매우 강력하고 의미 있는 방법으로 그것들을 장려한다고 할 수 있다.  

2. 안식일 교리의 사회적 적용
안식일의 교리는 단순히 일곱 번째 날인 안식일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 교리는 그 주의 나머지 6일과도 관련이 있다. 안식일의 분위기와 원칙은 일곱 번째 날의 예배를 넘어 저녁 식탁과 거실로 확대될 뿐만 아니라, 일주일 내내 실천해야 할 안식일 태도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진정한 안식일은 생활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안식일은 일주일을 거룩하게 한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본질적으로 일주일 중 하루의 활동이 아닌 하나님께 대한 자세이기 때문에 월요일에 정직하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안식일을 지킬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안식일에 가져야 할 다른 사람들에 관한 관심은 그리스도인이 매일 활동해야 하는 삶의 방식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일주일 제도의 안식일로부터 안식년에까지 연장되는 안식일의 관심사는 불우한 자, 가난한 자, 과부와 고아들의 필요를 유대인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다(출 35:12-33). 이와 유사하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자, 불행한 자, 실업자, 그리고 기본적인 인권이 거부되는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더 큰 안식의 양심을 발전시켜야 한다.  

(1) 예수 그리스도와 안식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다시 인간과 어떻게 소통하시기를 원하는지와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떻게 의도하여 예배 공동체에 의미를 부여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최고의 모본이 되신다. 안식일의 주인(마 2:28)이신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분명히 하시기 위해 진력하였다. 예수의 시대에, 안식일은 자신들의 완벽함을 증명하고자 하는 여러 백성을 위한 합법적인 자기 의의 표현되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네 번째 계명의 거의 잊혀진 인도주의적 기능을 지적하셨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인도주의적인 봉사를 긴급한 상황으로만 제한했던 당시의 일반적인 법률 해석에 대항하기 위해, 이날 만성적인 질병을 앓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의도적으로 사역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구원의 역사 속으로 밀어 넣어 그날을 인류의 유익을 위한 날로 만드셨다(막 2:27).  

(2) 안식일과 평등성
안식일은 또한 모든 인간 사이의 평등을 가리킨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매주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모든 인간은 그 차이가 실제로 중요하지 않은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임을 기억하면서 안식일의 준수자들은 그들의 직업, 민족 또는 경제적 배경이나 교육 수준과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존중하도록 장려해야 한다. 안식일은 직업과 교육의 차이들이 가지는 중요성을 넘어선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주중에 우리를 구별하는 여러 가지 구조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모두가 대등한 존재로서 서로 사귀어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로서 서로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리처드 라이스(Richard Rice)는 안식일의 기본 개념이 자유에 대한 생각을 불러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생각을 한 걸음 더 확장한다. 결국 라이스는, 안식일이 자유의 날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러한 자유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도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네 번째 계명에 따르면, 종들도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안식일에는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종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각 사람은 각자의 정체성과 위엄 속에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인류를 위한 진정한 해방을 위한 수단이 된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해방 행위와 애굽의 속박으로부터의 구원을 기념하는 것이지만(신 5:15), 그것은 또한 죄로부터의 궁극적인 해방과 예수께서 안식일과 다른 모든 시간에 선포하시고 행사하신 모든 결과를 가리키기도 한다(눅 4:18; 13:16).  

(3) 안식일과 해방
찰스 브래드포드(Charles Bradford)가 “안식일과 해방”(The Sabbath and Liberation)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언급했듯이, 안식일은 최초의 위대한 자유 운동의 핵심에 놓여 있었다. 모세는 바로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였으나 이제까지 네가 듣지 아니하도다”(출 7:16). 이것은 노예가 된 백성들이 바로에게 했던 안식일의 쉼을 지키도록 허락해 달라는 직접적인 호소였다.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해방의 표시로 안식일을 다시 세우셨다(신 5:15). 그런데 브래드포드는 안식일의 쉼과 안식일 준수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 협정은 영구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호와 하나님은 결코 한 인간이 다른 사람을 압제하거나 한 국가가 다른 나라를 정복하게 하실 의도를 가지지 않으셨다.

브래드포드는 이사야 56장 1-7절에서 안식일을 보내는 태도에 대한 이사야의 묘사를 하나님의 선언 또는 하나님의 자유, 독립, 해방의 표시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선언문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난민과 같은 외국인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무능한 내시들 등과 같은 추방자들에게 적합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한 적용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안식일은 영속성의 표시이며 인간과 하나님, 그리고 인간과 동료 인간들, 그들의 형제자매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끊임없이 상기시켜 준다고 덧붙인다.

흑인 재림교인으로서 브래드포드는 미국의 흑인들과 제3세계 신학자들이 취했던 해방이라는 주제를 함께 다루고 있다. 그는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편에 서 계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며, 결과적으로 정의와 평등을 위한 외침을 보내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브래드포드의 이러한 견해는 그가 인간 문제에 대한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해결책을 독점적으로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브래드포드는 해방신학이 ‘문제의 근원을 얻는 것’을 의미하는 브래드포드의 정의에서 충분히 적절하거나 그 요구를 충족시키지 않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예수께서 전파하신 진정한 해방의 신학이 있다. 열방에게 완전한 자유를 약속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예수의 취임 메시지는 급진적이면서도 혁명적이다. 그리고 예수의 메시지는 안식일을 해방과 독립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궁극적으로 브래드포드는 하나님은 자유와 해방, 존엄성을 위한 분이며 모든 사람의 권한을 부여하시는 분으로 결론짓는다. 그러므로 지금은 모든 사람이 해방에 대한 하나님의 표징을 그들의 깃발로 삼을 때라고 강조한다. 쿠보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자유의 주제는 우리에게 구원과 해방을 상기시켜 줄 뿐만 아니라, 압박이나 비굴한 자들에게 그 축복을 전하도록 명령한다고 믿는다.

자기 자신만의 구속의 혜택을 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협력하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해야 한다(눅 4:18). 쿠보는 안식일 준수에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사회적, 인도주의적 측면이 포함되어 있음을 인식한다. 구속의 표시로서의 안식일은 인간 자신의 구원과 억압받는 자의 구원 모두 두 가지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신자는 억눌린 사람들에게 휴식을 가져다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재림교회는 지금까지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이 그들 자신의 공동체를 넘어서는 해방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교회 내에서조차도 평등의 원칙이 항상 엄격하게 실천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쿠보는 만약 재림교인들이 참된 교제와 진정한 평등을 실천하는 데 실패한다면 그들은 스스로를 안식일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드러내는 것이며 안식일의 교제와 평등의 표징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안식년과 희년 제도에서 발견된 안식일 사상의 확장은 거의 전적으로 인도주의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안식일에서 안식년까지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이 해방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염원이 진정한 안식일 원리의 가장 큰 관심사라고 할 수 있다(출 23:11, 레 25:10). 7년째 되는 해에 땅을 쉬게 하는 개념은 가난한 자와, 노예, 약자들에 대한 단순한 인권 이상의 권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안식일을 지킨다면 단지 자신의 구원과 회복, 해방에 대해서만 만족할 수 없게 된다. 사람은 정신적으로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이웃에 관한 관심을 나타내야 하며 안식일은 이것을 위한 적절한 기회를 제공한다.  

3. 공적 안식으로의 초대
히브리서 4장 3-10절에서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된 안식일은 창조주에 의해 인간에게 부과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는 자발적인 시간이다. 네 번째 계명은 “기억하라”는 말로 시작되는데, 안식일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강요하거나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암시한다. 따라서 인권의 기본 원칙은 안식일에 대한 계명을 통해 고양되고 장려되는 것이다. 안식일은 자유의 날로서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

라이스가 적절하게 결론을 내린 것처럼, 그것은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없는 그런 가치를 인간에게 부여한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대한 진정한 감사는 노예제도를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안식일은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박탈하는 모든 관습에 반대한다. 사람들이 스스로 부양할 수 없게 만드는 억압적인 경제적, 사회적 구조는 안식일의 메시지와 모순된다. 안식일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없애려고 노력할 것이다.

재림교회는 자신들이 진정한 안식일의 관리자라고 믿으며, 공동체 안에서뿐만 아니라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의 정의와 평등, 자유에 관한 생각을 가장 먼저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들은 비록 문자로서의 율법은 지킬지 모르지만 진정한 안식일 계명의 정신은 완전히 상실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B. 선지자와 예언적 공동체의 역할
선지자와 선지자의 역할에 대한 재림교회의 이해는 주로 미래적이고 종말론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사실 고대 유대교에서는 이러한 미래를 예측하는 종말론적 강조는 선지자들의 부차적인 역할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오히려 그들의 주된 역할은 사회 윤리적이었다. 재림교회는 세상의 끝에 남은 무리로서 예언적 소수를 구성한다고 스스로 믿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역할은 유대 사회에서의 선지자들의 역할과 비교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재림교인 대부분에 의해 거의 독점적으로 미래지향적이라고 여겨지는 그 역할을 검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실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나비’(נבי)는 아브라함과 관련하여 처음 사용되었다(창 20:7).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모세에게 보다 더 인기 있는 용어가 되었다(신 34:10). 모세는 도덕법의 제공자로서 다른 모든 선지자들과의 비교 기준이 되고 있다(신 18:15).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은 몇 가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은 법을 선포하고, 국가의 영적인 삶을 지키고, 사람들과 그들의 하나님 사이에서 중재하고, 미래의 판단을 예언한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지도자였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세대의 사회 구조에 대해 토의하고 영향을 끼치면서 국제문제와 미래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그들은 신학적 개혁자로 묘사될 수 있었다.

1. 예언적 가르침의 네 가지 요소
예언적 가르침에 있어서 네 가지 필수적인 요소들이 있다. 첫째로, 선지자들이 전하는 경고는 항상 삶과 죽음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모든 경고는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오래 지속되는 어떤 결과가 뒤따랐다. 따라서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악과 죽음을 거부하고 하나님과 도덕적인 행동, 그리고 결과적으로 생명을 선택하라고 요구했다(신 30:15-20).  

예언적 가르침의 두 번째 요소는 노예, 과부, 고아, 채무자, 노숙자, 이방인 등과 같이 기존의 사회 구조 내에서 적절한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다룬다. 율법은 사람들 사이에 부당한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출 23:3, 신 16:19-20).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는 이것이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도움을 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에게 도움과 힘이 될 것을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의 고통을 보시며, 당신의 인간 대리자들이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직접 도움을 주신다. 선지자들은 그들이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할 때까지 땅을 움켜쥐고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는 사람들의 소외에 관해 이야기한다(사 5:8). 우리 시대에서 현실적인 필요를 넘어 물질적 재화의 축적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물질주의의 과정은 고립된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의미 있는 인간의 존재와 관계를 상실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셋째로, 하나님은 형식적인 예배나 희생보다는 순종과 정의를 추구하신다. 희생 제도와 종교적 축제도 중요했지만 올바른 동기에서 나오는 윤리적 행동, 즉 단순히 진리를 품고만 있는 것보다 그것을 행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그리고 그것의 기본적인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선택, 그리고 그분의 부르심에 반응하는 사랑이었다(신 7:6-11). 그러므로 윤리적 행동의 동기는 하나님께서 인간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표현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요일 4:9-10).

네 번째 측면은 묵시적 종말론이다. 예언적 가르침의 이 요소에서 선지자는 그가 속한 직계 영역을 벗어나 인류 역사의 더 큰 세계적 그림에 관해 이야기한다. 예언적 종말론의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에 대한 열망에서 성공하실 것이고 선과 악의 싸움에서 승리하실 것이며, 필연적으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지금까지 재림교회는 보통 예언적 역할의 네 번째 측면을 주로 강조해 왔다. 예언적 운동으로서의 자기 이해에서, 재림교회는 일반적으로 ‘예언을 하는 데 몰두하는 운동’과 함께 ‘예언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데 특별한 관심을 두는 운동’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프로본샤가 지적했듯, 예언적 운동으로서의 재림교회는 기능과 역할, 즉 세계에 대한 사명을 가진 민족이라는 측면에서 더 확장되어 정의될 필요가 있다. 만약 그들이 예언적 소명에 충실하기를 원한다면, 재림교회는 예언적 사역의 다른 측면도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측면들 가운데 첫 번째 측면은 선지자들의 사회적 역할이다.  

2. 유대 공동체에서의 선지자의 주된 사회적 역할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은 사회적, 경제적, 도덕적 책임을 새롭게 고안해 내지 않았다. 그들은 유대인 사회 전체와 개인으로서의 국민에 대한 이상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의 입법에 이미 정해져 있다고 믿고 확언했다. 율법의 기초이자 사회의 기둥인 정의는 선지자들에 의해 모든 시대에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선지자들이 사회적, 윤리적, 경제적 관계에 대해 이스라엘에 준 지침은 십계명에 표현된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것이었다. 사회적 윤리를 다루는 다른 선지자들 가운데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3. 신약시대 선지자의 역할
신약성경에서 선지자들의 역할은 구약성경에서의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수께서 모든 시대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칭하셨던 침례 요한(마 11:9-11)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의 좋은 열매를 맺도록 권고했다(마 3:2-10). 그가 예수께서 정말로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질문했던 적이 있었다. 그 이후에 그는 예수께로부터 그가 이해하고 확인할 수 있는 메시지를 받았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2). 이것은 선지자의 관심사에 대한 강력한 증거였다. 진정한 선지자만이 메시아를 그런 설명으로 인식할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수감된 선지자에게 당신의 사명을 설명하는데 이런 접근법을 사용하셨다. 사도 요한도 종말론적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에도 관심이 있었다.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는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에 대해 글을 쓰면서 박해를 통해 유린되고 있는 그들의 안전과 행복, 그리고 그들의 권리에 대해 염려했다(계 2:2, 9-10, 13, 21-2; 12:1-7; 13:4, 15-16). 나사렛의 예수 역시 당대의 사회적, 경제적 정의에 크게 관심을 가지셨다. 예수께서는 포로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석방하며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러 오셨다고 스스로 말씀하셨다(눅 4:18-21).

예수께서는 사회적 관심사에 대해 설교하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사회적 신념도 실천하셨다(마 4:23; 15:30). 그분은 당신의 사역을 통해서 사실상 아무도 당신의 관심을 벗어난 사람이 없음을 증명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행할 것을 요구하셨다. 예수의 가장 유명한 종말론적 담론에서, 당신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이 당신의 임하심이 언제인지를 질문했을 때, 예수께서는 외부의 사건뿐만 아니라 당신의 추종자들이 직접적으로 실천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다(마 24:1-25, 46). 복음을 선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임무는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낯선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며, 가난한 사람에게는 옷을 입히고, 죄수를 찾아가고 병자를 돌보는 것이었다. 이렇게 표현된 사회적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의 최종적 실현을 기다리는 공동체의 주요 임무 중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4. 현대 예언적 공동체로의 적용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유대 사회의 선지자들이 이행하도록 요구받았던 몇 가지 다양한 역할들에서 재림교인 대부분은 선지자들의 종말론적 역할에만 집중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그러나 실제로 예언적 사역의 이 부분은 십계명과 예수의 설교(마 5:17-48), 그리고 그 요약(눅 10:27)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회 경제적, 윤리적 원칙으로 사람들을 불러내는 역할과 더불어 동시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재림교회가 믿는 ‘예언운동’으로서, 교회는 구약성경의 도덕법과 가장 위대한 예언자이며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설명에 근거한 사회경제적 정의, 기독교 윤리와 인권이라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원칙과 미래의 사건과 종말론적 예측에 대한 예언과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 패트릭 J. 오마호니(Patrick J. O’Mahony)가 바르게 지적했던 것처럼, 성경시대에 공의를 위해서는 선지자가 필요했다. 오늘날에도 역시 그러한 공의를 위해서 선지자가 필요하다. 초기부터 기독교 공동체는 예언적인 역할을 해 왔다. 그러므로 재림교인들과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은 현대 세계에서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부름받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C. 그리스도의 재림
1. 재림에 대한 믿음의 중요성

오늘날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독교 종말론, 특별히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이 많은 시대인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적 종말론은 현재의 팬데믹 상황을 포함하여 핵 파괴의 가능성, 환경 재앙의 실제 가능성, 인구 과잉, 그리고 기아나 오염으로 인해 사망할 가능성 등과 같은 현대 세계의 현상들을 지적하면서 현재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끝에 관한 교리는 사실 먼 미래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재를 말해 준다. 그러므로 그것은 조간신문이나 매시간 뉴스만큼이나 시의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기독교 신학의 전통적인 순서에서 재림에 대한 교리가 마지막에 언급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논문의 각주나 사후 생각 정도의 자투리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재림은 나머지 모든 것들을 이끄는 절정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말해야 하는 모든 것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성경학자는 종말론이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것의 일부에만 적용될 뿐만 아니라, 모든 것들에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존 로빈슨(John T. Robinson) 역시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데, 그는 “종말에 대한 모든 진술은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확증이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진술은 사실상 종말에 관한 주장, 즉 종말론에 대한 진실”이라고 했다.

라이스의 결론은 재림은 인류 역사의 과정에 있어서 일부라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이 과정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역사를 최종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로 해석한다. 그것은 모든 역사를 하나님의 구원 활동에 비추어 보고, 역사의 끝을 그 과정의 절정으로 보는 것이다.

2. 재림에 대한 믿음의 부정적 효과
(1) 흥분

재림에 대한 믿음이 주는 영향은 사회적 윤리에 관한 우리의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바키오키가 지적했듯이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두 가지 위험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지나친 집착 혹은 흥분이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가 곧 임하실 것이라는 생각에 너무나 흥분해서 개인적인 미래나 그들의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일을 위한 모든 노력을 포기했던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있었다. 바키오키는 침몰하는 배의 비유를 통해 이것을 설명한다.

[오늘날의 일부 기독교인들은] 현재의 세계를 침몰하는 배로 보고 있으므로 항로를 설정하거나 놋쇠를 연마하거나 돛을 수선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본다. 그들은 배에서 일하기보다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승객들에게 곧 닥칠 운명을 경고하면서 구명보트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사회 환경을 개선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헛되고 불필요하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이제 곧 임하실 그리스도는 현재의 죄 많은 세계 질서를 파괴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쿠보도 이런 식으로 재림을 믿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와 비슷한 말을 사용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인간의 사회적 환경을 개선하는 것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며 어떠한 관심이나 걱정도 가지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상은 너무나 먼 딴 세상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참여감을 상실해 버리고 만다. 그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구원에만 둘러싸여 있으므로 이웃의 곤궁에 대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고립주의와 비참여에 대한 책임은 비재림교회 신학자인 맥스 워렌(Max Warren)에 의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 재림에 대한 믿음이 세상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교회가 주님의 임박한 재림과 역사의 종말에 관한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어서 정작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책임을 사실상 포기함으로써 교회의 도덕적 양심을 모욕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삶은 그들이 사회의 생활과 관계되는 한, 악한 자의 영향권 아래에 완전히 놓이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유일한 안전한 행동은 그리스도인이 그런 일들에서 손을 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구원은 영혼의 구원이다. 그러나 영혼의 환경을 고려하려는 진지한 시도는 없다.

(2) 무관심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노출되는 또 다른 위험은 무관심이다. 바키오키는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매우 소홀히 생각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들은 재림 자체에 완전히 무관심해지기까지 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현재의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을 자신들만의 궁극적인 현실로 만든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현재의 세상은 앞으로 다가올 세계에 대한 대기실 정도가 아니라 최대한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는 거실이 되었다.

쿠보는 현대 재림신학에서 두드러진 주제인 예수 재림의 지연과 관련한 문제의 개념을 이용하여, 곧 있을 재림에 대한 선포와 ‘파루시아’의 선언 사이의 오랜 지연이 어떻게 재림교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설명하였다. 그는 한쪽에서 “늑대”를 너무 많이 외치면 완전한 대응의 결여로 이어질 수 있지만, 반대로 그러한 긴장감을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임박한 재림을 아예 기대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은 그들이 긴장을 풀고 부주의한 그리스도인 삶을 살아가게 만들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후자의 추론은 하인이 스스로에게 “내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말하면서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눅 12:45) 하였다. 그런데 이처럼 느긋한 편안함은 그리스도의 즉각적인 오심만으로도 열렬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요한 시급함을 심어 줄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실질적인 위험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도덕적인 행동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재림의 시기나 순서가 아니라 재림의 확실성이다.

누가복음 12장에 나타난 종의 상황에서 그의 윤리적 행동의 동기가 주인의 돌아옴이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그러므로 재림의 신학이 기독교 사회의 참여에 있어서 제동이 걸린다는 견해와는 달리, 누가복음 12장에서는 오히려 그것이 당연히 동기부여 요인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비유와 그것에 대한 쿠보의 의견에 따르면, 재림의 임박성이 기독교 윤리의 유일한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바키오키는 당연히 재림의 희망이 현실적 삶의 두 극단 사이에서의 균형을 요구한다. 그것은 현재의 세계를 불운한 것으로 치부하는 과도한 흥분이나 현재의 세계에만 집착하여 이것을 궁극적인 현실로 만드는 무관심 둘 다 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근심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딛 2:12), 이 세상의 구원에 구체적으로 관여하고, 앞으로 다가올 세상의 시력을 잃을 정도로 그 일에 얽매이지 않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3. 재림에 대한 믿음의 긍정적 효과
특별히 재림교회 사회적 책임 윤리와의 관계에서 재림에 대한 교리의 의미를 연구할 필요성은 쿠보에 의해서 가장 많이 강조되었다. 쿠보에게 있어서 문제는 ‘만약’이 아니라 과연 ‘언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재림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으로 보증된다. 이것들은 이미 완성된 사실들이기 때문에 그분의 오심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사실이다. 그래서 쿠보는 게릿 벌카우어(Gerrit C. Berkouwer)의 문장을 인용해서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언제 오실 것인지를 헤아리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태도를 취한다”고 말했다.

시대마다 당대에 각자 자신의 생애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것으로 그 시간을 계산하는 것을 강조했던 재림교인들의 자세는 자신들의 세대에 주님을 보지 못한 것에 대해 실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재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경험에 있어서의 그 실재이다. 결국, 쿠보는 “사람의 죽음의 순간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순간에 효력을 발휘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평생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오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생활의 긴박함은 바로 그 점에 집중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오시는 실제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것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재림에 대한 이런 방식으로의 이해가 신자들에게 미칠 영향은 더 실재적이다. 비록 주님께서 정말 우리의 시대에 재림하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대대로 재림교인들이 믿었던 것처럼, 이것은 7년이 될 수도 있고 혹은 70년이 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안주할 여지가 없다. 그러한 경우에 그리스도의 재림 임박은 사도 시대부터 지금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회 역사의 모든 시대마다 실재하는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재림을 다른 사람들에게 더 너그럽게 나누어 주고 더 열렬하게 살아야 할 필요성과 연결한다면, 다시 말해서 예수의 재림이 가까워서 동료 인간들에게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그들이 예수 재림의 임박성을 느낄 때만 그들이 긴급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다는 인상을 줄 것이다.

이것은 누가복음 12장의 종이 빠져든 함정이었다. 암시적으로 그것은 예수의 재림이 곧 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덜 열정적으로, 덜 긴급하게, 심지어 부주의하게 사는 것이 정당하게 될 것이다. 사실 종은 주인이 지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일꾼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고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이 지금부터 천년 후의 일이라 할지라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 조금의 차이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 그 자체가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충분한 동기를 제공해야 한다.

4. 현재를 결정하는 미래
라이스는 재림에 대한 희망이 미래에 실제로 영향을 미쳐서 현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미래를 보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쿠보는 미래가 실제로 현재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이해를 넘어섰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에는 과거가 미래와 현재를 결정했다고 주장했다.

아담 안에서의 모든 죽음은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기 때문이다(고전 15:22). 사도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다(롬 3:23). 그리고 죄는 우리의 과거였고 구원의 역사에서 우리의 현재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미래 곧 죽음을 결정지었다(롬 5:12).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건은 이 모든 과정을 역전시켰다.  

미래가 현재를 침해하거나 침입하겠다고 위협할 뿐만 아니라, 현재에까지 들어와 영향을 끼쳤다고 쿠보는 주장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영원한 삶, 성령, 칭의와 같은 것들은 사실은 미래에 다가올 것들이다. 둘째 아담의 오심을 통해 미래의 축복에 대한 궁극적 확실성은 미래를 현재로 가져올 수 있게 해 준다.”  

그런데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미래가 실제로 대중의 아편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현재의 삶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 부족에 대한 보상으로서 파루시아를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추론에서 비롯된 희망은 그저 불우한 사람이 미래에 대해 막연히 가지는 희망의 투영일 뿐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재림과 그것이 가져다 줄 것은 단지 희망적인 생각, 즉 지금 가지고 있지 않거나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보상에 지나지 않는 희망일 뿐이다. 그러나 쿠보의 논지는 예수의 재림이 “우리가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의 성취”라는 것이다.

쿠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리스도인 희망을 보상으로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인간의 환경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연약한 희망을 품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은 우리가 더 나은 교육을 받고 더 나은 직업을 갖게 될 때 그런 희망을 뛰어넘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지상의 저택이 하늘을 대신할 수 있고, 캐딜락이 하늘의 병거를, 세련된 옷장은 의의 흰 가운을, 그리고 식탁 위의 진미는 생명의 나무를 대신하게 될 수도 있게 된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희망을 그런 식으로 보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이 땅에서 더 풍요롭고 여유로워지면 그들의 희망은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은 현재를 무시할 정도로 파루시아를 갈망해서는 안 된다. 파루시아는 보상이 아니라 완결이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조셉 피슨(Joseph E. Fison)은 “현재의 존재와 미래의 파루시아는 시대를 초월한 영원에서 사라지거나 합쳐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사랑의 단일 현실에서 분리될 수 없고 더는 단순화하여 줄일 수도 없는 두 가지 요소인데, 현재 우리가 더 많이 가질수록 미래에 더 많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고 했다.

피슨은 “실재 존재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진정한 파루시아에 대한 믿음은 환상일 뿐이다. 또한, 진정한 파루시아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실재 존재에 대한 믿음은 우상 숭배일 뿐”이라고 했다. 쿠보에 대한 피슨의 영향력은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희망은 비록 미래의 현실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쿠보가 이해한 것처럼 파루시아는 분명 현재적 경험의 성취이다. 쿠보는 에밀 브루너(Emil H. Brunner)의 말을 인용하여 “믿음에서 나오는 희망은 믿음의 삶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의 일부인 희망의 미래는 믿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재”라고 강조했다.

사회적 책임 윤리에 대한 그러한 견해의 결과는 명백하다. 만약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금 미래의 희망으로 살아간다면 그러한 희망은 필연적으로 공적인 영역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하나님께서 세우시기를 바라는 정의와 평등은 현재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삶을 포괄하는 동일한 정의와 평등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5. 종말론적 모티프의 역설
현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무력하게 된 것은 그들 대부분이 다음 세상에 관한 생각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재림의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지금 이 세상에 대한 필요와 책임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전이 현재의 세계로만 국한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권리, 정의와 진실 등에 관해 관심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쿠보는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면서 로버트 맥프리 브라운(Robert McAfee Brown)의 말을 인용한다. 신약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종말론이 이 세상의 무책임이나 방치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다가올 시대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그들의 현실적 시대를 더 책임감 있게 살게 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초기의 기독교 교회는 혁명으로 사회질서를 외부로부터 바꾸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내부로부터의 변화에 의해서 작용했다. 그런데도 그 영향력의 변화는 매우 광범위했다. 예를 들어, 바울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복된 소식을 전파함으로써 에베소에서 아데미 교단의 기득권에 손을 대면서 노예 소녀를 점치는 정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였고, 그 소녀와 그 소녀의 다른 주인들에게 도전함으로써, 그리고 오네시모를 새로운 방식으로 대함으로써 사람들의 무지에 의존한 사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행 19:23-41; 빌 1:8-16). 그리고 마침내 초기 기독교 시대의 누룩은 비록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기독교 국가의 성립에 이르는 시점에까지 작용했다.

쿠보는 침몰하는 배에 대한 그림을 통해 사회 윤리에 나타난 종말론적 주제의 역설에 대한 요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사적인 사람은 비록 그가 탄 배가 이 물에 잠길 운명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구명정을 타고 혼자 몰래 탈출함으로써 자신을 구할 생각을 단순히 거부하는 사람이다. 그는 그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희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궁핍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노력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역설적으로 만물을 통제하시는 의로운 사랑의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종말론적 동기는 그의 친구뿐만 아니라, 그의 원수들을 위해서라도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욕구를 심화시킨다.

그러므로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가 주님의 오심을 예상하고 현재의 세상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면, 결국 그들에게 사람에 관한 관심을 사라지게 할 것이고 그들의 권리와 환경은 무너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성경적 종말론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 믿음의 사람들은 사랑과 정의, 옳음과 진실, 도덕의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제하고 계심을 알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신자들이 이 세상의 공적 영역에서 더욱 책임감 있게 살면서 모든 사람의 인권과 행복을 지지하고 증진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또한, 그리스도 재림의 확실성은 분명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른 시각과 균형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종말론적 지향은 어떤 것이 정말 중요한지를 보는 데 도움이 된다. 현재의 시대의 종말을 기대하는 과정을 통해서 어떤 것들은 다른 것들보다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데 헌신해야 한다. 재림에 관한 담론의 맥락에서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봉사가 가난한 자, 죄수, 혜택받지 못한 자, 궁핍한 자들에게 표현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마 24-25장). 공적 영역에서의 재림교회의 사회적 책임 윤리는 그저 종말론에 직접적이고 근본적으로 놓여 있는 정도가 아니다.

쿠보에 따르면, 경건함과 사랑의 계명은 사회적 실천의 기본적 조건과 같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미래에 대한 예언이 당신의 도덕적인 가르침의 내용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셨다. 그분의 가르침은 종말론이 아닌 이웃의 필요에 대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는 종말론적 주제가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예수의 계명은 간단히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는 것이었다(눅 10:37).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종말론적 주제가 완전히 생략된 것은 아니다.

비록 일차적으로는 아니지만, 쿠보는 여기에서 윤리에 대한 일종의 종말론적 동기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죽음이 우리를 놀라게 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비록 종말론적인 요소가 사회적 책임 윤리의 주된 이유인 경우는 드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때때로 추가적인 모티프로 주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쿠보에게 있어서, 특별히 사회 윤리의 맥락에서 재림신학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한 요소는 종말론적 동기는 윤리에 무관심하도록 하는 구실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강렬하게 더 멀리 나아가야 하는 근거가 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재림의 사상이 현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공적 책임의 실천을 저해하지 않으며, 그리고 반드시 그것이 일차적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사회적 윤리에 대한 추가적인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III. 요약 및 결론
재림교회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창조신학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본질,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그리고 특별히 미래에 대한 기대뿐만 아니라 현재의 현실적 측면에서의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이해에서 공적 영역에서의 사회적 책임 윤리의 기초를 찾는다.

이러한 공통의 신학적 근거 외에도 재림교회는 다음과 같은 신학의 측면을 통해 공공신학적 사회 윤리 이론의 이해에 이바지하고 있다. 첫째, 안식일의 신학이 진정한 해방의 표징으로서 문화나 시간, 또는 환경과 관계없이 모든 창조물에 제공하는 평등성, 둘째로 당대의 진리(present truth)를 현대의 세계에 가져오기 위해 형성된 예언적 공동체의 자기 이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차적인 것이 아니지만 분명히 정의, 평등, 평화에 대한 추가적인 동기라는 사실이다.  

본 연구의 초반부에서 언급한 창조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등의 기독교 신학 외에도 이 주제에 대한 특정한 빛을 제시하는 다양한 신학적 관점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기독교 신학과 그 안에서 재림교회 사상이 공공신학적 사회적 책임 윤리의 이해에 상당한 기여를 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니일 콜(Neil Cole)은 “교회가 세상을 그리스도께 진정으로 드리기 위해서는 흡연 구역에도 앉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교회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 외에도 가난한 사람들, 교육받지 못하고 무력한 사람들, 무의미한 사람들, 차별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장 위대한 계명은 성육신적 사명을 형성하는 것이다.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랑은 사명을 이끈다. 사랑 때문에 전도와 선교, 사회 사역은 모두 하나님의 사명의 일부가 된다. 그리스도 공동체란, 세상에서 떠나 살지 않으면서 다르게 살아가는 공동체다.

세상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내부인들과 나그네들의 공동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다른 방식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방식이며, 십자가의 자기 내어줌을 따르는 삶이고, 결국 타자에 대한 포용과 사랑의 방식으로 살려는 것이다. 이것이 공적 역할에 대한 일관된 성경적 이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오늘날의 안식일 신학에 관한 이해에서 공공신학적 관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이 교리에 대한 계속된 이해와 해석의 과정을 통해서 향후에 부과된 이해이지 그것이 초기 재림교회의 사회적 책임 윤리의 실천에 대한 기초가 된 것은 아니라는 비평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초기 재림교회가 안식일에 아픈 사람들을 위한 돌봄의 문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랐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는 고통당하는 자들을 구하는 사업이 안식일의 법과 조화된다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고통당하는 인류를 섬기기 위하여 하늘과 땅을 항상 오르내리고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의 사업과 조화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선언하셨다. 모든 날은 하나님의 것으로, 이날들 동안에 인류를 위하여 당신의 계획들을 수행하신다. 만일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해석이 올바르다면, 처음에 땅의 기초를 놓으신 이래로 모든 생물을 살리고 붙들기 위하여 일해 온 여호와께서 잘못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사업을 좋다고 선언하고, 그 사업의 완성을 기념하기 위하여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종결하고 우주의 끊임없는 일상적인 과정을 중지시키셔야만 한다.

고통받는 자를 해방하는 그런 노력은 자비의 사업이요,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 구주께서 선언하셨다.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안식일에 자주 진실한 노력으로 병 고치는 것과 가르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곤 하셨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본을 연구해야 한다. 우리는 안식일에 한 자매가 병든 가정을 간호한다면, 그녀는 안식일학교 시간에 교과를 가르치는 사람과 똑같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믿는다.

초기 재림교회 시대의 일부 의사들, 특히 켈록 박사는 안식일에도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배틀크릭(Battle Creek)에서 떨어진 재림교회 의료기관으로 주말 출장을 가곤 했다. 이것을 위해 그는 금요일 밤을 자주 여행으로 시간을 보냈으며 안식일에는 외과 수술을 시행한 후에 다시 배틀크릭으로 돌아와 정상적인 일주일간의 업무를 보곤 했다. 엘렌 화잇은 의사와 간호사들 역시 다른 모든 사람이 안식일을 안식과 예배의 날로 보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했지만, 그들에게 맡겨진 업무의 본질이 안식일에 일하도록 자주 요구할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초기 재림교회가 안식일을 단순히 자신만의 신앙을 위해 보내야 하는 날이 아니라, 사람들의 문제와 곤경을 벗어주고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사회적 책임의 관점에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밀러주의 운동의 결과로서 형성된 초기 재림교회의 구성원이 초교파적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감리교 출신이었던 화잇 등의 영향을 받아 감리교회의 성화 교리, 즉 일종의 실천적 경건을 포함한 다양한 성경 신학적 이해와 선교적 방식들이 재림교회의 공적 봉사 사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도 생각될 수 있다.

“체험적 신앙(experimental religion)의 필요는 진리의 이론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강조되어야 한다. 목사들은 그들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지키고, 개인적 헌신, 개인적 회개의 필요성을 백성들에게 새겨 주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스스로 산 경험을 얻어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고, 그분의 영이 애정을 지배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신앙고백은 가치가 없고, 그들의 상태는 그들이 진리를 절대 듣지 않은 것보다 더 나빠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그 시대의 신학적 이해와 더불어 그 이후에 추가로 부가된 공공신학적 해석은 오늘날 재림교회로 하여금 사회적 책임 윤리의 실천에 오히려 더욱 긍정적이게 한다는 사실이다.  

이번 연구에서 살펴본 공적 역할에 대한 재림교회의 신학적인 이해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재림교회의 신학적 교리에는 공적 영역에서의 사회적 책임 윤리의 실천에 대한 이해가 포함되어 있다.

둘째, 다양한 공적 영역에서 재림교회가 공적 역할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더욱 품위 있는 방식으로서의 참여를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 재림교회의 신학적 이해 속에 공공신학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해서 그것의 실천과정에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공공신학은 기본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타인에 대한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신사적”(행 17:11)이고 품위 있는 그리스도인의 시민 교양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공공신학적 개념이 성서에 내재되어 있는 만큼,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품위 있는 행동 역시 성경에 의해서 지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재림교회는 통전적 선교의 개념을 이해하고 이것을 오늘날의 시대적 상황에서 더욱 확장할 필요가 있다. 창조와 삼위일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선교 교리 등의 개신교와 교류 가능한 성경적 교리들을 포함하여 안식일과 재림 등 재림교회의 보다 독특한 교리 등에서 확인되는 공공신학적 이해는 재림교회가 복음 전도를 포기하고 사회적 참여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통전적 선교에 대한 이해와 실천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복음 전도의 필요성을 전혀 약화하지 않는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행 5:42)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딤후 4:2)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쉬지 않고 애써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것 자체가 복음 전도가 아니고 구원을 위한 행위가 될 수는 없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그리스도인의 의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통전적 선교의 실천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이해는 학문적 이론이 아니다. 일단 받아들여지면 그것은 그의 생활방식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발생한다고 믿기 때문에 이론과 실천은 함께 어우러진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동료 인간과의 관계에서 이 구원이 시험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이러한 개념을 명료하게 설명한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19-21).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회 윤리적 개념의 이해와 실천적 적용은 두 번째 본성이 되어야 한다. 그것들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의 이익을 자기의 것보다 우선하기를 바라는 사랑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당연한 결과들이기 때문이다(마 22:3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