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교회의 5대 본질적 기능 재고찰을 통한 포스트 코로나 교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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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해종 교수는 교회의 5대 본질적 기능 재고찰을 통한 포스트 코로나 교회론이라는 제목으로 강의했다.
I. 들어가는 말
밀라드 J. 에릭슨의 말처럼 “교회는 매우 친숙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오해받기 쉬운 주제”이다.

‘교회’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몇 가지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 중 하나가 건축물로서의 교회이다. 하늘을 찌르는 첨탑이 있는 웅장한 건축물, 온갖 성상들로 채워진 장엄하면서도 화려한 실내, 다양한 십자가로 장식된 엄숙한 건물이 맨 먼저 떠오른다.

다음으로 교회에 대해서 생각하면 사람들은 ‘사랑의교회,’ ‘은혜교회,’ ‘천성교회’와 같은 특정의 지역 교회를 떠올린다. 자신이 어릴 적부터 다니던 교회 이미지가 강하게 각인된 탓일 것이다.

끝으로 교회에 대해 우리가 갖는 이미지 중 가장 포괄적인 것은 그것을 교파로 이해하는 것이다. 교회가 하나의 건축물이든, 지역교회든, 아니면 교파든지 간에 교회는 대개 유형의 건물이나 조직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성경상 예수께서 기초를 놓으시고, 사도행전에서 실제로 설립된 교회는 이런 이미지보다 단순하면서도 의미상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실체였다. 역사적 흐름의 과정 속에서 교회의가 건물, 지역교회, 혹은 교파의 이미지로 축소되면서, 신약에 등장하는 초대교회는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다. 신약의 교회와 신약 이후 교회 사이의 심각한 괴리로 인해, 유형 교회와 무형 교회 사이의 구분이 이미 어거스틴 때부터 논의되기 시작했다. 루터도 “성경에서 주장되는 교회의 특성들과 실제로 시장에 존재하는 교회인 경험적 교회 사이의 명백한 불일치”를 보며 유형 교회와 무형 교회 사이를 구분해 설명했다.

유형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가 건물이나 조직이라면, 무형 교회는 사람을 교회의 본질적 구성 요소로 본다. 이를테면, 가장 단순한 형태의 교회는, 회중주의적 자유교회 신학자들의 주장처럼, 주의 이름으로 모인 “두 세 사람”(마 18:20)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 1:2),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살전 1:1) 등과 같이 어떤 도시 전체나 혹은 온 세상에 있는 신자들의 공동체 전체를 지칭할 때도 교회라는 단어가 쓰이는 것을 고려해 볼 때,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의 차원보다 단순하면서도 더 포괄적이고 심오한 의미를 지닌 것임이 명백하다.

교회가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신자들의 공동체라는 사실에 대한 재인식은 특히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전통적 공중 예배가 중지되는 초유의 사태 앞에서 더욱 중요하게 부각된다. 비록 교회에서 함께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지 못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신자들의 공동체는 여전히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기에 교회 자체가 기능을 멈춘 것은 아니다. 비록 전통적인 교회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라도 신자들의 공동체는 새로운 방식으로 신앙공동체의 생존법을 스스로 터득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가적 차원에서 대면 접촉을 차단하기 위해 교회에서의 공중 예배를 사실상 금지함으로 인해, 교회는 사이버 공간에서 전통적 교회가 수행하던 기능들을 다양한 형태로 대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하던 예배와 교제, 전도와 봉사 같은 본질적 기능이 거의 마비되는 상황 속에서 신자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어떻게 기능하고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사이버 교회가 할 수 있는 것과 그것이 할 수 없는 것들을 느끼게 되었고, 새로운 시대에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는 비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사이버 상으로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가 그 본질적 기능을 감당함에 있어서 여러 한계 상황을 경험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교회의 본질적 기능과 역할에 대해 학자들은 다양한 견해를 제시한다. 밀라드 J. 에릭슨은 교회의 본질적 기능으로 전도(케리그마), 건덕(코이노니아), 예배(레이투르기아), 봉사(디아코니아)를 꼽는다. 호켄아이크는 진리의 선포(케리그마), 성도의 친교(코이노니아), 사랑의 봉사(디아코니아) 등의 세 가지를 교회의 본질적 기능들로 본다. 또 다섯 번째 요소인 레이투르기아(예배)를 포함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필자는 위의 네 가지에 디다케를 포함한 교회의 다섯 가지 본질적 사명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신약 전체에서 14회 등장하는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불러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지니는데, 복음서에서는 마태복음에만 단 두 번 나온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10회 이상 말씀하신 것과는 대조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사역의 초점이 교회자체를 세우는데 있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맞춰져 있음을 본다. 이를 통해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의 목적은 분명해진다. 예수의 지상 사역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인데, 그것은 교회를 통해 이뤄질 것임이 그의 사역에서 드러난다. 복음서에서 단 두 번 언급된 교회가 사도행전 이후에 와서는 12번이나 나온 사실에서 이것은 더욱 분명해진다.

공중사역 초기부터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교회의 3대 본질적 기능에 대해 몸소 보여주셨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 4:23). 가르치는 일(디다케)과 복음 전파(케리그마), 그리고 봉사(디아코니아)의 3대 사역이 바로 그것이다.

이 3대 사역은 무형의 교회를 세우신 예수께서 친히 보여주신 교회의 주요 사역인데, 사도행전 이후에 실제로 유형의 가시적 교회가 세워졌을 때, 보다 실제적인 두 가지 사역이 추가 되는데, 성도의 교제(코이노니아, 행 2:42, 46)와 예배(레이투르기아, 행 4:47)가 그것이다.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의무를 지닌 무형의 교회가 가진 본질적 사명이 가르침과 복음전파, 그리고 봉사와 같이 밖으로 나아가는 사역에 집중했다면, 사도행전에서 유형의 조직된 교회가 세워진 후 교회의 사명은 교제와 예배라고 하는 목양적 측면이 추가되었다. 이들 다섯 가지 기능들은 교회가 가진 중요한 것들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교회의 이런 기능들에 대한 재고찰이 심각하게 이뤄지고 있다.

본 연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무형의 교회가 가진 본질적 기능인 디다케, 케리그마, 디아코
니아, 그리고 사도행전 교회에서 목양의 목적으로 첨가된 추가적 기능인 교제와 예배의 기능들을 차근차근히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코로나19 사태 이후 이런 본질적 기능이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살펴보고, 교회의 역할과 도전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교회의 기능으로서 예배 문제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전통적으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I. 교회의 본질
1. 복음서의 무형 교회의 3대 본질적 기능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의 지상 사역 초점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였는데, 그것을 이루는 방편이 바로 교회를 통해서였다. 그 사명 완수를 위해 예수께서는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마 4:23)셨다. 무형의 교회는 그 존재 목적이 오로지 선교적 사명완수를 위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설립을 위해 교회가 감당해야 할 3대 사명을 몸소 보여주셨다. 가르치는 것(디다케)과 복음을 전파하는 것(케리그마)은 직접적인 선교라고 한다면, 병 고치는 봉사(디아코니아)는 포괄적 의미의 선교로서 교회의 공적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디다케, 케리그마, 그리고 다아코니아라는 세 가지 교회의 본질적 사명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a. 디다케(didache)
복음서에 나타난 무형 교회에서 디다케는 교회의 중요한 본질에 속한다. 복음서는 예수를 가르치는 분으로 묘사한다. 수많은 예 중에서 회당에서 가르치신 예를 몇 가지만 들자면 다음과 같다.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마 13:54).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막 1:21).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눅 6:6).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요 6:59).

그 외에도 예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사역을 가르치는 일에 집중하셨다. 누가는 예수께서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눅 13:2)시고, 예루살렘에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눅 19:47)셨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누가는 예수의 사역의 시작을 언급할 때,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눅 3:23)라고 표현함으로써 그의 사역의 중심에 가르침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암시한다. 예수는 이 땅에 교사로 오셨다. 당시의 유대인들도 예수를 랍비로 불렀는데, 이는 그가 한 사역이 교사로서의 사역이었기 때문이다. 제자를 세운 이유로 그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가르치고, 세상에 그것을 나누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예수의 사역은 사람들에게 그가 교사임을 각인시켰다.

그런 이유로 그를 최초로 따랐던 두 제자가 그에게 와서 랍비, 곧 선생이라 불렀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요 1:38). 그의 사역은 이처럼 선생으로 인식된 것이다. 그리고 밤에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 역시 그를 랍비로 인정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예수의 열 두 제자 중 우두머리였던 베드로도 예수를 랍비라고 불렀을 뿐 아니라(막 9:5), 예수를 판 가룟 유다도 그를 랍비라고 불렀던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막 14:45). 이처럼 예수는 비록 정식 랍비학교의 교육과정을 이수하진 않았다 할지라도, 당시 유대인들에게 가르치는 자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가르치는 자이신 랍비로서의 예수는 공관복음에서만 35회, 요한복음에서 7회, 도합 42회에 걸쳐 나타난다.

‘가르치다’(디다스테인)라는 동사는 예수와 관련해서 마태복음에 9번, 마가복음에 15번, 누가복음에 15번, 그리고 요한복음에 8번에 걸쳐 나타날 정도로 빈번히 사용되었다. 예수는 교사로서 이 땅에서 가르치는 사역에 집중하신 분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위해 오신 예수는 훗날 교회를 통해 그 일을 하실 것인데, 특히 디다
케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 본질적 중요성을 띠고 있음을 그는 자신의 사역을
통해 친히 보여주셨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그의 기별 때문에 예수는 결국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정치적인 죽음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중 봉사 때에 예수께서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가르쳤는데, 그 중에는 사두개인과 율법사들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를 랍비(선생님), 랍부니(나의 선생님), 혹은 디다스칼로스(교사) 등의 다양한 호칭으로 불렀고, 복음서에서만 예수를 따르던 자들을 마떼테스(제자)로 부른 경우가 250회 가량 될 정도로 예수의 교사되심은 확연히 드러난다.

아직은 무형 교회인 복음서의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설립을 위해 중요하게 집중한 사역은 다름 아닌 디다케였음이 예수의 지상 봉사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당시에 수많은 교사가 있었지만, 예수는 그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럿 중에서 간략하게 몇 가지 점만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예수는 단순한 지식적 가르침 대신, ‘나를 따르라’ 고 부르심으로써 사람들을 인격적 만남으로 초청하셨다(막 1:16-20; 2:14). 인격적 만남을 가졌던 이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어 그를 따르게 되었다.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마 1:29)는 초청은 지식 전수를 뛰어넘은 전인격적 배움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를 인격적으로 따르도록 하는 것이 그의 디다케 방식이다.

둘째, 구두로 가르치신 것을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당시 율법사와 종교지도자의 가르침과 달리 그의 가르침에 권위가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는 말과 행동의 일치를 보여주셨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삶은 많은 가르침을 베풀었을 뿐 아니라, 그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셨다. 단적인 예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가르침 그대로 보여주셨다.

셋째, 예수는 섬기는 봉사의 가르침으로 통해 진정한 깨우침과 가르침을 베푸셨다. 예수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 9:3)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 그리고 가르치신 대로 몸소 섬김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평생 섬김의 모습을 통해 사람들에게 감동과 변화를 일으키는 삶을 사셨다. 예수의 이런 가르침은 “한 알의 밀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원리였고, 그가 몸소 실천하여 보여주었다.”

b. 케리그마(kerygma)
무형 교회의 두 번째 중요한 기능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것, 곧 ‘케리그마’이다(마 4:23). 천국의 비밀을 가르치는 디다케적 사역은 또 다른 교회의 본질과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케리그마적 사역이다. 가르침이라는 행위(디다케) 안에 가르침의 내용(케리그마)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둘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수께서 전파하신 케리그마의 핵심 내용은 “천국이 가까웠다”(마 10:7)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디다케(가르침)의 초점이었듯이, 그것은 케리그마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런데 둘의 방향성에는 약간 차이가 있다. 무형 교회에서는 둘이 사실상 거의 차이 없이 하나님 나라의 선포라는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사용됐지만, 역사 속에서 케리그마는 디다케와 다소 차별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임영택의 지적처럼 설교를 통해 전달되는 케리그마는 선포적 기능을, 그리고 디다케는 양육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예수의 사역에서 케리그마는 천국의 도래를 선포하는 형식으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침례 요한의 죽음 이후 ‘부터 예수께서..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고 설교하셨다. 예수는 가르침이란 형식을 취했을지라도 그것은 선포적인 성격을 지녔다. 그가 가진 메시지 그 자체가 권위를 지닐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그의 가르침 자체가 케리그마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메시지를 선포할 때,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막 1:2)라는 반응을 보였다.

C. H. 도드(C. H. Dodd)는 디다케를 주로 윤리적 권고, 변증, 기독교에 대한 논리적 소개  등으로 이해한 반면, 케리그마는 이방세계를 향한 기독교의 선포로 봄으로써 둘을 구분해 이해했다. 이런 구분을 통해 도드는 무형 교회 시기가 지난 후 유형 교회 시대가 도래했을 때, 사도들이 사역했던 초대교회에서는 디다케보다 케리그마, 즉 선포의 사역이 핵심적인 사역이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복음서에서는 두 기능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긴밀히 연결되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오히려 디다케적 기능이 주를 이뤘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사복음서에서 나타난 예수의 모습은 비록 가르치는 자로서의 역할이 두드러지지만, 복음의 설교자이자 선포자로서의 모습이 사실상은 결코 덜하지 않다. 빈도상으로는 예수가 교사로서 훨씬 더 많이 언급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사역의 비중을 두고 볼 때, 예수는 교사였지만 하나님 나라의 선포자로서도 결코 덜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예컨대 하나님 나라의 선포자로서 예수는 귀신을 쫓아내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고 선언하신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복음서에서는 케리그마의 선포적 기능이 천국의 도래를 선포하는 디다케에 대한 보조적 역할을 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둘 사이의 떼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련성은 끊임없이 인식돼 왔는데, 웨슬리 공동체에서도 그런 현상은 관찰된다. 임영택은 “웨슬리의 설교가 복음전도(케리그마)와 함께 양육적(디다케)인 노력이 어떻게 신앙공동체 안에서 융합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즉, 디다케와 케리그마는 하나님 나라를 설립하는 데 협력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둘이 협력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가르침과 선포는 둘 다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웨슬리도 설교에서 케리그마(전도)와 디다케(양육)를 동시에 수행했는데, 그의 설교는 철저히 성경에 중심을 두었다. 웨슬리는 “한 책의 사람,” “성경벌레”라고 불릴 정도로 성경을 깊이 읽고 철저히 성서 중심적 설교를 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마르틴 루터도 케리그마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그는 설교를 예배의 중심위치로 올려놓고, 모국어로 예배하는 개혁을 이룸으로써 케리그마가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했다.

c. 디아코니아(diakonia)
무형 교회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인 디아코니아(봉사)는 예수의 3대 사역 중 세 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 앞의 둘과는 전혀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사복음서에 기록된 수많은 기적과 관련된 것이 바로 예수의 디아코니아적 사역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수는 어디를 가든지 디다케나 케리그마와 무관하게 병자들을 고치는 치유의 봉사, 곧 디아코니아를 행하셨다. 디아코이니아는 교회의 본질적 기능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으로서, 앞의 둘이 인간의 죄와 같은 개인적 문제를 다루는 사적 영역에 속한 것이라면, 이것은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공적 영역에 속한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개인의 구원이나 영적 문제 같은 사적 영역 뿐 아니라, 사회적 문제와 같은 공적 영역을 포함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디아코니아를 교회의 본질적 기능으로 보는 것은 결코 지나치지 않다.

예수께서는 교사와 설교자일 뿐 아니라, 그는 치료하는 자이자 의원으로 자신을 소개하신다. 예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고 하시면서, 죄의 질병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자신의 사명을 말씀하셨다. 그는 영적 병자인 죄인을 치유하시는 영적 의원이요, 육체적인 질병을 고치시는 치유자로 자신을 소개하셨다. 실제로 사복음서에 기록된 구체적인 기적이 34개가 있는데, 이들 중 28개가 병자를 치유하시거나 죽은 자를 살린 이야기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의 80% 이상이 병자를 고치신 봉사적인 사역인 디아코니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이다. 예수의 치유 사역은 단순히 전도를 위한 도구 정도로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예수의 지상 사역에서 신유로서의 디아코이나는 케리그마나 디다케 버금가는 중요성을 지닌 것이었다. 디아코니아 자체만으로도 예수의 사역의 중요한 의미를 차지했음에 틀림없다.

신약에서 보여주는 중요한 진리는 교회가 보편적인 실체라는 사실이다. 교회가 보편적인 이유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보편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능력은 모든 민족, 모든 장벽을 넘어설 뿐 아니라 영과 혼과 육을 포함하는 보편적이고 전인적인 구원을 포함한다. 침례 요한이 자신의 제자를 예수께 보내어 그의 정체성을 물었을 때, 예수가 주신 답변은 그의 사역의 보편성을 드러낸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 이는 인류 전체를 위한 보편적 사역으로서 치유의 디아코니아가 예수의 사역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음을 입증한다. 그리고 질병으로부터 놓임을 받았을 때, 예수께서 그들을 향해 하신 “구원”이란 용어를 사용하시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막 5:34; 막 10:52; 눅 7:50; 눅 8:48).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예수께서 기적적으로 치유하셨을 때,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고 하셨다.

또한 예수께서는 아무 조건 없이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마 14:14)셨다. 단순히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무리의 모습에 연민을 느끼신 예수는 단순히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이다. 예수가 “지나시며 그들의 모든 병을 고쳐 주셨기 때문”에 어느 집에서도 “병으로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은 마을”이 있을 정도였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런 치유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연관시키셨다는 것이다. 70인의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눅 10:9)고 말씀하셨다. 병자를 고치는 일을 구원으로 선포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연관시켰다는 사실은 디아코니아가 얼마나 중요한 보편적 사역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디아코니아적 사역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는 예수의 선언에서도 분명해진다. 예수는 무형 교회가 자기희생적으로 세상을 섬기는 디아코니아적 기능을 수행해야 할 것을 몸소 보여주셨다. 예수는 섬김을 받으려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봉사자요 섬기는 자로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 나라의 설립을 위해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은 교회 역시 그리스도처럼 세상을 향해 섬기는 사역을 부여받았다. 신약에서 디아코니아는 대개 그리스도인의 독자적인 행위라기보다는 공동체적으로 진행되었다. 병자에 대한 치유를 포함해 이웃에 대한 섬김 혹은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했다.

천국의 비밀을 가르치고(디다케), 복음을 선포(게리그마)하는 것과 더불어 봉사하는 것(디아코니아)은 교회의 핵심적 사명으로서, 그들은 모두 경중을 따질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데 있어서 중요한 교회의 사역이었다.

2. 오순절 이후 교회의 두 가지 핵심 기능
무형 교회가 죄인과 세상을 향한 교회의 본질적 사명에 집중했다면, 유형 교회는 이미 조직된 교회가 과연 어떤 사명에 집중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준다. 사도행전 이후의 유형 교회는 무형 교회의 본질적 기능, 곧 디다케(행 2:42), 케리그마(행 5:42), 그리고 디아코이니아(행 6:1)와 같은 본질적 기능들도 충실히 수행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에서 교회가 유형화될 때, 어떤 요소가 추가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다. 코이노니아(교제)와 레이투르기아(예배)는 무형 교회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요소였지만, 오순절 이후의 교회에서는 이들이 본질적 중요성을 띤다. 신자들의 공동체가 확대되고, 다양한 계층과 출신의 사람들이 교회로 쏟아져 들어오게 되면서 교제와 예배(전)가 교회의 본질적 기능들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a. 코이노니아(koinonia)
구약에서 교회를 의미하는 대표적 용어는 ‘카할’과 ‘에다’인데, 카할은 주로 모임을 의미하는 단어이고, 에다는 모인 무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에서 카할은 주로 에클레시아로 번역했는데, 이것이 교회를 가리키는 대표적 용어로 정착했다. 에클레시아는 본래 고대 아테네에서 자유시민들의 모임을 의미했는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한다. 하도균의 지적처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유형 교회는 이전의 무형 교회와 확연히 구별되는 한 가지 특성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성령의 코이노니아로서 존재하는 에클레시아”라는 것이다. 사람이 중심이 되는 교회라는 개념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에클레시아가 코이노니아적 공동체로서 변모하면서일 것이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는 본질적으로 건물이나 조직이라기보다는 사람, 곧 신자들의 공동체로서 그것의 필수 요소가 코이노니아(교제)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오순절 이후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유형 교회는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행 2:42)고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46절)는 코이노니아 공동체였다. 문자적으로 코이노니아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갖거나 소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코이노니아’라는 용어는 복음서에는 없고, 사도행전 2장 42절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를 두고 존 R. W. 스토트(John R. W. Stot)는 “코이노니아가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이유는 보혜사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진정한 의미의 코이노니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신자들은 단순히 같은 신앙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신앙공동체의 수준을 넘어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그런 삶의 전반을 공유하는 코이노니아 공동체가 되었다. 그들은 운명 공동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삶의 전 영역을 나누는 코이노니아가 이뤄지는 공동체였다.

사도 바울은 이런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엡 1:23)에 비유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성만찬의 떡과 잔을 나눔으로써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눔으로써 만들어진 이런 유기적 공동체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뤄지는 코이노니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몸 비유에서 우리는 교회가 가진 중요한 영적 통찰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모든 신자는 다른 형태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존재하는 운명적인 공동체이다. 그리고 모든 신자는 그 존재감이 아무리 미미하다할지라도 모두 다 동등하게 중요하다. 코이노니아는 이처럼 상이하면서도 강력한 결속을 전제로 한다(고전 12:12-27).

교회의 본질적 기능인 코이노니아는 조직된 유형 교회에서 그 필요가 더욱 부각되었는데, 이는 교제를 통해 신자들이 더욱 결속하고 더 단단한 조직 체계를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코이노니아는 신자들로 하여금 건강한 유기체가 됨으로써 위에서 언급한 3대 본질에 더욱 충실해지는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성령을 통한 코이노니아는 신자들의 공동체에 더욱 강한 결속을 제공함으로써, 선교를 위한 강력한 동력을 제공하게 된다. 그 결과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행 2:47)는 선교적으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처럼 진정한 코이노니아 공동체는 초대교회에 강력한 선교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처럼 교회를 성도의 교제로 보는 이미지는 그것이 “성령 충만한 사회적 공동체임을 의미
한다.” 성도의 교제로서의 교회는 오순절 사건 이후 교회의 주요한 본질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후 역사적 과정 속에서도 그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었다. 예를 들어, 사도신경에서도 교회를 “성도의 교제”(the communion of saints)로 봄으로써 그것을 사회적 실체이자 하나의 영적 공동체로 간주하고 있다. 교제를 의미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koinonia)는 ‘공동으로(코이네, koine) 나누는 것’을 가리키며, 영어로는 felowship(친교 또는 교제)으로 번역된다. 따라서 성도의 교제로서 교회가 가진 중요성은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공유하고 있는 무언가에 기초하여 화해된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타인을 경험”하고 있다는 뜻이다.

성도의 공동체로서 교회를 이해할 때, 역사적으로 가톨릭과 종교개혁자들은 그 강조점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 가톨릭이 유형적인 조직체로서의 교회를 강조한 반면, 종교개혁자들은 “비가시적이며 유기체적인 성도들의 교제를 강조하며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유기적인 공동체로서 본래적 기능을 회복하는 것은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중요한 과제이다. 진정한 성도의 교제는 오직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은 교회 안에서 성도의 교통, 즉 교제를 가능케 하며 유기적인 공동체가 될 수 있는 힘의 근원이었다”는 하도균의 지적은 적절하다.  

코이노니아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다양한 용어와 더불어 사용되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우리의 사귐”(요일 1:13), “하나님과 사귐”(요일 1:6),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고전 10:16), “성령의 교통하심”(고후 13:13). 크레이그 밴 겔더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들 용례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유형의 인간 공동체 곧 친교 공동체를 만드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중요한 사실은, 성도 사이의 진정한 교제는 하나님과의 교제, 그리스도의 보혈에의 참여, 성령과의 교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과의 친밀한 수직적 코이노니아가 없이는 동료 인간과의 수평적 코이노니아도 불가능하다.

b. 레이투르기아(leiturgia)
무형 교회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레이투르기아, 곧 예배(혹은 예전)이다. 코이노니아(교제)를 통해 신자들에게 집중하고 그들 사이에 덕을 세우는 일이 일어났다면, 레이투르기아(예배)는 신자가 아닌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행 2:42)하는 공동체였다. 예배와 예전이 이때부터 정식으로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떡을 떼다’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신약에서 추의 만찬과 친교의 식사를 모두 포함하는 표현이다. 유대인들은 ‘식사하다’는 말을 ‘떡을 떼다’라고 관용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마 14:19; 15:36; 막 8:6, 19; 눅 24:30, 35).

그런데 마태복음 26:26, 마가복음 14:2, 고린도전서 10:16; 1:24 등에서는 동일한 표현이 성만찬예식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2:42, 46에서는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한데, 문맥상 후자일 개연성이 더 높다. 많은 사람이 침례를 받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이 증가하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 떡을 뗀다는 표현은 성만찬예식인 것으로 보인다. 즉, 예배 속에 “사도들의 가르침,” 교제, 떡을 떼는 예전도 포함된 것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모여서 성만찬예식을 거행한 것으로 추정되는 또 하나의 증거는 “하나님을 찬미”(행 2:47)했다는 표현이다. 이런 모든 것이 이어진 결과,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늘어나게 된 것이다. 이 초대교회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행 2:46)썼다.

무형 교회가 복음전파, 가르침, 그리고 봉사 등 외부적 사역에 집중했다면,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유형 교회는 내부적 필요를 살피고 신자 공동체를 돌보는 사역에도 주의를 기울인다. 물론 코이노니아가 신자들에게 집중하는 것이라면, 레이투르기아는 주님께 집중한다는 차이가 있긴 하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코이노니아와 레이투르기아는 교회의 내적 필요에 집중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교회가 제대로 된 조직을 갖추면서 현저하게 부각되기 시작한 역할과 기능이 바로 ‘레이투르기아’(예배)이다. 주님이 오시는 시간이 가까울수록 레이투르기아에 대한 강조는 점점 증가한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복음서의 무형 교회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레이투르기아(예배)는 오순절 이후 교회에서 본질적 중요성을 띤 요소가 된다. 특히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는 교회에서 우리는 교회 예배에서 본질적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보게 된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라는 단순한 구절에 말씀과 성례, 그리고 기도라는 예배의 요소들이 언급된다. 그리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찬미하며…’(행 2:46,47)라는 구절에서 예배의 또 다른 요소인 찬양이 등장한다. 그래서 로버트 E. 웨버가 “말씀과 성례전”을 기독교 예배의 근간으로 보고, 이들 두 중심축 주위에 기도와 찬양을 추가시킨 것은 설득력이 있다.

초대교회에서부터 말씀과 성례전은 예배에 있어서 본질적인 부분을 차지했고, 기도와 찬양은 부가적 기능을 수행했다. 그것이 말씀을 가르치는 것(디다케)이든 혹은 말씀을 선포하는 것(케리그마)이든 예배에 말씀이 필수적인 요소로 포함된다는 사실을 주목할 만하다. 예배의 본질과 관련해 기독교 역사는 예전 중심과 말씀 중심으로 양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복잡하고 화려하며 신비적인 동방교회와 단순하고 분명하고 정교하게 발전한 서방교회는 서로 정도의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예전을 중요시하였다.

특히 로마 가톨릭의 경우 7가지 성례전을 통해 은총이 수여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예전은 본질적 중요성을 띤다. 사제들이 예배의 중심이 되는데, 이는 사제가 집례하는 성례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의 은총이 자동적으로 수여된다는 사효론(ex opere operato)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성례신학은 예배의식에 여러 미신적 요소가 개입될 여지를 마련했고, 4세기부터 교회 내에 성물숭배가 침투하게 되었다. 온갖 종류의 성물이 제작되거나 수집되었고, 교회는 그것을 통해 수입을 올리는데 혈안이 되었다.

세례 후 짓는 죄에 대한 해결책으로 고안된 고해성사도 훗날 대리 참회, 돈을 통한 참회 면제, 그리고 급기야는 면죄부 판매 등으로까지 확대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로마 가톨릭의 예배에서 미사(주의 만찬)는 희생제사 개념이 뚜렷한데, 이는 개신교에서 제사 대신 “살아계신 주와의 친교라는 개념”으로 회복된다. 반면 종교개혁자들에게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선포되고 성례전이 올바로 집행되는 곳”이었다. 그들은 말씀 선포와 성례전을 예배의 두 본질적 요소로 보았는데, 전자를 더 본질적인 것으로 여겼다.

예컨대, 가톨릭의 7성례 중 침례와 성만찬만을 성례로 인정하고, 미사를 라틴어가 아닌 자국어로 드려야 함을 역설한 루터는 예배에서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주장했고, 츠빙글리는 루터의 말씀에 대한 강조를 극단적으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그는 말씀을 듣는데 방해가 되는 것(음악, 예복, 화상, 오르간 등)을 거부했다. 츠빙글리는 성경에 비춰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모든 것을 엄격히 배격했다.

칼뱅은 가톨릭의 미사를 희생제사로 전락했다고 비판하고, 성경과 사도전승에 따라 갱신해야 함을 주장했다. 그는 “말씀 없이 참된 성례전의 거행은 있을 수 없다. 성스러운 만찬으로부터 어떠한 유익이 우리에게 일어나든지 간에 말씀을 필요로 한다”라고 함으로써 성경과 성례전의 불가분리성을 강조했다. 성례전 자체만으로도 효력이 발생한다는 로마 가톨릭의 사효론(ex opere operato)은 종교개혁자에 의해 거부되고, 성례의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말씀과 믿음이 필수적임을 개혁자들은 주장했다.

II. 포스트 코로나19 시대의 교회와 예배를 위한 제언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를 위하여 복음서와 사도행
전에서 그 설립 초기부터 ①디다케 ②케리그마 ③디아코니아 ④코이노니아 ⑤레이투르기아에 이르는 다섯 가지 중요한 기능을 수행해오고 있다. 복음서의 교회는 첫 세 가지에 집중하고 있는데, 이들은 무형 교회에서 필요했던 본질적 기능이었다.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자를 고치는 3대 사역(마 4:23)을 하시면서, 이들 세 가지 본질적 기능의 중요성을 친히 보여주셨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 후 교회는 형태를 갖춘 유형 교회가 되었고, 본질적 기능 외에 두 가지 부가적 기능, 곧 코이노니아와 레이투르기아가 추가되었다. 이들 기능은 유형 교회가 내적으로 든든히 서도록 하는 것이었다. 유형 교회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기능이 바로 코이노니아와 레이투르기아이다. 이들 두 부가적인 기능이 없이 유형 교회는 그 본질적 기능을 수행하기 곤란하다. 따라서 유형 교회에서 코이노니아와 레이투르기아는 더 이상 부가적 기능이 아닌 필수적 기능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교회는 위의 기능 중 몇 가지는 심각한 한계 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모든 신자가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는 일이 사실상 중단되면서, 기독교는 교회의 본질에 대해, 그리고 예배의 역할과 설교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가장 심각하게 느껴지는 교회의 기능적 결여는 유형 교회가 출현하기 시작하면서 생기게 된 기능인, 코이노니아와 레이투르기아이다.

1.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 결여 문제 해결방안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전 세계는 감염병 예방을 위한 조치로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e)라는, 관계적 존재인 인간에게는 생소한 지침을 내놓게 되었다. 내가 아닌 모든 사
람을 잠재적 감염자로 생각하고 거리를 두어야 하는 우울한 상황이 초래되었다. 전염성이 강력한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서 내려진 불가피한 조치이긴 하지만, 사회적 거리두기는 성도
간의 깊은 교제인 코이노니아를 전제로 하는 교회에는 가혹한 조치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초기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 원인 제공자가 교회였기 때문에 이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가 전통적인 방식으로 밀집된 예배당에서 집회를 고집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국내에서 교회 집회가 금지되었고, 교회들은 온라인을 통해 교회의 본질적 기능을 수행하고자 다양하게 노력했다. 온라인을 통한 예배, 성경연구, 각종 세미나, 심지어 사이버교회까지 활성화되는 등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다. 온라인을 통해 여러 가지 콘텐츠를 신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스럽다. 교회가 문을 닫고, 공중예배를 중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을 통해 온라인예배가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구현해낸 사이버공간이 가진 폐해도 분명히 무수히 많지만, 그것이 가진 개방성, 익명성, 세계적 차원의 정보 공유 등은 분명 매력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이길용은 “다른 사회보다 권위적이고 경직되기 쉬운 종교계의 일방향적 문화와 분위기를 보완하기에 사이버공간은 적절한 대안이 될 수”있다고 주장한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교회는 건물이나 특정 공간 혹은 조직 체제의 한계를 뛰어 넘는 다양한 형태로 된 신자들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음을 보았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교회는 다양한 방식으로 교회의 전통적 기능의 결여를 대체하기 위한 노력을 펼쳤다. 하지만 조직된 유형 교회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여겨졌던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는 교회에 직접 출석하지 않고, 동영상을 통한 온라인예배나 실시간 예배 실황 중계에 참여하는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공백을 메울 방법은 묘연했다.

정부 차원의 교회 출석에 대한 자제 권고와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으로 인해 함께 모여서 스킨십을 가질 때 가능했던 성도 사이의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는 최소화 되거나 거의 이뤄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물론 가까운 가족 단위의 제한적인 교제나 봉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다양한 성도와 함께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적잖은 부담이 작용해 제대로 된 코이노니아나 디아코니아는 이뤄질 수 없었다. 교회가 나름대로 다양한 형태의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를 온라인상으로 진행하고자 여러 가지 시도를 했지만, 여전히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마냥 손을 놓고만 있을 수 없는 이유는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앞으로 제2, 제3의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할 경우 교회는 어떻게 그런 사태들에 대처해야 할지 우리에게 중요한 백신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번 코로나19 사태가 아닌가 한다. 어쩌면 앞으로는 이전과 같은 시대가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불안감까지 우리를 짓누른다. 이런 시대를 위해 교회가 시도해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온·오프라인을 통한 코이노니아 및 디아코니아적 대안으로는 소그룹을 더욱 활성화하는 것이다. 물론 전제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사회적 거리를 유지한 채 반드시 오프라인 상의 교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두세 가정 단위의 소그룹이 야외에서 하이킹을 하든지, 천연계 탐사를 함으로써 교제하거나, 가족 단위의 소규모 봉사 활동도 사회적 거리를 충분히 유지하면서 하는 방안이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성도간의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를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은 하나님과의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이뤄지는 것이다. 이처럼 성령을 통해 이뤄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코이노니아는 교회의 본질적 기능인 디다케와 케리그마를 통해 가능할 것이다. 즉, 신자들 사이의 수평적 코이노니아와 이웃을 위한 디아코니아 활동이 취약한 때에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진정한 수직적 코이노니아를 강화시키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그 본질적 기능에 충실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일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2. 디다케와 케리그마 사역 강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전통적 교회 활동이 정상적으로 이뤄질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본질적 기능을 강화할 방안을 마련하고 다양한 상황에 대해 철저히 대처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대면 예배가 이뤄지지 않는 상황 가운데서도 코로나19 사태는 교회로 하여금 다양한 채널과 방식을 통해 신자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고 훈련할 방안을 강구하게 했다. 대면 예배가 중단됨에 따라 다양한 온라인 콘텐츠를 제작해 보급했고, 신자들은 온라인상에서 자신의 필요에 맞는 콘텐츠를 직접 찾아 나섰다.

이런 필요에 부응해 교회는 다양한 강의, 성경연구, 설교 영상을 온라인 공간에 제공했다. 그들 중에는 양질의 것도 있지만, 성서적 검증을 필요로 하는 온갖 콘텐츠도 난무함으로써, 효과적인 온라인 콘텐츠 제작과 보급을 위한 교회 차원의 전략적 투자가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를테면, 재림교회의 미디어선교팀은 현재 콘텐츠 제작을 위한 하드웨어적인 인프라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다양한 콘텐츠 제작을 위한 전문 사역팀이 부재한 상황인지라 향후에 그런 사역팀을 꾸리는 것도 고려해 봄직하다.

가르침과 복음 전파라는 기본적 기능을 수행함에 있어서 교회는 제한된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서는 초개방적인 다양한 가능성을 보았다. 비록 이것이 최선의 방식은 아닐지 몰라도, 온라인을 통한 디다케와 케리그마적 사역의 가능성을 우리는 보았다. 코로나19 사태가 종결되어 정상적인 교회 활동이 가능한 이후에도 이미 일정부분 확인된 온라인을 통한 디다케와 케리그마적 사역은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반드시 물리적 공간 안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감안할 때, 이에 대한 대처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 놓는 것은 필요하리라고 본다.

인터넷 공간을 통한 초연결성을 전통적 방식의 교회 활동에도 적극 활용하는 것은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훨씬 많은 선택지가 될 것이다. 이는 코로나19가 아니더라도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사항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이미 해결된 후라 할지라도, 대면 접촉을 통한 성경연구와 설교 등과 병행해서 온라인 상의 디다케와 케리그마적 사역도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3. 코로나 사태와 예배의 방향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예배의 본질적 요소는 말씀과 성례이고, 이에 기도와 찬양이 부가적 요소로 추가되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의 예배를 보면 이런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다. 예컨대,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후 누가는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1, 42)고 기록한다. 이 본문에 따르면, 말씀과 침례와 떡을 떼는 성찬의 성례가 초대교회의 예배의 본질적 요소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들은 기도하는 공동체로서 함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행 2:46)했다. 예배의 본질적 요소인 말씀과 성례뿐 아니라, 부가적으로 기도와 찬미까지 포함함으로써 완벽한 예배의 필수적 요소를 갖춘 모습을 보게 된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온라인예배를 드리게 되면서 예배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면예배를 대체할 다양한 온라인 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임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예배의 본질적 요소들이 현저히 결여되거나 전무함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증강현실 등과 같은 특수 매체를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온라인으로 성례전을 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기도나 찬양도 함께 모여 뜨겁게 하기 보다는 화면 앞에서 하다 보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온라인예배에서도 물의 없이 그나마 전통적 예배에 상응하는 정도로 제공할 수 있는 예배의 요소는 말씀일 것이다. 잘 준비되고 정제된 영상 설교는 비록 현장감은 다소 떨어지더라도 말씀의 질로 승부할 경우 갖가지 장애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감동적이고 설득력 있는 설교 콘텐츠를 풍성하게 제작해 결여된 다른 요소를 보완해 줄 필요가 있다. 설교 말씀은 예배의 가장 본질적 요소로서,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서서 겸손히 경청하는 시간이다. 이 경험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교회의 예전들이 의미를 지니고, 기도와 찬미로 가득한 교회가 될 것이다. 비록 수백 명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지 않을지라도, 뜨겁고 감동적인 말씀이 있다면 최소한의 예배는 가능해지리라 믿는다. 예배에서 말씀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지만, 예전, 기도, 찬양 등의 요소와 결합되지 않는다면, 분명 말씀도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만약 온라인예배로 다시금 가야할 상황이라면, 설교말씀 콘텐츠를 최고 수준으로 만들고, 예전을 어떻게 진행할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며, 기도와 찬미를 통해 예배의 감격으로 신자들을 초청하는 방안도 다각도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IV. 나가는 말
코로나19 사태가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 전반과 교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또 어려움을 야기한 것은 틀림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백신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그런 면에서 코로나19 사태 이전 교회의 이후 교회는 분명 다른 모습일 것이다. 본 연구는 교회가 전통적으로 수행해 온 3가지 본질적 기능과 2가지 추가적 기능을 중심으로 교회의 역할에 대해 살펴보았다. 교회의 3대 기능인 디다케, 케리그마, 디아코니아는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은 무형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인데, 대면예배가 전면 금지된 상황 속에서 이 부분에 대한 다양한 도전을 경험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추가된 부가적 요소인 코이노니아와 레이투르기아는 유형 교회의 주요 기능인데, 이들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이번 사태를 통해 경험하게 되었다. 무형 교회에서 본질적 요소인 디다케, 케리그마, 디아코니아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에 있어서 교회가 외부를 향해 감당할 선교적 역할이었다. 첫 세 요소 중 디다케와 케리그마는 온라인상으로 제한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어느 정도 큰 문제없이 작동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보다 잘 준비된 성경 연구나 설교 콘텐츠를 전문적으로 제작하여 보급할 필요를 느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교회의 중요한 사역인 디아코니아는 코로나19 사태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 중 하나로 인식되었다. 이런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 가운데서, 교회가 어떻게 봉사의 사역을 할지에 대해서 깊은 논의와 연구가 필요하다. 제안하기는 전염병 및 경제적 취약 계층인 노인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봉사를 고려해봄직 하다.

사도행전 2장의 유형 교회에 추가된 코이노니아와 레이투르기아적 기능은 이제 막 조직된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였다. 이들은 사도행전 2장 이후의 모든 유형 교회가 세상에 천국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제대로 감당함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들이다. 코이노니아는 초대교회 공동체를 하나로 단단히 묶어주는 중요한 고리와도 같은 것으로서 유형 교회가 그 전도 사명을 완수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 이후 교회는 온라인으로 다양한 연결을 시도해 보았지만 진정한 코이노니아적 사역을 함에 있어서 심각한 한계 상황에 직면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전염병에 대한 대처 지침 자체가 코이노니아를 원천봉쇄하는 장본인이 되었기 때문에 코이노니아는 본질적으로 “이중적인 관계, 서로 주고받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기에 연결이 필수적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코이노니아의 단절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교회는 온·오프라인 상의 초연결성을 확보할 필요를 절감하게 되었다. 줌, 스카이프, 카카오 등과 같은 온라인 매체를 이용한 교제의 가능성도 보았고, 이들이 가진 한계를 극복할 소그룹 단위의 연결, 예컨대, 야외 및 천연계 활동 등과 같은 것들이 병행되어야 할 필요도 느꼈다. 물론 하나님과의 수직적 코이노니아가 모든 수평적 코이노니아의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끝으로 레이투르기아는 말씀, 예전, 기도, 찬양 등으로 구성된 것으로서 초대교회의 선교적 동력의 원천이었는데, 코로나19 사태로 크게 도전받고 있다. 온라인예배에서 불가피하게 취약할 수밖에 없는 예배의 부가적 요소인 예전, 기도, 찬양 등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은 보다 잘 준비된 말씀 콘텐츠이다. 예배의 본질적 요소인 말씀 선포를 더욱 강화하는 방안을 찾는 것이 필수적인데, 이를 위한 교회 차원의 진지한 고민과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미래사회가 어떻게 펼쳐지든지 교회가 가진 본질적 기능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설립하는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코로나19가 초래한 위기에 의연히 대처하면서 교회의 본질적 기능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로 삼는다면, 오히려 미래 교회가 더욱 든든히 서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