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말한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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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총회 성경연구소의 성경 난해 문제 해석

Interpreting Scripture: Bible Questions and Answers


[대총회 산하에 봉직하고 있는 선발된 학자 49명이 내놓은 성경 난제 94개에 대한 균형 잡힌 해석들]


바울이 말한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8).

이 본문은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으나 그중 가장 일반적인 것은 죽음 후에 존재하는 의식이 있는 중간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들이다.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관점이 맞는지 본문을 탐구할 것이다. 이 본문이 속한 문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논하고 있다(고후 4:7∼18). 그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생명의 능력이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에 나타났다고 고백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것이 될 미래의 영광이다. 고린도후서 1∼11장에서 바울은 몇 가지 상징을 사용하여 우리의 현재의 상황과 장래의 소망을 비교하면서 논한다.

장막:
그는 우리의 현재 상황을 묘사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이 땅의 장막이라는 상징(고후 5:1, 4)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우리의 덧없는 인생의 성질을 나타낸다. 그러나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집”을 마련해 두셨음을 확신한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이 “집”은 문맥에 비추어 볼 때 미래에 있을 인간의 영원한 존재 양식을 가리킨다(고후 5:1). 이 소망은 너무도 확실하여, 바울이 그것을 언급할 때 현재 시제(“우리에게 있다”)를 사용한다. “장막” 곧 현재 우리의 존재 방식 속에서 우리는 탄식하고 하늘의 “처소”로 옷 입기를 사모한다. 이런 다음 상징이 처소에서 옷 입는 것으로 바뀐다.

입음과 벗음:
바울은 계속하여 이 땅에 속한 삶을 옷에 비유하여 묘사한다(5:4). 그는 두 가지 가능성을 언급한다. 그는 첫 번째 가능성을 원치 않는다. 그는 벗은 자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는 다시 덧입혀지기 전에 벗은 자의 경험을 하길 원치 않는다(5:4b). 또 다른 가능성은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는 것이다(2절). 바울의 이 말은 우리의 현재의 삶이 벗음을 경험하지 아니하고 “생명에게 삼킨바 될” 것임을 의미한다(5:4c).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예수의 재림을 맞이할 때 경험할 변화를 가리킨다(고전 15:52).
벗음은 죽음을 상징한다. 죽은 자들은 벗은 자로 말해지는데, 그것은 그들이 육체가 없는 상태로 계속하여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경적으로 말해서 모든 것이 박탈된 상태를 가리킨다. 이런 박탈감은 욥에 의해 확인되었다. 그는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욥 1:21)고 말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부활에 대해서 논하는 문맥에서 “벗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전 15:36∼38). 여기서 “알갱이”(문자적으로 “벗은 씨앗”)는 장막과 마찬가지로 해체되어 죽을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벗음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신자라 해도 주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벗음(죽음)을 경험할 수도 있고, 옷 입은 채로 남아 있어서(죽음을 경험하지 아니함),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고전 15:53) 변화를 경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몸에 거하는 것:
고린도후서 5:6에서 바울은 “집”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그 문맥에서 “몸에 거한다.”는 말은 이 세상에 있는 우리의 현재 존재 곧 우리의 자연 상태를 일컫는다. 그러나 바울에 의하면 그런 자연 상태에 있는 것은 우리가 “주와 따로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승천하신 주님과 신자들이 서로 다른 영역(땅과 하늘)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따로 거한”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거리는 사실상 멀지 않다. 우리가 이 땅의 존재 양식으로 살아가지만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주와 동행할 수 있다(고후 5:7; 참조 4:18).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은 그분의 직접적인 임재 속에서, 곧 하늘의 영역에서 그분과 개인적인 교제를 온전히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일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할 때 있을 것이다(참조 살전 4:16, 17).


몸을 떠나는 것:

바울은 본문에서 그의 가장 깊은 염원을 표현한다. 그는 “몸[이 땅에 속한 그의 자연 상태의 존재]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고 싶어 한다. 그는 주와 함께 있기 위해서 죽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앞서 이미 죽고 싶지 않음을 나타냈다(5:4). 그는 고린도후서 5:2에서 말한 것을 반복하고 있다. 그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이 땅의 존재 양식에서 하늘의 존재 양식으로 옮겨가고 싶어 한다(“그 몸에 있을 때 행한 것”, <새국제역> 5:10).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5:9). 이 땅의 삶과 내세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항상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형체가 없는 영혼이나 영의 개념은 이 구절에서 찾을 수 없는데, 영혼불멸 사상을 믿는 자들이 그 본문에 그런 의미를 부여하였다. 우리가 살펴 본 대로, 바울은 세 가지 가능성을 논하지만(현세의 삶, 죽음, 내세의 영원한 삶), 두 번째 가능성은 그다지 바라지 않는 것이다. 다음은 그의 논증에 대한 요약이다.

















현세적 삶


죽음


미래의 영원한 삶


1. 장막-집


1. 장막-집이 해체됨


1. 영원한 집


2. 죽을 것으로 옷 입음


2. 벗음


2. 생명으로 덧입음


3. 믿음으로 행함


3. 눈으로 직접 보는 삶


4. 몸에 거함


4. 주와 함께 거함

5. 주를 떠나 있음


5. 몸[땅에 속한 삶의 양식]을 떠남

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


6.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

Angel Manuel Rodrigue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